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매단 사람의 집, 폴 세잔
세잔Paul Cézanne의 이야기는 결국 <모던 올랭피아A Modern Olympia>에서 시작해야 한다. 1874년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가장 많은 욕을 먹었던 문제작. 세잔이 오마주한, 마네É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가 왜 미술계의 스캔들이 됐는지 떠올려 보자. 여성의 나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미화하지 않은)도 문제였지만, 매음굴의 여성이, 너무나 당당하게 관람객을 바라보는 자세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마네의 의도와 달리 당대의 위선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문화 예술을 즐기지만, 밤에는 매춘부를 찾는 신사들을 불편하게 만든 셈이다.) 세잔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마네는 매춘부 옆의 남성을 암시하는데 머물렀다면, 세잔은 아예 나체 여성을 바라보는 신사를 그림 속에 등장시켰다. 마네의 그림은 얼핏 보면 고전주의 영향 아래 있는 것처럼 보였다면, 세잔은 ‘스케치’란 부제를 붙이고,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파격적인 그림을 내놨다. 세잔은 마네보다 더 제멋대로였다.
인상주의란 명칭을 처음 사용했던 평론가 루이 루르아Louis Leroy는 그림을 보고 세잔을 ‘미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제정신인 사람이 그릴 수 없는 작품이란 거였다. 심지어 인상주의 동료 드가Edgar Degas마저 정돈되지 않은,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며 세잔의 전시 참여를 반대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모리조Berthe Morisot의 <요람Le Berceau>을 감상한 다음, 옆에 전시된 <모던 올랭피아>를 만나면,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평가가 마냥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루이 르루아는 세잔이 환각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 것 같다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붓질이 거칠다 못해 난폭한 데다, 옷 벗은 여성과 이를 바라보는 옷 입은 남성의 관계가 기이해서, 불편한 감정이 몰려온다. 마치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에 있는, 불쾌함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현대 미술들, 예를 들면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 옆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인 또 다른 세잔의 어두운 그림, <아쉴 앙페레르Achille Emperaire>를 보자. 신체적 결함이 있던 동료 화가를 그렸는데, 심사위원들은 신체의 부조화, 즉 머리는 크고, 다리는 짧으며, 팔은 지나치게 얇다는 이유로 떨어트렸다. 대충 검게 칠한 배경도 탈락의 사유였다. 세잔은 신체적 결함이 있는 화가, 아쉴의 자세를 고전주의 작품 속 황제의 그것과 비슷하게 그렸다. 당연히 우연일 리 없다. 의도적으로 아쉴을 모델로 선택, 고전적 작품을 조롱한 셈이니, 세잔은 처음부터 낙선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사실 세잔은 늦게 미술을 시작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미술 교육을 반대했다. 하지만 세잔의 내면엔 새로운 예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고,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꺾었다. 하지만 미술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그림을 그렸기에, 에콜 데 보자르 합격은 물론, 살롱 출품에도 실패했다.
그래도 세잔에겐 파리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절친이 있었다. 비평 전쟁의 선봉에서 인상주의를 수호했던 소설가, 바로 에밀 졸라Emile Zola다. 둘은 남프랑스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왜소한 졸라가 괴롭힘을 당할 때면 덩치 큰 세잔이 구해줬고, 가까워진 둘은 시와 미술을 논하며 서로의 예술혼을 키웠다. 세잔이 법률가가 되길 원하던 아버지와 갈등할 때, 졸라는 편지를 보내 파리 상경을 권했다. 당시 졸라는 세잔보다 먼저 파리에서 일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세잔은 파리에 올라온 후에도, 살롱 전에 번번이 낙방했다. 졸라는 천재 화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프랑스 미술계를 공개 저격했다. 이후 세잔을 통해 인상주의 그룹을 알게 된 졸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프랑스 미술계의 주류가 되리라 확신했다. 졸라는 고향 친구 세잔이 더 적극적으로 인상주의 그룹에 동참하길 바랐다.
