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서 유명해진 델프트 사진관 사장님

천문학자, 요하네스 베르메르

by 알스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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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렘브란트를 거치면서, 플랑드르, 즉, 지금의 네덜란드는 이탈리아 부럽지 않은 미술계의 중심 무대가 됩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렘브란트 전후로 활동하던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이 많은데요. 여기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단 그림 크기가 대부분 작고요. 초상화가 많습니다. 더 놀라운 건, 초상화 대상이 귀족, 혹은 부유층만이 아니란 점입니다. 심지어 평범한 아낙들의 모습도 보이죠. 사람들의 일상이 그림의 주요 소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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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네덜란드 화가들의 공통점은 당시 회화 업계에 불어닥친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절 화가들이 보통 교회를 필두로 한 큰 손들의 후원을 주로 받았다면, 신교를 믿었던 네덜란드는 미술계의 거물, 가톨릭교회와 절연하고, 스스로 미술 시장 개척을 시작했던 상황이었거든요.


네덜란드 화가들은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작품 크기를 줄이고,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가질만한 초상화에 집중했습니다. 동시에 르네상스 화가들의 초상화는 정지된 순간을 그렸다면, 네덜란드 화가들은 마치 스냅사진을 찍은 것처럼 특정한 순간을 잡아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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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는 방안이었죠. 노래를 부르고 있는, 혹은 차를 막 마시려는 순간을 그리는 식이었죠. 마치 스티커 사진을 찍는 사람 특유의 역동성이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요하네스 베르메르(페르메이르가 정확한 표현이지만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이름, 베르메르로 부르겠습니다.)도 당시 네덜란드 길드에 가입되어 있던, 전형적인 네덜란드 화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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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건 약 35점(37점?) 밖에 없는데, 실제로 작품을 많이 남긴 것 같진 않습니다. 루브르에도 2개의 작품이 있는데 오늘 소개할 작품은 <천문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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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빛이 잘 드는 책상 앞에 앉아 별자리가 그려진 지구본을 보고 있습니다. 책이 펼쳐진 걸로 봐선 방금 책에서 읽은 내용을 확인하려는 모습 같은데요. 엉덩이가 살짝 들려진 걸로 보아,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나 봅니다. 딱 봐도 <천문학자>는 사실적인 디테일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크기는 작은 편인데, 지구본에 그려진 별자리 모양은 물론, 벽에 걸려있는 그림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져, 가까이서 보면 내용 식별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책상 위의 천도 그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히 묘사돼 있죠. 베르메르의 그림엔 얀 반 에이크에서 시작돼, 판데르 베이덴과 퀜틴 매치스를 거치며 발전한 플랑드르 특유의 화풍, 즉, 사소한 부분의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집착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습니다.

DSC02389.JPG 퀜틴 매치스의 작품, 프랑드르의 디테일 집착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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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림 속 이 남자, 정말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였을까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네덜란드의 또 다른 작품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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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작품보다 한 세대 정도 전에, Spreeuwen이란 화가가 남긴 작품입니다. <연구실의 학자>인데요. 왼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구도나, 책상 위의 소품이 뭔가 익숙합니다. 베르메르의 <천문학자>와 꽤 닮아있죠? 또 다른 그림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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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도우 Dou란 화가가 남긴 <아픈 여성의 소변을 검사하는 의사>입니다. 역시나 오른쪽에서 강렬한 빛이 들어오고 있으며, <천문학자>의 책상 위에 있는 천과 비슷한 재질의 커튼이 걸려있습니다. 전체적인 방의 인테리어가 역시나 비슷합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집 구조가 다 비슷하기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곳이 실제 그림 속 인물들이 살던 곳이 아닌, 화가가 운영하던 스튜디오라고 보는 게 좀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림 속 오브제들은 스튜디오에서 제공한 소품이죠.


즉,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사진관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겁니다. 당시 고객들이 선호하던 인테리어로 스튜디오를 꾸며놓고,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소품을 갖다 놓아, 손님이 돋보이도록 만들어 준 거죠.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속 배경도 마찬가집니다. 천문학 지구본이나 책, 커튼 등은 일종의 사진관 소품이었던 셈 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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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림 속 인물은 실제 천문학자라기보단,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던 베르메르의 고객이었을 겁니다. 이런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베르메르가 남긴 또 다른 작품 <지리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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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인물이 보이죠? 그림 속 주인공이 복수 전공한 게 아니라면, 저 남자는 당대의 지식인처럼 보이고 싶어 하던, 베르메르의 몇 안 되는 단골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베르메르는 왜 이렇게 적은 수의 작품만 남긴 걸까요? 스튜디오를 찾는 손님이 생각보다 적었던 걸까요? 일단 베르메르가 솜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는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그는 납품일을 잘 못 맞추거나, 그림이 나오는 데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리는 비효율적 화가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작은 부분의 디테일마저 최대한 정교하게 그리는 플랑드르의 화풍을 제대로 계승한 화가였으니까요. 동시대 다른 그림 스튜디오에서 나온 작품과 비교해 보면, 베르메르 작품의 디테일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 지구본을 한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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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자체로 한 편의 독립적인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죠. 책상 위의 책 내용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네요. 벽에 걸린 그림도 자세히 보면 그림 속 그림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고요. 책상 위의 두꺼운 천을 표현하는 디테일은 베르메르의 전매특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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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에 그려진 문양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반사되는 순간까지 포착해 낸 탁월한 기술을 그는 선보였습니다.


