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가 슬슬 지겨워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다비드의 그림도 고리타분해지고 있었죠. 물론 유럽인들은 이성이란 도구와 계몽주의를 쉽게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성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제대로 경험했거든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똑바로 살아라, 공부해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미술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고요. 그때부터 내면의 감정으로 관심을 돌리는 예술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 그 감정은 어둡고 불쾌하기도 했죠. 영국에선 윌리엄 블레이크, 스페인에선 프란체스코 고야가 그리고 프랑스엔 테오도르 제리코가 있었죠.
프랑스 대표 테오도르 제리코
이들이 원한 건 이성적 교훈이 아닌 감정의 폭발이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역사 이야기보단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궁금해했고요. 때문에 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는 문명 이전 시대의 야만을, 인간이 통제하는 조화로운 자연보다는 난폭하고 혼란스러운 자연을 원했죠. 신고전주의자들에게 대항한 낭만주의자들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제리코에서 시작된 프랑스 낭만주의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가 외젠 들라크루아입니다. 사실 우리에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낭만주의 예술가적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입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문학계의 낭만주의 거장 시인 바이런이 쓴 작품을 토대로 한 그림인데요. 사르다나팔루스는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왕국의 전설적인 폭군입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사치를 일삼다, 결국 봉기를 맞닥트리게 되죠. 국가의 위기 앞에서도 왕은 결국 봉기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반란군은 그의 궁 앞에까지 쳐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사르다나팔루스 왕은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도망이나 항복이 아닌, 자기 자신을 파괴한 거죠. 자신이 소유한 노예와 후궁, 그리고 말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 뒤, 그는 침대에서 이 파괴의 순간을 감상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왕의 수호 부대가 후궁과 말을 살해하던, 사건의 클라이맥스를 그린 거죠.
살롱전에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 처음 전시됐을 때, 평론가들은 격분했습니다. 일단 구성이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라파엘로나 다비드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작품의 구도가 어수선해, 어디서부터 그림을 봐야 할지, 나아가 그림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감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침대 주변의 소품은 무질서한 구도를 더 어지럽게 만듭니다. 배경은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으며, 일부 인물들의 동작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한 비평가는 ‘살롱전에 낭만주의가 침략했다’라고 기록하며, 낭만주의를 적대시했죠.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평론가들의 반응을 보며 아마도 흡족했을지 모릅니다. 왜냐면 그들이 지적한 그림 속 혼돈이야말로 들라크루아가 묘사하고 싶던, 또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핵심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작품을 그리기 전 구도를 잡기 위해 여러 번 습작을 그렸는데요. 들라크루아는 안정적인 구도가 아닌, 그림 속 혼란을 강조하기 위한 동적인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겁니다.
그림의 묘사는 당시로 치면 ‘19금’이었습니다. 폭력적이면서 에로틱했죠. 무엇보다 이 혼돈을 응시하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차분한 태도가 관객들의 마음을 더욱 요동치게 했죠.
19세기 파리에서는 신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에 선과 색의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류는 선이었습니다. 선 그룹의 대장은 에로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거장, 앵그르였죠. 당시 앵그르는 프랑스 미술 권력의 정점에 있었는데요. 그런 앵그르가 라이벌 의식을 느낀 화가가 색 그룹의 대표 들라크루아였습니다.
앵그르
한 번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요. 평소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앵그르였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라크루아가 다녀갔단 얘길 들으면 일부로 창문을 열고 ‘유황 냄새를 환기하자’라며, 색을 과도하게 쓰는 낭만주의자들을 비꼬았죠. 그날도 결국 앵그르는 자제력을 잃고 그 젊은 화가에게 소리쳤습니다. ‘드로잉은 정직을 의미해요. 동시에 드로잉은 명예를 의미하기도 하죠!’ 물론 이 이야기를 들은 젊은 화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더 화가 난 앵그르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고 하는데요. 어느 순간 들라크루아는 이성 중심의 주류 질서에 저항하는 낭만적 자유주의자의 상징이 되어 있었던 거죠.