하지만 <모던 올랭피아>를 보고 난처했던 건, 인상주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첫 인상주의 전시는 예술적 지향점을 정해놓고 시작된, 일종의 조직된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저 살롱에 반대하고 싶은 저항가, 혹은 살롱에서 거절당했지만, 그림을 팔고 싶은 화가 등이 잡다하게 모였다. 세잔도 프랑스 미술계의 완고함, 살롱의 권위 등을 조롱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네Claude Monet와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화풍을 따르고 싶진 않았다. 세잔이 그린 종교화 <림보에 있는 그리스도 Le Christ aux Limbes>를 보면 당시 세잔이 추구했던 미술을 짐작할 수 있다. 부활하기 전 아담과 이브를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아쉴 앙페레르>만큼이나 어둡다. 마치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처럼, 관객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어른거린다. 세잔은 빛의 움직임이나 그로 인한 대상의 변화, 밝은 색채와 생동감 같은 데 관심을 갖기엔, 본인의 취향과 스타일이 너무나 뚜렷했다.
세잔의 뚜렷한 스타일을 처음으로 알아챈 화가가 다행히 인상주의 그룹에 있었다. 에드가 드가가 세잔의 합류를 반대할 때, 유일하게 세잔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화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였다. 피사로는 사회성 없던 세잔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인물이다. 훗날 성공한 이후에도 세잔은 늘 자신을 ‘피사로의 제자’라고 밝히곤 했다. 세잔이 파리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때, 피사로는 세잔을 파리 교외 퐁투아즈Pontoise로 불러 함께 그림을 그렸다. 이후 세잔은 피사로의 도움으로 고흐가 죽기 전 머물렀던 오베르쉬아즈Auvers-sur-Oise에 집을 구했다. 이때 피사로는 세잔에게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는 인상주의의 철학을 전달했다. 물론 세잔은 ‘야외’와 ’풍경‘이란 두 요소만 받아들였을 뿐,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두 사람의 작업을 본 오베르쉬아즈의 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피사로 씨는 점을 찍는 동작으로 작업한다면, 세잔 씨는 뭔가 덧칠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더군요.”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모던 올랭피아>와 함께 출품한 <목매단 사람의 집La Maison du pendu>을 그린 것도 이때였다. 당시 모든 관심(비난)은 <모던 올랭피아>에 쏠렸지만, 화가 세잔이 추구했던 예술의 방향은 <목매단 사람의 집>에 담겨 있었다. 세잔은 모네와 피사로가 포착하려던 찰나의 순간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시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형태를 포착하고 싶었다. 그는 삼각형 지붕과 직사각형 집 등 대상의 형태에 집중했으며, 때론 하나의 그림에 여러 시점(집의 시점과 골목길의 시점)을 집어넣어 형태를 정확하게 집어내려 했다. 피사로는 빠른 붓터치로 빛의 변화를 포착한 반면, 세잔은 건물 외벽의 질감이 느껴지게 하기 위해 물감을 두껍게 칠했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나무와 집을 칠한 물감이 뭉쳐있다. 그런 점에서 오베르쉬아즈의 농민은 꽤 예리하게 피사로와 세잔의 작업을 관찰한 셈이다.
인상주의 작가들이 포착한 찰나의 순간은 절대적 진리의 토대를 흔들었다. 과연 불변하는 진리라는 게 있는가. 모네는 500년 넘은 루앙 대성당을 반복해서 그리며, 우리가 눈으로 보며 확신하는 실체도, 사실은 우리 인식 속에 저장된 허구의 결과일 뿐, 결국 변화하는 순간의 일부에 불과함을 증명했다. 모네의 실험은 견고했던 성당을 무너트렸다. 세잔은 바로 이 폐허 위에서 대성당의 견고함을 복원하고 싶어 했다. 빛이 무너트리는 형태는,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 외벽에 장식된 섬세한 조각과 외형일 뿐, 눈앞에 서 있는 굳건한 벽돌 덩어리는 사라지지 않음을 세잔은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단순한 형태, 사과(원)에 집중했다. 그는 정물화를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리며, 빛의 변화가 앗아가지 못하는 형태의 절대적 실체를 되살려냈다. 친구 졸라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세잔은 인상주의에 내재된 파괴적 면모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모네가 했던 연작 실험을 통해 자기만의 세상을 탄생시켰다.
