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진에 빠진 프랑스 미술계의 구원자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니콜라 푸생

by 알스카토

프랑스 최고 박물관에 있는 위대한 걸작을 르네상스 이후 시간 순으로 살펴보고 있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합니다. 바로 프랑스 그림이 아직 안 나왔다는 거죠. 이탈리아가 주도하고 플랑드르가 추격하던 당시 회화 무대에 프랑스가 소외돼 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국력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프랑스는 언제나 유럽의 강국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프랑스인이 문화 예술에 관심이 없는, 야만족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죠.

장 클루에거 그린 프랑수아 1세

바로 이 분,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와 전쟁을 하면서도, 그들이 달성한 예술적 성취를 정확히 파악한 왕이었습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알아채고, 다빈치를 프랑스로 데리고 와, 스승으로 모시며 극진한 대우를 할 정도였죠. (그 덕분에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니콜라스 푸생입니다. 프랑스 출신 화가다 보니, 루브르 박물관엔 그의 작품이 무려 약 40점 있는데요. 그중에서 규모는 작지만 가장 인상적인 푸생의 그림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아르키아에도 나는 있다>라는 좀 당황스러운 제목의 그림이죠. 얼핏 보면 목가적 풍경을 그린 평범한 그림 같습니다. 하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한 작품이 아닙니다. 그림 속 남자들의 옷차림을 볼 때, 이들은 목동일 겁니다. 그중 한 명은 무덤에 적힌 비석을 해독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옆에 있는 여성에게 뜻을 묻는 것 같네요.

비석엔 ‘ET IN ARCADIA EGO’, 번역하면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작품의 제목이죠. 아르카디아는 실제 그리스에 위치한 지역 이름인데, 여기서 제목의 ‘나’는 보통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됩니다. 즉, 죽음은 어디에도 있다는 ‘메멘토 모리’의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며, 옆에 있는 여성이 아마 목동들에게 그 내용을 이미 설명한 것 같습니다. 여성을 쳐다보던 목동의 표정이 놀란 걸 보면 말이죠.


뭔가 조금 어려운 그림입니다. 평화로운 풍경에 갑자기 웬 죽음 이야기인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푸생의 전형적인 스타일입니다. 푸생은 그림에 재능 있던 모든 유럽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한참 공부하던 시기는,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지나, 바로크라 불리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던 때였습니다. 카라바조를 필두로, 르네상스의 엄격함에 답답함을 느낀 화가들이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죠. 하지만 전통을 부수려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이를 수호하려는 세력도 등장합니다. 카라바조파에 대항한 카라치파가 바로 그들이었고, 귀도 레니 같은 화가들이 대표적인 카라치파의 화가였습니다.

카파라조파의 두목 카라바조의 작품
카라치파의 행동 대장 귀도 레니의 작품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실제 있는 그대로의 리얼한 모습을 카라바조파가 강조하려 했다면, 카라치 파는 훨씬 매끈하고 이상화된 모습을 담아냅니다. 즉, 카라치파는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선배들이 남긴 규칙과 그 정신을 잘 이해하고 그들의 양식을 더 충실하게 쫓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푸생은 물론 카라치 파였습니다.


푸생은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성균관 유생이 떠오른다고 할까요. 그는 라파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대신, 머릿속에 있는 이상향을 화폭에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속 배경이 된, 아르카디아는 사실 저렇게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동네가 아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푸생은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자연을 숭고하고 거대한 이상적 풍경으로 그렸으며,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도 예외는 아녔던 거죠.

인물의 묘사나 그림의 구성도 마치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을 연상시킵니다. 무덤을 중심으로 서 있는 인물들의 배치나 포즈가 카라바조의 그림보다 훨씬 단순하지만 질서 정연합니다. 색채도 절제되어 있는 것이,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차분합니다. 그러니 푸생 입장에선 루브르에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고 없애야 한다고 분노할 수밖에요.


사실 푸생의 별명이 그림 그리는 철학자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오래 사색하고 명상하며, 정신노동의 결과물을 그림으로 담아내려 했습니다.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화가는 몸을 써서 일한다는 이유로 천시받았고, 그림 실력은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죠. 그랬던 것이 르네상스 화가들을 거치면서 예술가적 자아가 화가들에게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덴 손 기술만큼이나 명상과 사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죠. 심지어 미켈란젤로는 그림은 손이 아닌 머리로 그리는 거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미켈란젤로의 설명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람이 푸생이었습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속 이상화된 자연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목동의 유한함과 대비되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푸생은 자연의 숭고함, 불변성을 강조하려 늘 애썼죠. 그런 푸생의 특징은 루브르에 있는 푸생의 다른 작품, <겨울(대홍수)>나 전염병의 창궐을 그린 그림에도 잘 나타납니다.

