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나 Sep 29. 2021

이 공허한 파편들이 남긴 것들

요루시카의 도작(盜作)에 관한 에세이


밴드 요루시카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보컬로이드 프로듀서 n-buna(이하 나부나)가 보컬 suis와 함께 결성한 그룹으로, 여름에 관한 서정을 특유의 날카로운 감성으로 노래하여 인기를 끌었다. 나는 나부나가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를 이용하여 니코동에 곡을 올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팬으로, 요루시카에 와서는 팬심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피지컬 앨범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스트리밍으로는 매번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정규 앨범 <도작盜作>이 나왔다. 나는 적잖게 실망했다.


새로운 작가를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내놓은 작품에 실망하기는 쉽다. 정교하게 칭찬하는 건 많은 지식을 요구하지만 무작정 싫어하는 것은 감정만 수반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비평이라고 함은 정교하게 비판해야 하고,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정당하게 작품의 결함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은 에세이다. 그리고 굳이 상세한 것에 트집을 잡아서 나쁜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한때 힘든 때를 함께 있어 주었던 밴드에 대한 예의기도 하다.



출처 : amazon.co.jp

요루시카의 세 번째 정규 앨범 <도작盜作>은 밴드가 데뷔한 이후 꾸준히 해왔던 '여름 음악'과는 확실히 다른 컨셉을 취하고 있는 앨범이다. 밴드의 리더이자 작곡을 맡은 나부나는 인터뷰에서 '요루시카 자체에 대한 인식'을 부수고 싶었다고 말했으며 실제 결과물도 그렇게 되었다.  <도작>은 요루시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반, 해오지 않았던 것들 반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그들은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요루시카라는 밴드 자체를 완전히 부수지는 못했지만, 다른 작품에서 빌려온 '도작'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어 한 가지 작품을 이루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선공개된 곡 '봄 팔이春ひさぎ'에서 몇몇 팬들이 반발하며 이탈한 것도 당연하다. 바뀐 앨범의 컨셉에 당황한 사람들이 꽤 있었고(적어도 내 주변은 그랬다), 곡의 소재를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여느 앨범이 나오는 과정이 그렇듯 추가적으로 트랙들이 공개되고, 앨범이 나왔다. 이변은 벌어지지 않았다. 요루시카의 <도작>은 이전 앨범들이 그랬던 것처럼 팬들을 충족시킨 것처럼 보였다.


컨셉은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고, 곡의 소재 역시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는 단순히 '봄 팔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미인계花人局'라는 곡에서도, '레플리칸트レプリカント'라는 곡에서도, 타이틀 트랙 '도작盜作'에서도 앨범은 옴니버스 드라마처럼 곡 하나당의 서사를 충실하게 전개한다. 그리고 그 트랙들은 '도작', 노래를 훔치는 남자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렇게 이야기에 충실하면서도, 음악적으로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존의 '요루시카 스타일'이라고 하면 피아노와 기타를 기반으로 한 J-ROCK 스타일이다. <도작>에서는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장르를 수용하여 곡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청아한 목소리를 지닌 보컬 suis는 때로는 저음을, 때로는 힘 있는 샤우팅을 사용하여 곡마다 어울리는 창법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는 '낮도둑昼鳶'에서 선보인 육중한 슬랩(slap), '봄 팔이'에서의 그루브한 터치, '도망逃亡'에서 들려오는 재즈적인 사운드로 설명할 수 있다. 인터루드 트랙에서는 '도둑'이라는 컨셉에 걸맞게 다른 장르의 음악을 과감하게 샘플링하여 유기성을 높였다.


다만 음악적으로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폭탄마-레플리칸트-사상범에서는 여전히 '요루시카식 제이록'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은, '요루시카 자체에 대한 분해'를 노렸다는 나부나의 발언과 비교해본다면 이질적이다. 도망까지 잘 이어오던 감정선을 야행-꽃에 망령으로 흩뜨려 놓은 후반부 구성 역시 아쉽다. 노래 도둑의 현재 이야기를 하다 갑작스레 과거로 회상하는 듯한 구성은,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미결(未結)된 작품이라는 감상을 준다. 그러나 이 역시 '옥에 티'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앨범이 어째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확히는 나에게 달갑지 않게 다가오는 것일까. 부정하는 감정은 육감과도 같은 것이라, '그냥 기분이 나쁘다'라고 해버리면 그것 자체로 개연성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요루시카에 대한 애정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고, 노래가 단순히 좋기 때문도 있으리라. 그래도 불편한 이유를 적어보겠다.


