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로서의 올곧은 인정, 당신이 옳다.
운명처럼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물론 아직 독서량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읽는 책 한 권 한 권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곤 하지만 근래에 읽었던 '당신이 옳다'만큼 요즘 내 삶에 자꾸 끼어드는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책 전반에 반복해서 나오는 '공감'과 '옳다'는 자꾸 머릿속을 휘저으면서 일상 속으로 침범하였다. 누군가는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라고 말하지만 나는 늘 인지하는 것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인지한 것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인지는 했지만 행동이 불일치하는 나를 보는 경험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도 밥을 입에 물고 있는 첫째 아이에게 결국 화를 냈다. 아이가 밥을 먹기 싫어하는 이유는 몰라도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저렇게 물고 있을 정도면 얼마나 먹기가 싫은 걸까. 하지만 이런저런 유혹을 제시하면서 시간에 대한 제한을 두고 설득하는 실랑이 속에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 상한다. 게다가 그 제한 시간이 다해감에도 결국 남겨진 밥들을 볼 때, 공감은 애저녁에 잊혀지고 그자리에 나도 모를 불같은 '화'가 남겨진다. 그나마 감정적으로 소리를 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온갖 바른말을 갖다 부친다. 왜 밥을 씹어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이유 백가지는 늘여놓는다. 물론 전혀 먹히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한 화는 더욱 북돋아지고 공감을 느꼈던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마지막에는 '협박하고 겁주는' 무서운 엄마만이 남게 된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뭐랄까. 참 별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뜨끔'하면서 나의 허를 찔렀던 부분은 '훈육과 훈계'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세상의 단 한 사람'이 내가 되어주겠다 수없이 다짐하고 입 밖으로도 내뱉었지만 현실에서의 내 모습은 그저 나의 판단에 따른 지적과 다그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인지가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히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서 그래서 나한테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결단코 'No'이다. 누가 나한테 이건 잘못됐어 이렇게 하는 게 맞아라고 닦달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올바른 생각을 갖고 올바르게 자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올바른 내 모습을 크게 만족스럽다 여긴 적은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올바른 말들을 하루에도 열두 번도 넘게 듣고 있고, 앞으로도 많이 들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나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학교 생활을 통해 아이들에게는 필요 이상의 많은 칭찬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많이 느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집 밖을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이미 전쟁터이고 학교가 그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집 안에서조차 형제들이 있는 경우라면 그곳이 바로 전쟁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 상담을 할 때면 부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많이 칭찬해주고 아이들을 그저 받아주시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교사인 내가 올바른 말을 충분히 하고 있으니 부모로서 나 대신 그 일을 하시라고 등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그 역할이 부모라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이라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해 주어야 할 의무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뭐 얼마나 대단히 올바르게 키우겠다고 끊임없이 혼냄과 잔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내가 아이를 낳은 것은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 않고 도움이 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사랑의 결실이며 그 존재 자체로서 축복인데, 세상밖에 나오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시선 속에 가두어져서는 올바르게 자라야 함을 강요당하고 있다. 왜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는 순간은 인생에 있어 짧은 혹은 몇 번의 경험에 밖에 그치지 못하는 것일까?
매일 아침 남편으로부터 '공감 폭탄'을 받는다는 박사님의 말씀에 그것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했다. 동시에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공감 폭탄'을 주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아이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끼워 맞추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나만큼 바른말을 많이 한 사람이 있을까? 이미 친구들에게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다. 과거의 상대들을 되짚어 볼 필요 없이 누구보다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바른말로 인한 폐해를 실로 많이 겪었다. 나의 바른말은 남편에게 많은 상처가 돼서 돌아갔다는 것을 근래에 인지하게 되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읽으면서 불편했고 자꾸만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책에서 언급하는 후회하는 부모의 편지와 고백들이 모두 내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자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이들에게 행하는 내 태도가 지금 이대로 죽 이어진다면 훗날 나의 모습은 그들과 백프로 일치할 것임이 뻔했다. 바른말 폭격기로 인한 상처는 남편으로 충분했다.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온 힘을 실어서 공감해주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저 ‘당신이 옳다’ 라고 온 힘을 다해, 진심을 다해 말해주는 것이라 한다. 아이가 우는 이유는 나로부터 구구절절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 바른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나마 울음으로 표현할 때가 정확하고 가장 좋을 때라는 것을 직감한다. 언젠가 울음을 감추게 되는 날, 얼굴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숨기게 되는 날, 그 날이 바로 부모 자식 간에 무덤이 찾아오는 때가 아니겠는가!
왜 나는 공감받지 못하면서 나부터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 말은 없다. 내가 이렇게나마 인지할 수 있고 책에서 말하는 바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나 역시 '공감 폭탄'까지는 못 받아봤을지라도 많은 공감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세월, 힘든 순간이든 행복한 순간이든 분명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도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아왔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공감 폭탄자가 되어보자 다짐해본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 우리 가족에게만은 말이다.
어떤 감정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냐의 여부는 결국 존재에 대한 '인정'이 전제가 되어야 함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 존재에 대해 평가하려는 나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이 시작이다. 박사님이 힘주어 이야기한다.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린 상태에서 아이가 바라는 대로 해준다고 해서 아이가 잘못 엇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아이도 다 알고 있다고. 아이들 각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고히 말씀하신다. 그러니 박사님의 말씀을 믿고, 내가 보았던 아이들의 착한 마음을 믿어보자 다짐해본다.
올바른 방법이 아닐지는 몰라도 내가 책을 읽으면서 다짐했던 한 가지는 바로 '기계적인 말 연습'이었다. 온 마음을 다해 공감해주는 것이 베스트이겠지만 매 순간 그렇게 하기는 실로 어려움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렇기에 그저 마음에 없더라도, 비록 영혼을 담아 하는 말이 아니라도 '그랬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말을 먼저 해 주는 것. 나는 일단 그 연습부터 하려고 한다.
'밖에 나가서 혼나는 걸 보는 게 더 싫어', '제대로 알려줘야지 똑바로 하지', '다른 친구들이 싫어하면 어쩔 거야'... 구더기 무서워 장못담그는 심정으로 댈 수 있는 핑계는 넘쳐난다. 아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 그 모습으로 키우기 위해 온 몸을 바쳐 희생했다는 따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바보 같은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더 이상 바른말 폭격기 엄마는 필요 없다. '공감 폭격기 엄마가 되자'고 감히 선언해 본다.
Photo by Jeff Golenski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