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을 보다 보면, 금방 질리거나 지루해지기도 합니다. 그림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많은 그림 대부분이 대동소이한 게 원인이죠. 사실 ‘화가의 자유로운 예술혼이 독창적 작품을 만든다’ 같은 생각은 그리 오래된 관념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 그림은 전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이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화가의 자유로운 영혼이 활동할 공간이 없었죠.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를 지나는 동안에도, 그림이 선택해야 할 소재는 대부분 신화-종교-역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화가들이 따라야 할 소위, ‘양식’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그 결과 루브르 박물관을 채운 많은 그림이, 얼핏 보면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죠.
하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절대적 권위의 힘이 약해졌고, 양식의 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 화가들은 그려야 할 소재가 무엇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면, 이제 화가들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앞서 무엇을 그릴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거죠. 오늘 소개할 그림은, 바로 이러한 고민의 흐름 속에서 등장한, 당시 미술계에선 파격 그 자체였던 독특한 소재의 작품입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입니다.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별로 특별한 것 없는 소재죠. 하지만 <메두사호의 뗏목>이 파격적이었던 건 당대의 정치적 스캔들, 즉 현재에 벌어지는 사건을 웅장한 규모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비드의 대작과 비슷한 크기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난파된 뗏목 위 사람들이 배를 발견하고 구조를 격렬하게 요청하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총 2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윗부분 6명은 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배가 우릴 볼 거란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맨 아래 6명은 절망 그 자체죠.
5명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림 정면을 바라보는 노인은 어떠한 삶의 의욕도 내비치지 않습니다. 삶의 의욕이 없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겠죠. 아마도 그가 안고 있는 건 자신의 아들일지 모릅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 있는 가운데 8명은 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좀 더 평범한 인물들입니다. 그림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있는 인물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요. 가운데는 살고 싶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기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처럼, 프랑스에서도 배가 난파하는 재난이 발생했습니다. 때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복고가 막 이뤄졌던 시기. 혁명 정부의 권력 다툼과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전쟁도 지겨웠지만, 돌아온 귀족들의 무능은 훨씬 더 한심하고 심각했습니다. 능력 없는 귀족들은 마치 지난 시기 숨어있던 한을 풀려는 듯, 고위직을 서로 나눠 가졌고, 4척의 배로 구성된 세네갈 탐험대 365명을 지휘할 선장 역시 경험 없는 사람이 임명됐습니다. 출발 후, 폭풍우를 만난 배 4척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는데요. 특히 항로에서 벗어난 프리깃함, 메두사호는 좌초되고 맙니다. 이에 사람들은 150명을 태울 수 있는 초대형 뗏목을 만듭니다. 그리고 배에 있던 구명정 5척이 뗏목을 밧줄로 연결해 끌기로 계획을 세운 거죠.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뗏목과 연결된 밧줄이 풀립니다. 순간 뗏목만이 망망대해 위에 남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메두사호의 지옥이 시작됩니다. 첫날 폭풍우로 절반 정도가 사망했으며, 며칠 뒤 얼마 안 남은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뗏목 위의 폭동이 무려 세 번이나 벌어집니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거죠. 배 위의 칼을 다 버리고서야 겨우 폭동이 멈췄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원은 27명. 인육을 먹으며 겨우 버티던 사람들은 결국 상처 입은 12명을 바다로 빠트리기로 하며, 며칠을 더 버팁니다. 참혹 그 자체였던 거죠.
좌초 13일째, 15명은 기적적으로 구조됩니다. 구조 16개월 후, 생존자 2명이 메두사호에서 벌어진 일을 책으로 출판, 세상에 사건을 폭로했죠. 혁명 이후 등장한, 권력의 토대가 취약했던 당시 왕실은 두려워졌습니다. 구명정에 탔던 귀족들이 자신만 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뗏목을 버렸다는 사실이 퍼져나가면, 또 다른 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선장이 줄을 풀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집니다) 권력은 내부 고발을 덮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합니다. 바로 책을 쓴 2명을 허위 사실 유포로 고발하여, 폭로자의 신뢰를 떨어트리려 한 것이었죠. 권력이 초대형 정치적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애쓰던 때, 혈기 왕성한 화가 제리코가 이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제리코는 곧 이 정치적 스캔들을 살롱전에 출품할 작품 소재로 결정합니다. 그는 생존자의 책이 발간된 지 3개월 뒤에, 초대형 캔버스를 삽니다. 그리고 머리를 깎았죠. 스튜디오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약 17개월간 엄청난 스케치와 습작을 그려가며 대작을 완성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제리코는 권력이 은폐하고자 했던 범죄를 폭로한 시사 고발 다큐멘터리를 만든 셈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재난이 점차 희미해져 갈 무렵, 제리코는 <메두사호의 뗏목>을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귀족들이 저지른 범죄를 다시 사회에 환기한 것이죠. 당연히 살롱전 심사위원의 평가는 냉혹했고, 왕 루이 18세도 제리코에게 공개적으로 냉소적 의견을 남깁니다.