베르메르는 지금으로 치렴. 극사실주의를 표방하던 화가였던 셈인데, 그렇다고 그림이 차갑거나 딱딱하진 않습니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윤곽선을 흐리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사실성을 확보했듯, 베르메르 역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의 따뜻함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형태의 입체감이나 견고함은 잘 유지하고 있고요. <천문학자> 옆에 있는, 크기가 훨씬 작은 <레이스 만드는 사람>도 놀랍기는 마찬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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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색깔의 실을 이용해 수를 놓는 여성을 타이트하게 그려냈는데, 특히 엉켜 있는 실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해 놓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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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대단한 건 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물감을 무성의하게 뿌려놓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엉켜 있는 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거죠. 이렇게 단 한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니, 그림 하나 완성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렘브란트가 자신의 예술적 이상향을 추구하다 네덜란드 대중의 외면을 받았던 것처럼, 베르메르도 그림 스튜디오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대신, 얀 반 에이크의 후손을 자처했던 본인의 예술적 열망을 구현하려 애썼던 것이죠.


그래도 렘브란트는 집이 부자였고, 부자 아내와 결혼했지만, 베르메르는 그런 재력도 없었습니다. 사실 베르메르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그가 ‘델프트의 스핑크스’라 불린 이유죠. 수수께끼투성이라), 그중 그가 네덜란드 델프트라는 도시에서 평생 살았다는 점, 그리고 자녀가 11명이었다는 점이 그나마 알려진 그의 사생활이죠. 그러니까 그는 11명의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이었습니다.

1024px-Vermeer-view-of-delft.jpg 베르메르가 남긴 델프트의 풍

델프트에서 그림 스튜디오만 운영해선 가족을 부양하기가 아마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또 다른 직업이 있었을 거고, 실제로 아버지가 남겨준 여관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그림을 사고파는 일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려주는 일은 그의 부업이자,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던 작은 해방구가 아녔을까요? 그가 작품 하나하나의 디테일에 더 집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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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주문이 생각만큼 많이 들어오지 않던 와중에 겨우 들어온 의뢰는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겠습니까. 일상의 스트레스에 벗어나 억눌렸던 예술혼을 분출할 수 있던 순간이니, 그림의 모든 부분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그리지 않았을까요. 또한 그가 남긴 작품엔 여성, 특히 아낙을 그린 그림이 많은데요. 그런 그림은 주문받아 그렸다기보단, 부업 혹은 취미 생활로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마치 밀레나 쿠르베 이전 시대에, 네덜란드의 풍속을 표현한 사실주의 작품처럼 보이는 거죠. 결국 본인이 일해서 번 돈 중 일부는 그림 그리는 데 썼으니, 그는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겠죠. 실제 그는 죽기 직전 가난으로 큰 고생을 했고,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그의 아내가 살기 위해 그의 유작들을 팔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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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명 화가였을 겁니다. 그가 죽고 난 뒤, 베르메르란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러다 1866년 토레 뷔르거라는 미술 평론가에 의해 그의 이름이 재발견되는데요. 뷔르거는 혁명을 꿈꾸던 사회주의자였는데, 그의 정치적 지향에 네덜란드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린 베르메르의 사실주의적 화풍이 잘 들어맞았던 거죠.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뷔르거의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게, 베르메르 작품이 갖고 있는 순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대중의 관심은 커지는데, 작품 수는 턱없이 부족하니, 오히려 그 희소성으로 명성이 더 올라가게 됩니다. 여기에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장군 괴링이 약탈해 간 베르메르의 그림이, 네덜란드의 미술상 반 메헤렌이 그린 위작으로 밝혀지면서, 베르메르의 인지도는 더 높아졌죠. 한때 부업을 하며 그림의 열망을 이어갔음에도 무명 화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었지만, 죽고 난 지 150년이 지나고 렘브란트와 함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으니, 그가 저승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그의 그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이라면, 그가 오히려 한 때 무명의 화가였다는 사실이 더 의아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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