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아래를 보며 걸어가기

꾸준히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에 대해

by 이유진

3호선을 타고 남부터미널에 내렸다. 막 5번 출구로 올라가려는 찰나 계단에 서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보았다. 못 본 채 하기에는 정말 도움이 필요하신 듯 보였다. 할머니는 엘리베이터를 찾고 계셨는데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한 층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올라왔고 다시 내려가는 것보다는 그냥 올라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할머니를 부축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할머니는 올라가는 내내 '아이고아이고'를 연발하시며 저 길을 어찌 올라가냐고 울듯이 말씀을 하셨다. 나도 상황이 급했던 지라 할머니의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막막해졌다. 출구까지의 거리가 어찌나 멀어 보이던 지, 그야말로 터널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할머니를 업었으면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 순간 김민식 PD님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산 정상을 올라갈 때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면서 그냥 가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 있을 것이다.


"할머니 위를 보지 마시고, 계단만 보고 올라가세요."


하지만 할머니는 내 말은 귀에도 들리지 않는 듯 내내 곡소리를 내셨다. 나 역시 그런 할머니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를 부축한 채로 그저 계단만 보고 걸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거리였는데 이내 출구에 도착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요즘 나는 일상에서 종종 이것을 경험한다.




우리 집은 9층이다.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 점검일이 있었는데, 마침 둘째를 데리고 나갔다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었다. 고민을 했다. 아이를 안고서 걸어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아이손을 잡고 같이 걸어 올라갈 것인가. 당시 어깨가 많이 아팠던 터라 일단 같이 걸어가 보기로 했다. 가다가 못 갈 것 같으면 그때 가서 안아도 늦지 않겠다 여겼기 때문에 아이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기 시작했다.


혼자서 걸어 올라가는 둘째

17개월 된 아이는 내 예상과는 달리 곧잘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손을 잡고 두 발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다 본인이 혼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손을 슬쩍 놓았더니 재빠르게 두 손 두 발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이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8층이었다. 몇 층을 올라가고 있었는지도 잊고 있었다. 아이 역시 계단만을 보고서 올라왔구나 싶었다. 아직 몇 층까지 혹은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을 터였다. 계단이 있으니 그저 열심히 올라갔을 뿐.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 각자의 힘으로 9층까지 걸어올라 왔다.


이제 두 돌도 안 된 작은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도와드렸던 할머니와의 일화가 생각나기도 했고, 그것이 아이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또 그간 내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요즘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15분 뛰기를 목표로 달리고 있다. 5분도 채 안돼서부터 숨이 차고 뛰기가 싫어진다. 이제 열흘 정도밖에 안된 탓일 수도 있지만 뛰기 싫은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리고 그 순간이 찾아오면 그때부터는 땅을 본다. 그저 땅만 보고 뛰다 보면 어느새 15분에 가까워진다. 오히려 1-2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면 뛰는 것이 힘들어진다. 계속 어플을 확인하면서 시간이 줄어들기를 기대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여 꾸준하게 무엇인가를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게 했다.


'이만큼' 혹은 '이 정도' 하면 됐겠지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부터 기대감은 상승한다. 그것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인데 막연히 고대하게 된다. 그 시점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언제 그 일이 일어날까를 기대하며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게 되고 의욕도 사라지게 되는 것 같다.




주어진 일들, 해야 하는 일들을 그저 묵묵히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가운데 정상을 바라보면서 혹은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위를 바라보며 그것만을 좇는 것만이 좋은 방법은 아니구나’하는 작은 깨달음. 어쩌면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거기서 재미를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보니 묵묵히 하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한 때는 빨리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조급한 마음이 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나는 아직 한 중턱에 서 있다. 어쩌면 아직 산 주변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상으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는데에 집중하지 않기로 했다. 꼭대기만을 쳐다보면서 빨리 올라가기보다는 계속 걸어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예쁜 꽃들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산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은 달려가는 것보다는 페이스를 잃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더 쉽고 즐거운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조금이지만 매일 글쓰기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믿으며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에 글을 쓰면서 고군분투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