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프로파간다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by 알스카토

화가는 역사의 조연입니다. 역사를 기록하거나 증언하지만, 역사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간 화가는 루벤스 정도를 빼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루벤스 역시 왕실의 친분을 이용한 외교 사절이었을 뿐, 권력의 주체는 아니었고요. 그런데 오늘 소개할 화가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화가였지만 동시에 정치인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권력 의지가 강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타고난 그림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죠. 심지어 그는 자신의 두 가지 능력, 권력 의지와 그림 재능을 잘 결합해, 인생 대부분을 권력 주변에 머물렀는데요. 바로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사람 1명을 선발, 이탈리아 유학을 보내줬는데요. 이탈리아 국비 유학생에 선발되면, 왕실의 그림 주문을 받게 되니, 선발되는 순간 성공이 보장됐던 건데, 다비드가 바로 국비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림 하나는 타고나게 잘 그렸던 친구였던 거죠. 실제로 유학 후 루브르 성에 거주하며 루이 16세의 주문을 소화했고요.


오늘 소개할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두 번째로 큰 작품,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일명 <나폴레옹의 대관식>입니다. (가장 큰 작품은? <모나리자> 맞은편에 있는 <카나의 결혼식>입니다. 물론 모나리자에 정신 팔린 관람객에게 철저히 외면받는 비운의 작품이지만) 황제 나폴레옹이 아내인 조세핀에게 황후의 왕관을 씌워주는 순간입니다.

이 광경을 교황 비오 7세가 지켜보고 있고요. 조세핀 뒤로는 나폴레옹의 형제, 자매, 매제 그리고 어린 조카가 서 있습니다.

황제와 교황 주변으로는 당시 프랑스의 최고 고위직들, 군 통수권자와 대법관 등이 있고요. 황제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중동 아프리카의 왕들도 대관식에 초대받았습니다.

이 광경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노부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고요. 다비드 또한 역사적인 순간에 자기 모습을 2층 관람석에 슬쩍 넣어놨습니다.

다비드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대형 세트를 세우고, 거기에 모델들을 집어넣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품, 혹은 의상의 재질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직접 찾아다니며 손으로 실제 옷과 소품을 다 만져봤을 정도였고요. 덕분에 조세핀이 걸친 두꺼운 망토의 재질은 사진을 찍은 것처럼 완벽해 보입니다.

이렇다 보니 그림은 마감일보다 1년이나 늦게 완성됐지만 말이죠.


그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살짝 필요합니다. 나폴레옹 황제 즉위식은 이례적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뤄졌습니다. 보통 프랑스 왕의 즉위식은 랭스 대성당에서 진행되는데, 자신을 기존의 평범한 프랑스 왕과 다르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랭스가 아닌 파리를 즉위식 장소로 선택한 거죠. 자신은 왕이 아닌, 황제라는 의미였겠죠. 그렇다 해도, 여전히 파리 즉위식은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마뉴 대제의 즉위식을 떠올려 보면 되는데요. 샤를마뉴 대제의 즉위식 장소는 로마였습니다. 신의 대리인만이 인간의 최고 권위자를 임명할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나폴레옹은 자신이 교황보다 더 높은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 교황 비오 7세를 파리까지 불렀죠. 이게 전부가 아녔습니다. 나폴레옹은 즉위식에서 돌발 행동을 하는데요. 바로 교황 손에 있던 왕관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머리 위에 쓴 겁니다. 오만한 나폴레옹은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인간이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캔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 해도, 교황을 욕보인 셈이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스캔들을 대형 캔버스에 그리라고 했으니, 아무리 권력에 가까운 다비드라 하더라도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사실대로 그리자니 교황과 교회 세력의 비난이 두려웠고요. 반대로 교황의 비위를 맞추기엔 황제가 바로 옆에 있었죠. 바로 여기서, 다비드의 창의성이 빛을 발합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신의 한 수, 나폴레옹이 왕관을 쓰는 순간이 아닌, 황제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선택한 거죠.

교황의 굴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서, 황제의 권위를 제대로 표현한 겁니다. 여기에 나폴레옹 황제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왜곡을 추가하는데요. 일단 나이 많은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어 대관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등장시킵니다. 가정의 불화를 모두에게 알릴 순 없죠. 여기에 다비드는 화룡점정을 추가합니다. 나폴레옹이 가장 존경했던, 그의 롤모델을 그림 속에 슬쩍 그려 넣은 건데요. 바로 로마 황제 시저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감일보다 1년이나 늦었던들, 황제가 이 그림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봤겠습니까.


프로파간다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일. 이것이 바로 다비드가 예술가이자 정치인으로서 모두 성공한 비결입니다. 그는 사실을 크게 왜곡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탁월한 홍보기획관인 셈이자, 그 홍보 능력으로 스스로 국회의원까지 된 건데, 그 출발은 프랑스혁명이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비드의 또 다른 걸작 <마라의 죽음>입니다.