들라크루아 자화상
하지만 들라크루아의 성격은 전혀 낭만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들라크루아는 꾸준히 일기를 썼는데요. 일기를 보면 자신을 ‘고전주의 화가’라고 믿었고, ‘색을 과도하게 쓰는 것에 대한 비판’을 크게 신경 썼으며, 늘 가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달고 다니던 엘리트주의자였습니다. 한 번은 시인 보를레르가 들라크루아에게 편지를 보내 ‘모두가 당신을 반항아로 보고 싶어 하는데’ 왜 그렇게 체제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집요한 노력’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었죠.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그린 작품으로 살롱전에 화려하게 데뷔했고요. 고전주의 화가 장 그로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라티오
하지만 동시에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린 제리코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제리코 화실에 방문해 시체 모델 역할을 해줬을 정도였죠) 낭만주의 영웅, 시인 바이런을 존경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 왕 이야기도 바이런의 스토리에서 따왔고요) 그는 혁명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취향이 낭만주의적이었던 거죠.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옆에 전시 중인 <키오스섬의 학살>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 공개되기 4년 전인 1824년, 들라크루아는 살롱전에 <키오스섬의 학살>을 출품했는데, 이땐 비판이 4년 후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심지어 같은 전시실에 앵그르의 그림이 걸려있었죠. <키오스섬의 학살>은 1822년, 오스만 튀르크가 그리스의 키오스섬 20,000명 이상을 학살한 사건을 그린 건데, 제리코가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렸을 때와 비슷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건 예술이 아닌, 시사 이슈를 다룬 저널리즘이라는 지적이었죠.
하지만 오스만 튀르크에 저항하던 그리스 독립 전쟁은 낭만주의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시인 바이런 역시 여러 여성과 연애하며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다,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했죠. (열병에 걸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었지만요) 왜냐면 당시 낭만주의자들은 ‘오리엔트’가 인간의 내면을 움직이는 좋은 예술 테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들라크루아도 마찬가지였죠. 특히 그는 실제 모로코, 알제리 여행을 다녀오고, 그곳에서 보고 경험한 내용을 다양한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
오달리스크
오리엔트와 바이런에 빠져있던 들라크루아가 바이런의 비극 ‘사르다나팔루스’를 읽고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물론 기원전 7세기의 이야기니 사르다나팔루스에 대한 기록도 없거니와, 바이런의 상상력이 듬뿍 담긴 작품에 들라크루아의 스토리-자신의 후궁을 살해하고 이를 응시하는 왕-까지 담겼으니, 이 그림은 픽션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는 단순히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소재 선택에 지루함을 느낀 것만은 아녔습니다. 그는 정확하고 섬세한 드로잉도 진부하다고 느꼈습니다. 루벤스를 좋아했던 들라크루아는 훗날 렘브란트가 라파엘로보다 훌륭하다는, 당시로선 신성 모독에 가까운 기록을 남기기도 하는데요. 그러니 들라크루아는 애초부터 다비드나 앵그르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그는 색 파의 거장답게 사냥하는 사자의 모습, 달리는 말, 그리고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거친 붓 터치로 표현하는데요. 나아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쇼팽을 애정하며, 그의 초상화를 들라크루아 스타일로 그려내기도 했고요
긴 소파에 누운 나부의 습작모
토까룰 잡아 먹는 사자
프레데릭 쇼팽
윤곽선이 보이지 않으니, 형태는 뭉개졌지만, 색채의 사용은 더욱 대담해져서, 그림 속 격앙된 감정과 에너지가 더 잘 느껴지게 만든 거죠. 살롱전에서 색을 강조한 낭만주의는 그 이후에도 주류 화풍이 되지 못했지만, 들라크루아는 달랐습니다.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고, 결국 그가 원하던 프랑스 왕립 학술원 회원이 되며,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얻게 되거든요.
삶의 태도는 보수적이고 고전주의적이었지만,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독특한 미적 취향 덕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현대 미술의 문을 연 선구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미술의 족쇄를 풀어버린 건데요. 형태의 단순화를 지나 추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현대 미술의 실마리를 제공한 셈입니다.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도 들라크루아가 남긴 유산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를 인상주의 운동의 원류로 생각했습니다. 팡탱 라투르가 그린 <들라크루아에게 바치는 경배>를 보면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 들라크루아의 위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에게 바치는 경배, 액자 오른쪽 옆의 수염난 백인이 마네.
그런 면에서 들라크루아는 미술계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 인물입니다. 주류 질서에 저항했고, 새로운 사조를 주도했으며, 결국 인상주의 운동의 출발이 됐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라이벌 앵그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미술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됐으니까요. 실제 들라크루아는 반항아의 아이콘이 아닌, 순응자의 태도를 보이냐는 보들레르의 항의성 편지에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보들레르 씨. 만일 내 오른팔이 마비되더라도, 학술원 회원이기 때문에 학교 선생이라도 할 수 있을 거고, 설령 내가 건강하다 해도, 학술원은 내 커피와 담뱃값을 내줄 것입니다.’
오르세미술관
그는 혁명가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받은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한시도 풀지 않던 보수주의적 혁명가였던 거죠. 하지만 들라크루아의 현실적인 태도 덕분에 프랑스 미술계에서 낭만주의의 영향력은 기대 이상으로 커질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 매년 엄청난 수의 관람객을 끌어모으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