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한 스타, 자신의 몰락을 응시하다

자화상(1660) 렘브란트 반 레인

by 알스카토

그는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밀가루 사업을 하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대학에 들어갔다가, 그림을 그리겠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뒀는데요. 당시 모든 그림 수재와 마찬가지로, 그도 이탈리아 유학 권유를 받았는데 그는 거절했습니다. 굳이 유학 필요성을 못 느꼈거든요. 타고난 그림 천재였기 때문입니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이야깁니다.

지금도 렘브란트가 태어난 네덜란드 레이든에 가면 그가 태어난 장소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건물은 부서져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렘브란트 생가에 가보면 근처에 큰 풍차가 2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렘브란트의 할머니 소유였습니다. 렘브란트가 투자 목적으로 구매했던 정원도 집 근처에 있고요.

중앙 광장엔 렘브란트 사후 400주년을 기념해, 독일의 한 예술가가 어린 렘브란트를 모티브로 헌정 조각을 만들어 놨는데요. 바로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렘브란트를 표현했죠.


실제로 렘브란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자화상입니다. 남아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만 약 40점이며, 그중 에칭 작업이 30점, 회화가 10점입니다. 이 정도면 자기 자신을 상당히 많이 그린 건데요.

프티 팔레에서 전시 중인 에칭 전시에도 렘브란트가 남긴 작은 크기의 자화상을 볼 수 있고요.

루브르 박물관에도 그의 자화상이 몇 점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볼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1660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그림은 일단 상당히 어둡습니다. 실제로 보면 박물관 조명도 어두워, 그림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죠. 얼굴에만 핀 조명이 떨어지고 있는데, 온갖 풍파를 겪은 뒤 살아남은 자 특유의 차분한 표정입니다.

당시 네덜란드 초상화답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순간을 스냅사진으로 포착했습니다. (물론 렘브란트는 거울을 보고 있었을 테니, 그리면서 시선 등을 살짝 수정했겠죠) 얼굴 다음으로 조명을 많이 받는 건 팔레트고요. 반면 붓을 든 오른손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렘브란트의 본격적인 성공은 고향 레이든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전쟁이 치열했고, 네덜란드는 개신교의 대표 국가였죠. 가톨릭에 대한 반발로 네덜란드에선 종교화를 파괴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화가들은 미술계 최대 광고주인 교회를 손절합니다. 당연히 큰 후원자를 잃은 화가들은 스스로 영업 활동을 시작했고, 생계의 일환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늘어났습니다. 화가들은 종교의 간섭에선 자유로워졌지만, 대중의 변덕을 상대해야 하는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죠. 그런 분위기 속에, 렘브란트는 초상화 고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됩니다. 그림을 잘 그렸을 테니까요. 매년 7월 레이든에선 렘브란트 축제가 열립니다. 마을 주민들이 렘브란트 그림 속 인물 복장을 하고, 그림을 재현하는 건데, 가장 인기 있는 무대 중 하나가 바로 <니콜라스 퇼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입니다.

물론 그림이 나왔을 당시에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렘브란트는 제2의 루벤스가 된 겁니다. 그 와중에 네덜란드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유한 가문의 여성과 결혼도 했으니 렘브란트 인생엔 거칠 게 전혀 없었을 겁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렘브란트 자화상이 3점 더 있는데, 전부 젊은 시절의 그림입니다. 한눈에 봐도 자부심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위풍당당하죠.

그런데 너무 이른 성공이 원인이었을까요. 그에겐 골동품이나 미술품 등을 무분별하게 사는 사치벽이 있었다고 합니다. 돈이 넘쳐나니 돈을 아껴 쓸 필요가 없었겠죠. 렘브란트 축제에서 <해부학 강의>만큼 인기 있는 재현이 바로 <야경>인데요.