<도작> 앨범에는 냉소주의(cynicism)와 자기혐오, 질투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나부나 스스로도 '남들이 눈살 찌푸릴 만한 것을 만들자'라고 말한 것은 본인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앨범은 제법 불쾌하게 다가온다. 좋은 예술작품은 불쾌함마저 질문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도작>에는 그런 힘이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청자를 기만하려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퍼레이드' MV의 한 장면.

그동안 요루시카의 노래에서 회의적인 태도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령 첫 번째 정규 앨범 <그래서 나는 음악을 그만두었다>의 '8월, 누군가, 달빛八月、某、月明かり'의 트랙에서 보컬 suis는 '인생, 27살에 죽는다면 로큰롤은 나를 구원해 주었어 / 생각하는 것도 그만두겠어! 어차피 죽을 테니까'라고 노래하며 세상의 만물을 '모두 필요 없다'라고 울부짖는다. 그 대상은 그동안 나부나가 노래해온 것들 전부다. '그 여름도, 이 노래도', '너와 나' 역시 포함된다. 두 번째 미니 앨범 <패배자에게 앵콜은 필요 없어負け犬にアンコールはいらない>에 수록된 '히치콕ヒチコック'에서도 시니시즘은 발견된다. '괴로움 따위는 원할 리 없다'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채로 살고 싶다'라고 '선생님(先生)'에게 상담하는 화자는, '여름 내음에 눈을 감'고 '추억만을 보고 싶다는 것은 억지인가요'라고 물으며, '인생 상담을 해주는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나부나 노래의 핵심은 여름으로 대표되는 '환상적 시공간'과 '현실적 세계'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쓸쓸한 서정으로 꼽혀왔다. 그의 노랫말 속에서 주인공은 항상 현실에 있다. 아주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이 있고, 주인공은 어떠한 이유로든 그곳과 그때를 기억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가고 여름은 언제인 끝나버렸다. 살아가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잊지 않으려는 것처럼, 주인공은 항상 아름다운 것들을 노래한다. 그것들은 '네가 웃고 있어 / 여름의 한편에서'(배경, 여름에 빠지다背景、夏に溺れる)처럼 한 사람의 얼굴이기도 하고, '수면에 비치는 꽃과 달', '희미한 아침노을의 밤하늘'처럼 자연의 풍경이기도 하다. (새벽과 반딧불이夜明けと蛍) 작곡가 나부나를 넘어, 밴드 요루시카에 와서는 소중한 사람에게 '너만이 나만의 음악이야'(쪽빛 제곱藍二乗)라고 노래하기도 하며, 그런 존재가 떠나가자 '마음에 구멍이 뚫렸다'(心に穴が空いた)고 울부짖기도 한다.


청자는 그동안 이러한 그(혹은 그녀)의 심상 풍경에 기꺼이 뛰어들었다. 누구나 그렇게, 다정한 세상을 의심하고 우울에 틀어박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청춘이라는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단어 하나하나모여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들은 모두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고, 어쩌면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등롱이 피어나는 별의 바다'에서 '심장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네가 계속 멀리서 웃고 있는'데도, 결국 여전히 노래하는 자신은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메류メリュー) '나이가 먹어도 너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혼자 뿐인 퍼레이드'를 계속한다. (퍼레이드パレード) '잠에서 덜 깬 너의 얼굴을 몇 번이고 그리고 있'던 엘마의 노래가 애달픈 것 역시 이와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노틸러스ノーチラス)

 

또한 이 시절 나부나의 음악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슬픔'과 '남겨진 나'의 감정을 정교하게 담고 있었다. 더블 앨범 구성을 취하고 있는 '엘마 연작'의 주요 배경은 '에이미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엘마'다. 두 앨범에서 보이는 회의와 자기혐오, 실패에 대한 절망은 에이미가 사망했다는 사건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죽음을 경험한 인간은 무너질 정도의 슬픔을 겪는다. 실패를 겪은 청춘은 목을 매달고 전철에 기꺼이 뛰어든다. 방에 틀어박혀 음악만 듣다가 그렇게 시들어 간다. 한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기에, 요루시카의 음악은 효과적이었다.


