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곧 법칙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자신의 권력으로 다비드의 권위를 지지해 줬죠. 여전히 이성이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혁명의 결말이 황제의 탄생으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성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성에 대한 확신은 미술에 있어 선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났고, 인간의 비이성적 광기를 탐구했던 낭만주의자 제리코 같은 화가조차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다비드가 제시한 선 중심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그 시절의 미술 영재들은 모두 다비드의 방식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그중에서도 최고 우등생이었습니다.
<레카미에 부인>
앵그르는 다비드 밑에서 그림을 배운 뒤, 다비드가 그랬던 것처럼, 국가에서 보내주는 로마 미술 유학생 선발에 뽑혔죠. 유학에서 돌아와서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 작업을 돕고, 왕실 주문을 받는 등, 엘리트 출셋길을 밟게 됩니다. (<레카미에 부인>의 포즈는 이후 앵그르의 대표작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죠) 그 뒤엔 미술 아카데미를 세워, 다비드의 화풍을 미술의 정석으로 만들고자 애쓰기도 했습니다. 앵그르는 프랑스 미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그림은 신고전주의 신봉자,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입니다. 딱 봐도 다비드가 크게 칭찬했을 만한, 윤곽선이 강조된, 선명하고 분명한 그림입니다. 오달리스크는 오스만튀르크 황제의 시중을 들던 궁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황제는 자신들의 궁녀를 하렘이란 공간에 모아놓았죠.
딱 봐도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이나 들고 있는 부채 등이 유럽 왕실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마치 다비드가 <황제의 대관식>에서 황후 조세핀의 망토 재질을 정확히 표현했던 것처럼, 앵그르 역시 오달리스크가 들고 있는 부채나 이불의 재질, 이국적인 장식품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만지면 촉감이 느껴질 것처럼, 피부 묘사도 완벽하죠. 욕정이 제멋대로 움직이던 학창 시절, 학교 도서관의 명작 고전 시리즈에 삽화로 들어간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처음 보고, 갑작스러운 생리적 반응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서양 고전 소설을 보며 음란한 생각이라니요. 하지만 피 끓는 청춘의 욕구를 탓하기엔, 앵그르의 그림 자체가 지나치게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에로틱했습니다.
지금이야 서양 고전 미술을 보고 야하다고 생각하는 건 17, 18세 건강한 청소년 정도를 빼면 없을 텐데요.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성적 욕망을 대리 충족할 매체가 별로 없던 시절, 박물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프랑스 신사들이 부끄러움 없이 여성의 육체를 훑어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사회가 제시한 높은 수준의 도덕적 규율이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판타지 요소가 필요했죠. 너무 사실적인 그림은, 도덕적 위선을 떨어야 하는 귀족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등장한 게 바로 ‘오리엔트’입니다.(그전엔 '신화'였고요)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나면서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를 동행시켰는데요. 훔쳐 올 만한 보물을 판별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그렇게 나폴레옹 원정에 동행했던 사람들이 귀국해서, 상상력을 보태, 자신의 여행기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리엔트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서양 남자들을 사로잡은 대상이 하렘입니다. 유럽인들에게 하렘은 성적으로 야만적인 이국의 술탄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풀 수 있는 포르노적 공간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아래와 같은 '오리엔탈리즘'적 왜곡을 지닌 야한 그림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쏟아지게 됐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테오도르 샤세리오 <화장실에 있는 에스더>
남자들은 하렘과 오달리스크를 떠올리며 자신들의 성적 판타지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마음껏 투사할 수 있었죠. 앵그르 역시 자신이 그린 에로틱한 누드에 오리엔트적 판타지 요소를 첨가해, 귀족 남성들이 여성 누드를 마음껏 뚫어지게 보도록 해준 것이고요.
앵그르는 지금으로 치면 실력 좋은 에로 영화감독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일반적인 춘화 작가와 달리 에로 영화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점이 특별했던 거죠. 다비드 선생님이 혁명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황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고대 로마인이 지닌 미덕을 교육하기 위해 사용하던 명료한 선을, 앵그르는 좀 더 사적으로, 그러니까 귀족 남성의 성적 판타지 충족에 사용했습니다. 앵그르가 만든 에로 영화의 끝판왕은 <터키탕>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한 귀족 부인이 터키에서 목욕탕 간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보고 80세가 넘은 거장 앵그르가 에로틱 정점을 완성해 냈습니다. 오리엔트의 여성 한두 명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스루 의상을 입고만 있어도 자극적인데, 여성 여러 명이 나체로 모여있는 공간을 그렸으니, 당시로서는 얼마나 야했겠습니까.