그림 속 주인공 장 폴 마라는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자코뱅파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다비드 역시 자코뱅파의 실세로 실제 국민 공회 의장이 되어 귀족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졌었는데요. 마라는 평소 피부병이 심해 반신욕을 하며 업무를 봤는데, 욕실에서 왕당파의 사주를 받은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소녀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에 다비드는 자기 동료를 예우하는 동시에, 동지의 죽음을 멋지게 포장하여, 예술성 뛰어난 정치 선전물을 완성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마라의 죽음>인 겁니다.


여기서도 다비드의 예술적 프로파간다 포장 기술이 빛을 발합니다. 우선 암살자 샤를로트 코르데는 살해 후 현장에서 바로 자수를 합니다. 마라의 심장엔 칼이 꽂혀 있었을 테고, 욕조 주변은 선혈이 낭자했겠죠. 피살당한 마라의 얼굴은 고통을 일그러져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비드는 암살자를 그림 속에서 지워버립니다.

혐오감을 줄 만한 잔인한 현장이나 표정도 바꿔버리죠. 대신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비극의 결말처럼 바꿔버립니다. 그 결과 마라는 혁명이라는 대업을 위해 애쓰다 순교한 성인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가 암살자 샤를로트를 주인공으로 그린 <마라의 죽음>과 비교해 보면, 다비드 그림의 비장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다비드가 노렸던 선전효과도 말이죠.


다비드는 또한 연극적 파토스를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단순화합니다. 마치 핀 조명 속 연극배우처럼 표현한 거죠. 배경 단순화로 사건을 극적으로 만드는 기술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적용됐습니다. 물론 그의 프로파간다가 예술이 된 밑바탕엔 그의 완벽한 그림 솜씨가 있습니다. 루이 16세의 목이 잘린 순간, 프랑스 왕실과 귀족의 취향이었던 로코코 스타일도 반혁명적 화풍이 돼버립니다. 로코코 스타일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권력자 다비드였죠.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들이 믿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성이었습니다. 이성의 힘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인습과 관행을 하나 둘 부쉈던 거고, 결국 왕권마저 무너트린 셈이니까요. 때문에 다비드는 새로운 그림이 ‘이성의 시대’에 걸맞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 조각처럼 윤곽선은 분명하고, 신체의 비례는 엄격하며, 색은 절제돼야 한다는 다비드의 믿음은 곧 그림의 법칙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대 그리스에서 답을 찾았기 때문에, 다비드의 화풍을 사람들은 ‘신고전주의’라고 불렀고, 이후 오랜 기간 좋은 그림의 기준이 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여기서 그가 언급한 비극은 황제가 된 나폴레옹 사건입니다. 수많은 희생으로 얻어낸 시민 혁명의 결과가 황제라니요. 하지만 자코뱅파 핵심 구성원에서 나폴레옹의 선전부장이 된 다비드의 변신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 비극의 원인을 찾을 수 있지요.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됩니다. 모두가 권력을 차지하려 했고, 그 결과 극심한 혼란이 야기됐죠. 여기에 혁명의 확산을 우려했던 주변국 왕실이 프랑스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결과 유토피아를 기대하며 혁명이 이뤄졌지만, 현실은 부르봉 왕가 시절보다 더 참혹했습니다. 자연히 프랑스인들은 혼란을 끝내줄 강력한 인물을 원했고, 나폴레옹은 완벽한 대안이었던 거죠. 정권을 바꿔가며 권력 언저리에 머물던 다비드를 변절자로 몰아가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권력 의지가 과도하게 넘쳐났음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호라티우스의 맹세>입니다.

아테네를 대표해 전쟁으로 나가던 삼 형제를 그린 작품인데, 그림의 주문자는 프랑스 왕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출품된 이후, 혁명이 발생했고, 그는 이 작품이 ‘혁명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란 혁명 정신을 담고 있다고 포장했죠. 다비드는 권력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던 거죠. 권력의 선전부장을 자처한 화가의 인생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핵심은 그의 예술입니다. 시대적 맥락을 떼어놓고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 감탄을 멈추기가 힘들 정도니까요. 루벤스를 능가하는 대작 구성 능력, 가까이서 보면 더 감탄하게 되는 소묘 능력, 사진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부지런했던 탐구력까지, 그가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예술가였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레카미에 부인>

그저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그가 살아온 행적이 예술가적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일 뿐. 지금, 이 순간에도 다비드의 대작이 걸려있는 루브르 박물관 2층은 넘치는 관람객으로 제대로 된 구경이 힘들 정도이니까요.

야간개장이라 좀 한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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