이번 작품에는, 그런 예민한 감정의 틈새를 정확히 겨냥하는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재 때문이기도 하고 요루시카가 제시한 극 중 인물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도작>은 실망스러웠다.




'도작' MV의 한 장면.

<도작>에서, 요루시카는 여전히 비관적인 태도로 노래하지만, 이전 작품과는 다른 방법론을 사용한다. 그것은 메타포다. '봄팔이'에서는 상업 음악을 하는 행위가 매춘과 다를 바 없다는 태도로 음악인의 모순을 냉소하고, '사상범思想犯'에서는 모방-창작 행위를 '빼앗는' 범죄인 도둑에 비유하며 실존하는 하이쿠와(오자키 호사이尾崎 放哉의 생애와 하이쿠를 차용 - 인터뷰 발췌) 소설(조지 오웰의 1984)의 컨셉을 도용한다. '레플리칸트'에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가짜와 진짜', '허구와 진실'이라는 테마를 차용하여 '거짓 감정'으로 노래 부르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내보인다.


요루시카가 <도작>의 노래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던 상업 음악에 대한 풍자와 비판.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자신이 조소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음악으로 돈을 벌고 있는 화자 자신에 대한 경멸과 혐오. 자기혐오는 '엘마 연작'에서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요루시카의 세계관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죽지 못해 노래하는' 사람이고, 그 최후의 생존 도구로서 음악을 선택한 행위 자체를 그렇게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그다지 새롭지 않은 감정인, 전작들의 연장선인 것들이 계속된다는 감상을 받는다.


상업 음악에 대한 비판은 이번 앨범에서 새롭게 등장한 주제다. 가사가 있는 첫 번째 트랙인 '낮도둑'에서 앨범의 태도는 단적으로 결정된다. '기량, 재치, 가치관 / 뼛속까지 전부 샘이 나 / 마음을 전부 채워버리고 싶어 / 질투하는 뇌리는 혀를 찰뿐'이라고 말하며 '세상에 있는 죽어가는 음악뿐'을 '너의 모든 것이 질투 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앨범의 inst. 트랙들과 타이틀곡의 가사로 판명 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노래들을 '훔쳤'다.


음악 도둑의 진솔한 고백인 '도작'은 앨범의 핵(核)이 되는 트랙이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에도 핵심적이지만 감정 면에서 화룡점정을 찍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알고 싶었'고 '사랑을 알고 싶었'으며 '아름다운 것들을 알고' 싶었던 주인공은, 도둑으로 전락하여 '어느 날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내 곡이라는 걸 깨달았어 / 팔린다니 당연하지, 명작을 훔친 것이니까!'라는 냉소 담긴 독백을 뱉는다. 그리고 결국에는 '올려치는 녀석들은 모두 바보'라고 청자를 대상으로 손가락질까지 한다.


이런 이야기는 청자로 하여금 '이런 음악을 듣는 너희들도 결국 상업주의에 찌든 사람들이고, 나조차도 그렇다. 내 마음은 황폐하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할 뿐이다. '도작'에서 펼쳐진 음악 도둑의 이야기는 '시시한 것들은 모두 내버려 두고' '좀 더 도망쳐보자'라는 '도망'으로 일단락되며, 이후는 '유년기, 추억 속幼年期、思い出の中 (Inst.)'로 넘어가 '이대로 밤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절을, '땀을 닦고 여름다워지던' 시절을 추억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이후 음악 도둑의 행보는 앨범 내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그렇게 냉소하고, 고뇌하다가, 절규하다 추억으로 도피해버린 것 같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찝찝한 표정으로 앨범 감상을 마쳤다.