앵그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림의 형태를 둥글게 만듭니다. 마치 열쇠 구멍 같은 작은 구멍으로 여성 목욕탕을 훔쳐보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죠. 여기에 탁월하고 사실적인 인체 묘사가 더해졌으니, 앵그르는 정말 탁월한 에로 영화 거장이었던 겁니다. (그림을 의뢰했던 귀족도 너무 야해서 인수를 거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누드화를 모으던 남성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앵그르를 대중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던 예술가 정도로 깎아내려선 절대 안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앵그르를 다비드의 충실한 제자이자, 그의 말씀을 널리 전파한 보수적 고전주의자로 분류하지만, 실제 그의 본성을 따라가 보면 자유분방한 탐미주의자적 속성도 엿보이거든요. 그가 로마 유학 시절부터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림, <목욕하는 여성>입니다. (일본 걸 그대로 번역한 오래된 책엔 <발팽송의 욕녀>라고도 나와 있는데요. 그림 소장자였던 발팽송이 갖고 있던 욕녀, 즉 목욕하는 여성이란 뜻인데, 아마 이 제목을 번역한 일본인 역시도 앵그르의 에로틱함을 좀 더 증폭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또 다른 의미의 욕녀를 떠올리도록 유도하는)
앵그르가 여러 번 수정하며 애착을 보인 그림인데, 그가 처음 이 그림을 프랑스 선생님들에게 보여줬을 때 혹독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인체 비례가 엉망이란 이유에서였죠. 여성의 하체가 너무 부실해 저 여성이 실제 일어난다면, 자기 상체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림을 잘 보면 이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앵그르는 이 비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앵그르의 눈엔 자신이 왜곡한 여성의 몸 뒷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절대적인 인체 비례를 허문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입니다. 앵그르는 어떻게 이런 파격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앵그르는 오직 여성 육체의 아름다움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앵그르는 다비드만큼이나 라파엘로를 존경했는데요. 앵그르야말로 라파엘로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신의 방식대로 구현했던 겁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 왜곡은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소한 일이었죠.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이야기할 때도 빠지지 않는 게 터무니없이 긴 허리입니다. 실제 저 여성이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보면, 아주 괴기스러운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앵그르는 그 누구보다 인체를 정확히 그릴 줄 알던 화가였는데, 그런 그가 인체 비례 파괴란 초보적 실수를 범할 리 없죠. 오히려 그는 여성의 몸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선 곡선이 필요하단 걸 알았던 겁니다. <목욕하는 여인들>의 하체가 부실하게 나온 것도 실은 등에서 허리를 거쳐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죠.
이번에도 앵그르는 무심하게 뒤돌아보는 에로틱한 여성의 자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허리를 늘렸습니다. 오른팔의 길이도 마찬가집니다. 최대한 길게 왜곡하여, 곡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거죠. (가슴이나 다리의 위치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집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아름다움을 위해 작정하고 신체를 재조합한 셈입니다.
앵그르가 대단한 이유는, 누군가가 그림 속 여성들의 왜곡된 신체 비례를 알려주기 전까진,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앵그르는 신체의 왜곡을 통해 오히려 더 완벽한, 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도달했기 때문이죠. 결국 앵그르는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귀족 남성들과 출발점이 달랐던 겁니다. 앵그르는 라파엘로가 도달하고자 했던 절대적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여성의 신체에서 그 답을 찾으려 했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82세에 그린 <터키탕>이 좀 더 이해가 갑니다. 그림 속 여성들의 자세는 부자연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다 제각각 다양한 포즈를 하고 있죠.
아마도 그 이유는 앵그르가 평생 추구해 온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를 하나의 그림 속에 모아놓는 게 <터키탕>의 기획 의도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제로 그의 다른 작품 속 포즈를 <터키탕>에서도 찾을 수 있고요.(<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성>도 보입니다) 그가 자신의 말년을 <터키탕>에 바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겠죠. 여성의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곡선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가 형태를 왜곡하면서도 이토록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육체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선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일 겁니다. 무엇이든 선으로 완벽한 윤곽을 그리고, 그 선들로 극사실주의 수준의 사실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그의 다음 과제는 묘사가 아닌 형태 그 자체였을 때니까요.
인기 초상화가였던 앵그르.
물론 앵그르도 18세기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오리엔트를 그렸다지만, 그림 속 여성들은 전부 백인입니다. 프랑스 남성 귀족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번 사실의 왜곡을 가한 겁니다. (앵그르는 자신이 생각한 오리엔트 근처도 가본 적도 없고요) 게다가 그는 신고전주의 근본주의자였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화가는 누구나 무시했으며, 제자들의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력을 허락하지 않았죠. '드로잉이야 말로 모든 예술의 증거다' 라는 그의 말에 완고함이 묻어납니다. 자신의 방식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에,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지나치게 억눌렀던 건데요. 물론 이런 억압의 결과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서, 앵그르의 선에 대한 집착이 결국 주류에 저항한 후대 인상주의파를 탄생시키게 되죠. 하지만 그에게 반감을 지녔던 후대 화가조차도 그의 인체 묘사 능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 가장 인체 묘사가 탁월했던 에드가 드가는 앵그르의 그림을 통해 인체 표현을 공부하기도 했고요. 게다가 그는 고집불통에 완고한 보수주의자였지만, 동시에 근대 미술이 절대 법칙이라고 믿던 사실성의 파괴를 통해 현대 미술의 길로 가는 문을 열어준 자유주의자이기도 했던 거죠. 단순히 남성 욕망의 봉사자라고 보기엔 여성의 육체를 이리저리 탐구하여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했던 탐미주의자였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앵그르방
사실 그림 좀 아는 체하려면 신고전주의 그림은 좀 별로라고 이야기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마티스나 칸딘스키의 그림을 좋아해야 좀 더 있어 보이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앵그르가 왜곡을 통해 구현한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됐었기 때문이죠.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도 <그랑드 오달리스크> 앞에 오래 서 있게 됩니다. 마음속 특별한 그림이랄까요.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앵그르의 묘사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더라고요. 사진기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앵그르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대접을 받으며 후대에 기려졌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