바로 이 그림을 그린 뒤, 그는 정상에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몰락의 첫 번째 이유는 렘브란트가 더 이상 대중의 요구를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는 마치 르네상스 고전주의 예술가처럼,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구현하려고 했고, 그 그림들은 대중들의 니즈와 달랐습니다. 당연히 그림들은 외면받기 시작했죠. 여기에 그의 추락을 가속했던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아내의 죽음이었죠. 이미 세 아이를 잃었던지라, 렘브란트는 아내의 죽음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야경>의 성공 이후, 그는 현기증 나는 속도로 추락하는, 과거의 스타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그가 대중의 요구를 거부하고 추구했던 미학적 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야경을 그리기 2년 전에 완성한 <성가정>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당시 초상화를 의뢰했던 고객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내가 잘 나왔나’입니다. (이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단체 사진도 마찬가집니다. 나만 구석에 박히거나 조명에서 밀려나면 기분이 좋지 않겠죠. 그런데 <성가정>을 보면, 마치 카라바조가 시도했던 조명을 통한 대비효과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느낌이 듭니다. 주인공을 빼곤 전부 어둠 속에 집어넣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카메라가 초점을 잘 못 맞출 정도로 그림 배경은 어두운데, 그림 전반의 어두움이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는, 젖 먹는 예수의 모습을 극적으로 강조시킵니다.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의 마법사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윗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도 마찬가지죠. 렘브란트는 중앙의 주인공을 제외하곤 모두 어둠 속에 가둬버리는데, 그 흑백의 대비가 르네상스 그림들이 주지 못했던 감정적 파동을 제공하는 겁니다.

대신 평범한 초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렘브란트를 찾지 않았고요.


렘브란트의 사생활을 복잡했습니다. 낭비벽은 여전했죠. 파산 선언 후, 채권자들이 그의 작품을 다 팔아버렸고요. 자신을 돌보던 하녀랑 동거하다가, 그녀를 내버리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파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죠. 그나마 두 번째 아내의 도움으로 말년의 작품 활동을 간신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추락을 넘어 파멸을 향해 달려가던 순간에도, 렘브란트는 자화상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매료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생을 평생 찍은 인생 프로젝트처럼, 렘브란트는 인생 속 성공과 몰락을 충실하게 자화상으로 남겨놓은 겁니다. 그는 왜 자신의 인생을 돌보지 못하던 순간에도 자화상을 그렸던 걸까요. 그가 실제로 인생 프로젝트를 계획적으로 추진한 게 아닐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화상을 통해 자서전을 쓴 셈이죠. 물론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보다는 초상화 영업 작업의 일환으로 견본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홍보할 광고 전단을 제작한 거죠. 렘브란트의 경제적 어려움을 생각하면 후자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1960년에 그린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죽기 9년 전에 남긴 작품입니다.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였죠. 그의 자화상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떠한 거짓이나 꾸밈없이 기록했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위대한 초상화가의 덕목 중 하나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그려내는 진실성이었습니다. 라파엘로를 시작으로 한스 홀바인을 거쳐, 렘브란트까지, 초상화가들은 한 인간이 살아온 인생과, 그의 성품을 하나의 이미지에 담으려 노력했고, 렘브란트는 그 누구보다 이 야심에 찬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성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몰락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 몰락을 성실하게 응시하여 완성한, 1660년의 자화상을 보면, 30대의 거침없는 성공, 예술가적 성취, 부유한 아내와의 결혼, 그 이후에 찾아온 대중의 외면과 경제적 몰락, 아내와 자녀의 사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하나의 이미지에 소설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압축해서 담아내는 렘브란트의 능력은 비단 자화상에만 적용됐던 건 아녔습니다. 렘브란트가 말년에 남긴 작품 대부분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죠.


렘브란트의 추락을 알고 1660년 자화상을 보면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보입니다. 눈은 온화하지만,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제 그가 왜 조명을 팔레트에 비췄는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외부의 불운과 자신의 결함이 뒤섞여 만들어 낸, 다양한 형태의 비극 속에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물감 덕분이었을 테니까요.

사망하기 4년 전에 그린 <도살된 황소>를 보면 렘브란트가 삶의 마지막까지 얼마나 열정적으로 예술가적 열정을 불태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프랜시스 베이컨의 현대회화를 연상시키는 이 그림의 새로운 시도를 보면 렘브란트의 대담함이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슬프게도 그에겐 견뎌야 할 불행이 아직 더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말년 작품 활동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두 번째 아내가 세상을 뜬 것이죠. 그 후 첫 아내와 낳은 네 아이 중 유일하게 살아있던 아들이 사망한 일이 렘브란트에겐 결정타가 됩니다. 결국 렘브란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년 뒤 쓸쓸하게 죽게 됩니다. 결국 1660년 자화상을 보면 자신이 걸어온 인생뿐만 아니라, 그에게 닥칠 슬픔도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 그림 앞에서 쉽게 발을 뗄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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