<도작>은 컨셉 앨범이고 가상의 인물이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앨범의 특전에서는 소설이 실려 있어 그와 음악 앨범을 동시에 감상하는 형태로 발매되었다. 여기서는 앨범만을 평가하기로 한다.) <도작>의 이야기가 요루시카의 이야기로 일대일 대응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예술 속의 이야기'라며, 작품 속의 가상의 자신에게 투영하며 기만해왔는가. 이 앨범의 노래들은, 요루시카의 노래로 인기를 얻은 나부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자신보다 '더 팔리는', '더 좋은 음악'을 하는 불특정의 누군가에 대한 질투를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회의주의가, 나쁘지만은 않다. 특히 요루시카가 노래를 하는 그룹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르게, 노래는 그 순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그 매체의 기능을 충실히 행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지금 나 자신에 집중하고, 세상을 한탄하고, 남들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어도 좋다며, 그들은 울부짖어왔다. 누군가는 그것에 위로받을 것이니까.


그러나 <도작>의 회의주의는 구멍이 뚫린 마음에 물을 붓는 것처럼 허무하고 공허하다. 이 감정은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다. 정말로,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많은 감정들 중에서 공허함을 노린 것처럼 보인다. 연소하고 연소하여 이윽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하늘로 날아간 쏙독새의 뒷모습이다. 재로 뒤덮여 있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의 초상과도 같다. 그것에 연민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 그렇지만 남의 창작물에 멋대로 질투를 느끼다가 자신의 작품-자기 자신이기도 한-에 회의감을 느끼고 혼자서 자멸하는 감성은 조금 낡게 느껴진다.


거기에, '봄팔이'라는 소재를 부주의하게 사용하였음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신선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음악도 떳떳하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지만, '사랑해주길 바라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요루시카의 J-락에서 벗어난 트랙이 이런 감성을 지닌 가사 아래에 쓰였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울 뿐이다. '미인계花人局'도 마찬가지다.는 떠나간 사람과 남은 사람이라는, 지극히 요루시카적인 구도를 사용하면서도 소재의 활용은 오히려 퇴보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원나잇 상대에게 그리움을 느끼고 기다리는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는 모습은, 현재로서는 그렇게까지 '감성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노래를 훔치고 유명해진 음악도둑은 뮤직비디오에서 악기들을 내리치며 '아직 부족해, 아직 부족해, 나는 부족해, 지금까지 부족했던 것이 뭔지 모르겠어'라며 절규한다. 부서진 악기들의 파편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요루시카는 이번 앨범에서 해답을 던지지 않고 질문을 한다. 다소 불편한 형태로, 오래된 방법론으로 전달하였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은 것이다.





'야행' MV의 한 장면.

다행스럽게도 이 글을 쓰기 위해, 앨범을 다시 돌려 들으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면을 엿보았다. 유년기로 눈을 돌린 음악 도둑은 자신이 '여름이 끝나가는 거네'라며 야행을 계속했고, 눈에 비친 '여름의 망령'을 직시한 것처럼 보인다. 일차례의 방황을 끝내고 그 계절로 다시금 향하는 것은, 꿈으로의 도피일지 소중한 추억을 마음에 담고 '어른이 되는 것'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비극을 초래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잊지 않도록, 색이 바래지 않도록, 마음에 울려퍼지는 게 전부는 아닌' 것을 깨달은 어른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재감상 때에) '꽃에 망령花に亡霊'을 듣고서는 제법 괜찮은 구성을 취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자면, <도작>은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여러 메타포를 사용하여 인간의 황폐함을 그려내고 있는 앨범이다. 그렇지만 표현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몰입하기가 힘들다. 누군가에게는 이 독특하고 '못된' 앨범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빛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멜로디도 괜찮고 음악적으로는 진보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감성이 잘 맞지 않는다.


언젠가 여름은 끝날 것이고, 한 밴드에게서 하나만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향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 황폐한 내면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다음 단계를 그릴 차례다. 조금 새로운 감성으로 우리를 위로해주기를, 혹은 날카롭게 다듬은 시선으로 세상을 통찰해주기를. 마음 속으로는 제법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자료


시바타 토모노리, 『요루시카 '도작' 오피셜 인터뷰』, GALEN 번역, https://blog.naver.com/cristalgard/222045829620 (1) https://blog.naver.com/cristalgard/222055009456 (2)



매거진의 이전글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이토록 기묘한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