에밀 졸라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인상주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졸라는 급변하는 파리의 신문물을 포착하는 인상주의의 특징에 매료됐고, 특히 가난했던 모네와 르누아르가 부유해진 것을 보며, 자신의 친구도 성공의 물결에 동참하길 바랐다. 하지만 세잔은 액상프로방스로의 귀향을 선택했다. 이때의 실망 때문이었을까. 졸라는 재능 있지만, 시대를 너무나 앞선, 그래서 결국 미치광이가 돼 자살하는 비운의 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작품L'Œuvre>을 썼다. 물론 졸라가 진짜 세잔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잔은 소설을 읽는 순간, 미치광이 화가가 자신임을 직감했다. 친구에게 책 선물을 받은 뒤, ‘잘 받았다’란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세잔은 죽을 때까지 졸라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은 채, 고향 액상프로방스에서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세잔이 탐구했던 사과 정물화가 현대 미술의 시작을 열었다는 얘기는 미술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설명이 됐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과도한 세잔 예찬은 관람객과 세잔 사이의 장애가 되기도 한다. 뭔가 어려운 작가, 난해한 현대 미술과 관련이 있는 화풍으로 인식되는 것인데, 사실 세잔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작품을 본다면, 그 자체로도 쉽게 즐길만하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르세이유의 풍경Le golfe de Marseille vu de L'Estaque>은 '세잔 필터'가 적용된 풍경화다. 굳이 피카소Pablo Picasso와 브라크Georges Braque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단순화된 형태는 현대 디자인을 연상시킨다. 화창한 액상프로방스의 날씨 덕인지, 그가 선택한 파랑(하늘과 바다), 초록(숲), 노랑(땅과 집)의 색채도 강렬하다. 세잔의 색채감이 마티스Henri Matisse의 야수파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연 설명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세잔의 작품은 인물화이다. 세잔은 자신의 공식을 인물화에도 적용했고, 모델의 형태를 해부했다. 둥근 머리, 네모난 몸, 긴 팔 등에 주목했던 것인데, 그 결과 세잔의 그림은 세련된 일러스트 디자인과 닮아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들Les Joueurs de cartes>은 세잔 인물화의 정점이다. 배경도, 인물의 디테일도 생략된 채, 오직 카드놀이 하는 남자의 형태에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의 미학적 요소는 지켜냈다.(총 다섯 작품을 그렸는데, 점점 배경이나 인물이 단순화돼 간다. 오르세 소장 버전은 실험의 최종 도착지) 취리히 미술관에서 본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Le Garçon au gilet rouge>은 또 어떤가. <카드놀이를 하는 남자들>의 단순함에 강렬한 붉은색이 추가돼 있으니, 한눈에 봐도 매혹적이다. 그는 자화상도 많이 그렸는데, 사과를 그리는 것만큼이나 원통 형태를 구현하는데 자신의 얼굴이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잔은 대머리였다.
예전에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 <소송Der Prozess>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마치 1년 전에 썼다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현대적이구나. 물론 카프카의 작품이 현대적인 건 수많은 현대 소설가들이 카프카의 스타일을 흉내 내기 때문이다. 내겐 세잔의 그림도 카프카의 소설과 비슷하다. 처음 세잔의 작품을 보면 그 취향이 조금 소박하게 보이는데, 계속 보고 있으면, 그 세련미에 감탄하게 된다. 물론 그 세련됨은 현대의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세잔에게 영감을 얻기 때문일 터. 파리에 있을 때, 그림을 사고 싶어 벼룩시장을 여러 번 돌아다녔다. 꽤 공들여 딱 한 작품을 선택했는데, 액상프로방스를 그린 풍경화였다. 세잔의 화풍을 닮은 무명 화가의 작품. 아마도 집에 걸어 놓으려면 오랫동안 질리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잔의 기괴했던 취향은 현대의 주류가 됐다. 그는 처음부터 제멋대로 그림을 그렸고, 그 과정을 평생 추구한 결과, 스타일을 완성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