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 뒤에 저마다의 어둠
요즘 주변을 보면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다.
겉으로는 햇살 쨍한 평화로운 잔디밭인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세상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잘못 발을 디디면 "펑!" 얼마나 큰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그런 느낌. 나와 가장 가까운 부부들이 그렇다. 어쩔 때는 우리도.
밖에서 만나면 다들 웃고 있지만, 모두의 웃음 뒤에는 크든 작든 어둠이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서야 알았다.
돈 때문에 뼈아프게 힘들었던 나는 막연히 돈이 많으면 어느 정도는 더 행복할 줄 알았는데, 부유한 집안에서도 불우하게 자라 부모와 연을 끊은 지인을 보면서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아픔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집이나 그 집만의 행복과, 그에 걸맞은 불행을 안고 사는 걸까.
어머님이 엊그제 집을 나가셨다.
항암치료 중이신데 약도 두고 뛰쳐나가 몇 시간 거리의 친척 집에 가셨다고 한다. 이틀째 가출. 아버님과의 불화가 화근이다. 두 분은 늘 아웅다웅 다투시는 편인데, 어머님이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하던 일을 정리하시고 온종일 붙어 지내게 되면서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는 모양이다.
거기다 어머님이 치료 부작용으로 인지장애가 오시면서 자주 잊어버리시는데, 어머님은 본인 기억이 맞다고 우기시고, 아버님은 한 번씩 크게 욱하시고. 이런 일들이 잦아지는 것 같다. 당장 약을 두고 가셔서 걱정이 됐는데, 찾아보니 대부분 소화제와 항우울제 계열이라 며칠 안 드신다고 큰일이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혼하자고 계속 그러신다는데… 잘 해결되겠지? 내일은 집에 들어가셔야 할 텐데. 멀리 있는 자식 내외는 속이 타들어 간다.
절친하게 지내는 부부 내외가 있다.
자주 만나는데, 아이들도 착하고 부부도 사람들이 참 좋다. 특이점이 있다면 남편이 겉보기와 달리 매우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아내가 육아에 진심이고 자기 철학이 확고하다는 것.
아내의 기준으로 양육이 이루어지기에 남편이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아내가 아이 셋 육아를 전적으로 도맡고 있어 불만을 가질 분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들도 건강한 식사와 체계적인 언어 교육 덕분에 세 개 국어를 할 만큼 엄마의 열정이 눈에 띈다.
남편은 친구들을 좋아하고 성격이 호탕한 편이라 누구나 호감을 갖게 된다. 오래 친하게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건, 그가 외향적이면서도 공감과 위로, 대화를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완전한 T형이라 둘 사이에 어려운 부분도 있겠다 싶었다. 그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상황이 정말 심각해졌다. 자주 보는데도 겉으로는 전혀 몰랐는데, 남편의 폭언으로 가정 내 불화가 깊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해줘야 한다, 넌 뭐냐"부터 시작해 쌍욕까지. 그리고 남자아이에 대한 폭력. 남편은 그걸 '훈육'이라 했고, 아내는 '학대'라 했다.
조선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가치관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폭언과 아이 학대, 가스라이팅 속에 아내의 속이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듣는 나조차 숨이 턱 막히고 우울해졌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말들을, 나랑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남편을 통해 이야기해보려 했더니 "집안일은 집안 안의 일"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어설프게 나서기도 어려웠다. 증거를 모아서 대응하자는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아내는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가 함께 바뀌지 않으면 쉽지 않을 텐데, 조선시대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 '상담'이라는 게 가닿을 수 있을지. 아찔하다. 겉으로는 더없이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 이런 아픔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찢어진다.
이뿐 아니라 나와 속 깊이 얘기를 나누는 가족과 친구들은 저마다 부부 사이에 전쟁의 씨앗을 하나씩 안고 산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면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와 한바탕 사달이 났다가, 다시 시들어 땅으로 돌아가면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땅 안에는 여전히 잠든 씨앗이 있다. 우리는 다 자란 어른들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보이는 모습은 달라도 결국 본질은 같은 녀석이 언젠가 다시 찾아오게 되어있다. 좀 더 지혜로운 사람들은 씨앗을 더 오래 잠재워두거나, 싹이 트더라도 일찌감치 잘라낼 수 있겠지만.
우리도 결혼 9년 차.
“아, 남편이랑 이렇게 평온하고 행복할 수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면,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면 꼭 하나씩은 문제가 생기던데'라는 생각이 함께 따라온다. 9년 동안 쌓인 내공으로 평화 속에 잠든 불화의 씨앗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본다. 휴, 아직은 괜찮나 하고 한숨 돌리며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즐긴다.
그러다가도 주변의 지뢰밭들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남의 부부 일에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다. 어설프게 끼어들면 오히려 일이 커질 수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들어주고 위로하는 것, 그리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네는 것뿐이다.
부디 어머님이 빨리 집으로 돌아가셔야 할 텐데.
제발 저 집 남편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혼자 앉아 하늘에 바라본다. 사람이 바뀌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변화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