당시 논란의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발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재난을, 마치 역사적 제단화에 어울릴 만한 크기로 그린 이유가 무엇인가. 즉, 왜 재난을 소재로 선택했는가의 문제였죠. 제리코는 왜 그랬을까요? 사실 제리코가 그렸던 예전 그림을 보면 제리코는 원래 좀 삐딱한 기질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술계의 왕, 다비드가 제시한, 좋은 그림의 기준 따윈 제리코의 관심사가 아니었죠. 당시는 화가라면 국가에서 선발하는 로마 장학생에 모두 도전하던 시절이었는데, 제리코는 그냥 자기 돈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옵니다. 유학 이후, 그는 말 그림에 빠지게 됩니다.
집착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는 말이라는 생명체가 주는 경이로움과 강렬함에 끌렸던 거죠. 그가 그린 <앱솜의 경마>는 지금까지 인식의 오류의 대표 사례(실제 사진을 찍으면 저런 말의 다리 모양이 나올 수 없다는 거죠.)로 소개되는 불명예를 얻었지만, 사실 말의 에너지와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훌륭한 그림입니다. 눈이 충혈된 채 침을 흘리는 말의 격렬함을 생생하게 묘사했죠.
그가 천착한 또 다른 소재는 광인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을 찾아, 그곳의 환자들을 시리즈로 그렸는데요. 정신 질환이 의학의 대상으로 막 다뤄지던 시기, 제리코는 <도박에 중독된 여인> <질투에 미친 여자> <절도광의 초상> 같은 연작을 완성합니다.
인간의 감정을 흔드는, 말이 지닌 에너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미친 사람의 눈빛 사이로 흘러나오는 광기의 원천은 무엇인가. 제리코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런 보이지 않는 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제리코는 다비드가 이야기하던 엄격하고 절제된 그림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만한 소재를 원했습니다.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려던 카라바조의 시도를 되살리려 했던 거죠. 제리코는 메두사호의 생존자 사비니와 코레아르가 출간한 책을 읽었을 때, 감정의 격렬한 요동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돌아온 왕정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혁명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감정이 우선이었을 겁니다. 정치적인 폭로의 목적이 강렬했으니, 3개월 만에 캔버스를 구매해 삭발한 뒤, 칩거에 들어간 거겠죠. 이게 전부가 아녔습니다. 일단 메두사호의 재난엔 제리코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죠. 메두사호가 좌초된 순간부터, 구명정이 의도적으로 줄을 푸는 장면,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뗏목 위 폭동이 발생하고,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모습까지. 이 모든 사건이 말에 매료되고, 광인 연작에 집착했던 제리코의 예술적 취향을 자극했습니다. 메두사호 뗏목 위에서 사람들이 보인 행동은 이성의 시선으로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힘이 미친 사람들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난파라는 특수한 상황이 우리 안에 내재한 광기를 봉인 해제했고, 제리코는 바로 여기에 자신의 낭만주의적 관심을 보였던 거죠.
제리코는 극적인 여러 사건 중 무엇을 그려야 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실제 루브르 박물관엔 제리코가 남긴 습작이 있는데요. 인육을 먹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처음엔 인간 존엄성이 가장 떨어진 야만의 순간을 포착하려 했던 거죠. (그랬다면 고야의 어두운 그림들을 능가하는 걸작이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메두사호의 뗏목>의 살롱전 출품 제목이 <난파 장면>입니다. 어쩌면 좌초됐던 순간, 혹은 폭동이 일어나는 장면을 그리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리코가 택한 것은 구조되기 직전, 혹은 사라지는 배를 발견하고 낙담하던 순간입니다. 가장 극한의 고통에 내몰려 있던 순간,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상황을 낙관적 인물 6명, 비관적 인물 6명, 낙관과 비관 사이의 인물 8명을 균형적으로 배치해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 관객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순간을 완성해 낸 것이죠. 제리코는 이 작품이 자신의 걸작이 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실제 그는 뗏목 세트를 설치하고, 인물들을 배치해 그림을 그렸을 정도였죠.
그때 제리코의 스튜디오에 찾아왔던 후배 들라크루아를 모델로 세워 엎드려 있는 시체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실제 르네상스의 화가들처럼 시체 안치소와 묘지를 찾아다니며 시체를 잘 그리는 데 집중했고요. 남겨진 스케치 습작만 약 100장, 채색한 초안만 10편이 넘을 정도로 제리코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메두사호의 뗏목>에 쏟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시대의 재난사건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죠.
이때 과로의 영향이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제리코는 그림을 완성하고 5년 뒤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제리코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 후대 화가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몰랐습니다. 이후 엄격한 다비드식 그림에 반발한 화가들은 제리코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고, 억제된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려 노력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신고전주의’에 대항한 ‘낭만주의’ 화가입니다. 즉,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파리 미술의 권력을 둘러싼, 선과 색의 전쟁이 시작된 거죠.
그는 고전주의 화가들처럼 권력의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홍보기획관이 되는 걸 거부했습니다. 양식의 힘이 사라지고, 화가에게 주어진 소재 선택의 자유를 제리코는 시대의 진실을 전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자신의 글쓰기 사명을 두고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제리코야말로, <메두사호의 뗏목>을 통해 조지 오웰이 이야기했던 글쓰기 사명을 완벽하게 달성한 셈입니다. 정치적으로 시작한 작품을 낭만주의의 출발점을 알리는 걸작으로 완성해 냈으니까요. 동시에 루브르 드농관의 낭만주의 방을 볼 때마다 제리코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이 방에 더 많은 그의 걸작이 있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