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첫 전시가 사진작가 나다르 Nadar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건, 지금 생각하면 아주 상징적이지만, 전시 개최 당시엔 별 의미 없는 우연한 대관이었다. 나다르의 스튜디오가 위치한 카퓌신 Capucines 거리는 서울의 명동 혹은 압구정 거리처럼 최신의 유행이 모이는 중심가였다. 무명의 화가들이 모여 전시하는데 접근성이라도 좋아야 할 것 아닌가. 드가 Degas는 나다르의 스튜디오를 보고 동료 화가 티쏘 Tissot에게 ‘그 어느 곳보다 이곳이 좋겠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1874년의 카퓌신 거
나다르의 스튜디오는 4층, 그러니까 우리의 5층에 있었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고, 지붕은 당시의 유행을 따라 유리로 만들어 실내 채광을 높였다. 카퓌신 거리 35번지에 있는 빌딩은 1854년에 완공돼, 당시의 유명 사진작가들의 스튜디오로 쓰였고, 나다르는 1860년에 입주했다. 나다르는 파리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인 카퓌신 거리에 있으면 고객들을 모으기가 더 유리할 거로 생각했다. 스튜디오 앞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대형 간판도 설치했다. 요즘 스타트업 기업들이 샹젤리제 같은 비싼 공유 오피스에 자리를 잡고 투자자를 모으는 식인데, 정작 손님이 많지 않았는지, 슬프게도 나다르는 자신이 사랑했던 카퓌신 거리를 곧 떠나게 된다.
장 레옹 제롬, <닭싸움을 시키는 그리스인들> 고전주의의 수호자 제롬은 인상주의에 특히 적대적이었다.
사진은 모던 파리의 상징이었다. 부자들은 초상화 대신 사진으로 자기 모습을 남기려고 했다. 사진은 더 쉽고 빠르게 대상을 정확히 재현해 냈다. 초상화로 생계를 이어가던 많은 화가가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고, 초상화 주문이 줄어들었다는 건, 화가들이 좀 더 다양한 주제와 양식을 시도해 볼 자유가 주어졌음을 의미했다. 장 제롬 Jean Gérome의 그림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작품의 가치가 희석되기 시작했고, 바로 그즈음 모네는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자욱한 안개와 포개져 관통하는 이미지를 포착해 냈다. 대상의 객관적 재현이 아닌 주관적 표현이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고전주의 회화를 몰락시킨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그림의 탄생을 선언한 셈이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그림은 죽고
화가의 주관성을 드러낸 그림은 살고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 프로젝트는 오페라 가르니에의 완공과 함께 마무리됐고, 오페라 거리와 닿아있는 카퓌신 거리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됐다. 그래서 한때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의 이름을 ‘La Capucines’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만큼 카퓌신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하던 모던하고 고상하며 역동적인 이상향과 닮아있었다. 물론 드가의 제안은 르누아르의 강한 반대로 무산됐는데, 르누아르는 당시 그룹을 하나의 획일적인 이름으로 규정하는 모든 명칭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퓌신 거리에 가면 나다르 스튜디오를 밖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은 다른 파리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한창 공사 중이며, 세련된 Nader 간판은 사라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