목동 옆의 여성은 누구일까요? 일하는 여성의 옷차림은 아니죠. 푸생은 처음부터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 여성은 실제 인물이 아닌, 신 혹은 진리의 알레고리입니다. 때문에 죽음 이야기에 당황한 목동들과 달리 진실을 전해주는 여성의 표정은 차분하고 평화롭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죽는다는 건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이죠. 즉, 푸생은 자신이 죽음을 고찰하며 떠오른 추상적 깨달음을 이미지의 형태로 재현해 낸 겁니다.


푸생이 중요한 화가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가 바로 뒤처져있던 프랑스 미술을 발전시킨 개척자이기 때문입니다. 푸생이 로마에서 라파엘로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도의 정신활동을 동반한 회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프랑스 미술은 국가의 대규모 투자에도 불구하고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시절의 대표적 프랑스 그림 장 드 구르몽의 <목동들의 경배>를 보면,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에도 부자연스러움이 강조돼, 마치 중세 시대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앙투앙 카론의 작품도 크게 분위기가 다르지 않죠. 퐁텐블로 학교란 이름의 미술학교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곳 졸업생들의 작품도 이탈리아 화가들의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장 드 구르몽 <목동들의 경배> 일부
앙투안 카론 <아우구스투스와 티부르의 시빌레>
퐁텐블로 화가의 <가브리엘 에스트레와 그녀의 자매>

국가의 기틀을 잡고 있던,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는 프랑스 미술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투자에도 성적을 내지 못하는 축구팀을 구해줄 뛰어난 감독이 필요했었고, 리슐리외는 세계 최고 회화 무대에서 활동 중이던 푸생을 강제로 소환합니다. 사실 푸생은 로마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그림 그리는 생활이 정말 행복했던 ‘로만 워너비’였습니다. 리슐리외의 호출을 거절할 정도로 프랑스에 돌아오기 싫어했죠. 그는 세계 최고 무대에 계속 남고 싶어 했던 겁니다.


하지만 결국 푸생은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국가적 투자에도 국가대표 성적이 좋지 않은 중국 축구계에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던 중국인이 감독으로 오게 된 거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르네상스의 보수적인 규칙을 따르는 푸생의 회화 스타일이 조금 답답할 수는 있어도, 미술 교육자의 양식으로는 적합했습니다. 그에겐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의 기준이 아주 뚜렷했거든요. 끌려오듯 오게 됐지만, 푸생은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익힌 모든 것을 프랑스 미술 교육에 바쳤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심각한 내용이어야 한다, 역사적 내용이나 도덕적 교훈을 그림을 통해 던져야 한다, 색은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하고 그림의 윤곽선은 보이면 안 된다, 그림은 우화나 상징을 잘 활용한 지적이고 합리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등등, 그 이후 프랑스 미술계가 받아들이게 될 좋은 그림의 기준은 전부 푸생의 유산에서 비롯된 겁니다. 푸생 덕분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 뒤떨어져 있던 프랑스 미술이 어느 정도 추격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루브르의 푸생관
푸생의 그림들
푸생의 제자들이 남긴 푸생 스타일의 작품들


푸생의 자화상입니다. 한눈에 봐도 꼬장꼬장한 선비가 떠오릅니다. 매사에 진지하고, 항상 합리적이고 질서 정연하게 대상을 표현했기 때문에, 때로 그의 작품이 좀 딱딱하고 덜 흥미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르네상스의 결과물을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려 애썼고, 잔재주 부리는 대신, 선배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된다고 믿던 예술가였습니다. 푸생을 사람들이 ‘고전주의자’라 부르는 이유죠. 그러니 그가 낙후된 프랑스 미술교육의 개척자로 나타났을 때, 어찌 보면 프랑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교본을 충실하게 전달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푸생의 엄격한 화법은 이후 중세 느낌이 나던 프랑스 회화를 바꿔놨으며, 루브르 방문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다비드와 앵그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모든 프랑스의 미술학교엔 푸생의 흉상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그가 이탈라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수많은 관광객을 부르는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도 지금처럼 매력적이지 않았을 거니, 어찌 보면 프랑스 미술학도라면 그의 흉상 앞에서 일단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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