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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Aug 03. 2023

나의 외계인 도감

당신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같은가요?

이번년도 초에 좋아하는 천선란 작가님의 <나인>을 읽었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비밀을 푸는 과정도, 흥미로운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것도 모두 좋았지만, 나의 마음을 가장 흔들었던 책의 주요 내용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그냥 딱 보면 알아. 아, 쟤도 바깥에서 왔구나.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야."
"왜?"
"인간들이 정해 둔 규칙을 지키는 거지. 외부인이니까."

- 천선란, <나인> 중


책의 주인공은 외계인이다. 평생을 자신이 평범한 지구인인 줄 알았던 외계인. 그러나 본인이 외계인임을 알게 된 순간 그동안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의문의 실마리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왜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경험이 있거나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들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이 책을 가장 크게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나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던 이유였다. 나 또한 이 세계에서 내가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의문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 그런지 모호하거나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일한 성질끼리 분류해놓고 그 안에서도 크기에 따라, 혹은 색상에 따라 분류하고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의 책장은 언제나 책의 키 순대로 정리가 되어있었고, 옷장도 종류별, 색상별로 정리를 해두었다. 나는 그렇게 나와 내 주변인들도 하나씩 정의를 내리고, 그 안에서 분류 내리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와 같은 분류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더 편함을 느꼈을테고, 자연스럽게 내 곁엔 그런 사람들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 근래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을 하나둘씩 겪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겪으며 먼저 나는 나의 분류가 틀렸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감이 들었고, 나의 분류법 대로라면 우리는 이제 함께 묶일 수 없으나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며 심란해졌다. 그 여파로 약 4개월 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직장과 집, 운동만 반복하는 일상을 보냈다. 나는 원래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큰 위안을 얻는 사람이었으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 과정이 사실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 그저 서로의 문장이 상대에게 닿지 않고 허공에 흩어져버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면서 잠시동안 사람을 만나는 일을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만나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참 너 자신을 정의하고 싶어하는 거 같아. 그리고 그 모습을 발견해주는 사람에게 안정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아. 근데 사람은 누구나에게 같은 모습만을 보여주진 않아.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모습이나 내가 또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는 나는 또 다른 나야. 그리고 내가 내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그 모습이 또 내 모습의 전체는 아니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듯이 멍해졌다. 물론 우리는 서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시간을 나누긴 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들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한 사람도 10살의 그와 20살의 그, 30살의 그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러니 애초에 누군가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우리가 타인에게 완전히 공감하거나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고 비록 사람들과 나누는 문장이 허공에 흩어져버리더라도 결국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겠다며 다시 활발하게 지내던 중, 김소영 작가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란 책에서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라는 인상적인 문장을 읽었다. 이 문장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외계인이 아닐까? 우리는 아마 모두 각자의 행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무리 서로에게 문장을 던져봐도 결국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만 할 수 있을 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이해받지 못할 이야기를 왜 계속 던지면서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그 답은 찾은 것도 같다. 아마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우리의 세계를 더 확장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4개월의 고독한 생활동안 나는 먼저 나의 분류는 애초에 맞을 수가 없었다는 점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엔 함께 묶이지 않더라도 함께 하고 싶은 방법을 생각했다. 내가 내린 답은 내가 그들의 행성, 혹은 그 외계인을 탐구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서로가 보는 모습은 모두 한 파편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그 모습조차 우리의 관계에 따라, 각자의 시간이나 경험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였다. '이 세상엔 이런 생각을 가진 외계인도 있군.'이라며 나의 외계인 도감에 또 다른 외계인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외계인 도감에 기록되는 외계인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또 새로운 외계인을 만나도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외계인 도감을 열어 그를 최대한 열심히 오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도감이 더 두꺼워질수록 나는 더 많은 외계인을 곁에 두고 품어줄 수 있는 멋진 외계인이 될 수 있겠지.


김소영 작가님의 책에서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추천받은 책 이슬아X남궁인 작가의 서간문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열 번 가까이 긴 편지를 주고받아도 선생님의 불행과 행복은 여전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사이엔 늘 오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 서로를 모르니까요.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훌륭한 동료 작가 요조는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 이슬아X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중


우리 사이에도 늘 오해가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모른다고 도망치지 않고 이제 다가가겠습니다. 당신을 나의 외계인 도감에 기록해야 하니까요. 오늘도 당신을 통해 나의 세계를 더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오해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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