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전시 공간에서 작가가 현장에서 직접 작품을 완성하는 드로잉 쇼를 보았다. 그래픽적인 회화를 주로 그리고, 유명하진 않지만 마니아층이 있는 작가였다. 드로잉 쇼에서 작가는 작품의 밑그림을 미리 그려와 현장에서는 채색만 진행했다. 나무 캔버스에 아크릴로 밑바탕을 칠한 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페인트 마커와 아크릴로 채색하는 순서였다. 처음 보는 드로잉 쇼여서 나까지 괜히 긴장되었다.
드로잉 쇼가 시작되기 전, 어느 관객들의 대화를 들었다.
“와 드로잉 쇼 한대.”
“진짜? 여기다 그리는 건가 봐.”
“아, 스케치 미리 한 거네.”
“아아.”
나는 드로잉 쇼라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빈 화면에 작가가 등장해 마법처럼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드로잉 쇼의 대가인 고 김정기 일러스트레이터의 영향이 크다. 아마 대화를 나눈 관객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건축 시뮬레이션 시대와 도면의 죽음』이라는 데이비드 로스 쉬어 저자의 책이 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건축가들은 도면을 손으로 드로잉 했고 이는 종합예술가로서 건축가를 인정해 주는 근거가 되었다. 종이-연필-손-머리가 서로 교감하며 발생하는 우연적인 드로잉의 행위가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로 와서 도면을 컴퓨터로 그리고, 심지어는 프로그램이 도면을 자동으로 생성해 주면서 건축가와 도면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역할을 고민하게 되었다.
대화를 나눈 두 관객이 기대했던 것은 과거의 손도면처럼 온전히 창작자의 손에서 나오는 드로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캔버스에는 이미 정교한 디지털 시안을 통해 그려진 밑그림이 완성되어 있었고, 작가는 현장에서 정해진 경로만 따라 칠하면 되니 관객 입장에서는 약간의 실망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행사가 시작되자 작가가 밑그림 위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빈 화면을 마법처럼 채우는 데서 오는 놀라움은 없었지만, 미리 계획해 놓은 밑그림을 계획에 맞게 채워나가는 안도감이 있었다. 밑그림이 정해놓은 경계에 딱 맞게 채워지는 아크릴 물감과 페인트 마커의 매끈한 질감을 보고 있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작년인 2022년 여름, 시몬스 침대의 침대가 등장하지 않는 광고로 널리 알려진 '묘하게 기분 좋아지는 영상-OSV(Oddly Satisfying videos)'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OSV라는 것이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의 영향과 더불어 현대인들의 피로감을 달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르인데, 작품을 보며 OSV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내 생각의 흐름에 흠칫했다. 확실히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애초에 "드로잉 쇼"라는 단어 자체가 작품이 아닌 작품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이 경험은 예술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성격에 더 가까웠다. 확실히 진도가 느렸던 작업 초반에는 관객 수가 적었지만, 작업이 반 이상 진행된 후부터는 확실하게 관객들이 늘고 관람 시간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 몇 분 동안 집중해 감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묘하게 기분 좋아지는 영상들에서 적당한 자극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은 멈춤 없이 재생되어야 했다.
한편, 이런 즉각적으로 즐기는 예술 행위가 가능하게 된 데는 도구가 큰 역할을 했다. 김정기 일러스트레이터의 붓펜과 네임펜, 내가 본 작가의 아크릴 물감과 페인트 마커는 모두 빨리 마르는, 효율적인 도구들이었다. 붓펜과 페인트 마커는 준비 단계가 많은 붓의 불편함을 간소화했고, 아크릴 물감은 마르는데 오래 걸리는 유화 물감의 시간을 단축했다. 그림이 빨리 마르는 덕분에 작가들은 끊김 없이 드로잉을 재생할 수 있었다.
인간은 도구의 영향을 받는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연구를 거듭해 점점 더 효율적인 도구를 발명해 내고, 이 도구들은 사람들이 더욱더 효율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다.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는 예술 마저,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에 물들어간다.
*관람자로서의 감상을 솔직하게 쓴 글이지만, 전시 공간과 작가에게는 반갑지 않은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전시였는지는 밝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