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라크루아에 경배를, 앙리 팡탱-라투르
인상주의 그림이 모여있는 오르세 미술관 5층으로 향하는 1층 좁은 통로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다.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의 <테이블 모퉁이Un coin de table>. 전시 위치가 관람하기에 좋은 곳도 아닌 데다, 작품 또한 단체 사진처럼 평범해서, 그냥 지나치려 했다. 다만 <테이블 모퉁이> 속 인물이 전부 실존했던 사람이라며, 특히 인물 이름과 직업을 적어놓은 설명을 보고 나니, 그림을 찬찬히 보고 싶어졌다. 그림 구석엔 시인 랭보Arthur Rimbaud와 그의 동성 연인 베를렌Paul-Marie Verlaine이 있었다. 학창 시절 봤던 영화 <토탈 이클립스>가 떠올랐고, 미소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던 랭보와 그림 속 랭보를 비교하며, 작품을 한참 더 응시했다. (둘의 싱크로율에 감탄하며) 그러니까, 팡탱 라투르의 작품 앞에 선 이유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라기보단,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어린 시절 봤던 영화의 추억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세 미술관 5층에 도착하면, 전시장 입구에 또 다른 단체 사진 그림이 있다. 누가 봐도 <테이블 모퉁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 같은 작가, 팡탱 라투르의 <바티뇰의 작업실Un atelier aux Batignolles>이다. 오르세 큐레이터들이 이 작품을 5층 입구에 걸어놓은 이유가 있다. 이 그림은 일종의 ‘인상주의 선언문’이기 때문. 그림 속 화가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다. 장소는 34번 바티뇰가에 있던 그의 스튜디오. 마네는 비평가 자카리 아스트뤼크Zacharie Astruc의 초상을 그리는 중이다. 아스트뤼크는 언론의 공격에서 마네를 지켜주던 몇 안 되는 평론가였다. 뒤엔 인상주의 시대를 연 주역들, 르누아르Auguste Renoir와 바지유Frédéric Bazille , 그리고 모네Claude Monet가 있다. 인상주의 예술을 지지했던 소설가 에밀 졸라Émile Zola도 등장한다. <바티뇰의 작업실>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예술적 지향점이 마네임을, 다시 말해 프랑스 미술계의 유리창에 돌멩이를 던진 마네를 기리는 방식으로, 전통 질서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런 이유로 <바티뇰의 작업실>은 오르세 5층 입구에 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흥미는 딱 여기까지다. 그림 속 인물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하는 재미. 박물관 유물을 보는 기분이다. 반면 그림 자체는 딱딱해서 매력이 없다. 마치 거사를 치른 뒤, 성공한 주역들이 의례적으로 찍은 단체 사진 같은 그림. 인물의 자세는 경직돼 있다. ‘여기 보세요’라고 외치는 사진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랄까. 라파엘로Raphael부터 내려오던 전통, 즉 초상화에 한 인간의 인생 혹은 인물의 관계를 그림에 담으려는 예술가적 야심이 이 작품에선 느껴지지 않는다. 딱딱한 건 구도만이 아니다. 화풍은 또 어떤가. 인상주의 선언문을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 고전적이다. 실험성이나 개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 그림을 의뢰한 사람은 누구인가. 팡탱 라투르는 왜 나다르Félix Nadar의 사진기로 찍었으면 될 작품을 굳이 그린 걸까. 무엇보다 그는 왜 자신을 그리진 않았던 걸까.
1874년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마네는 살롱에 출품하기 위해 인상주의 전시 참여를 거절했다. 팡탱 라투르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인상주의 전 대신 살롱을 선택했다. 팡탱 라투르는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그림을 배웠던, 엘리트 코스를 충실히 밟은 화가였다. 청년이 된 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전 걸작들을 모사했다. 그는 바티뇰에 모여 인상주의 작가들과 교류했지만, 프랑스 미술의 전통적 가르침, 고전주의 화풍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었다. 팡탱 라투르는 마네와 마찬가지로, 살롱 밖의 독립 전시는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가 같은 해 살롱에 출품한 작품 <꽃과 다양한 사물Fleurs et objets divers>을 보면, 그가 화풍은 물론이고 소재 측면에서도 인상주의 화가들과 너무나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는 애초부터 인상주의 그룹 예술에 큰 관심이 없었다.
팡탱 라투르의 전공은 정물화다. 역사화나 종교화에 비해 천시받았지만, 그럼에도 정물화를 좋아하는 팬층이 있었다. 특히 사진이 없던 시기, 대상의 정밀한 묘사 실력을 뽐내기에 정물화만 한 게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의 <산딸기 바구니Le Panier de fraises>란 그림이 있는데, 지금 프랑스인들은 이 그림이 해외에 팔려 가는 걸 막기 위해 성금 300억 원을 모을 정도로, 정물화도 꽤 많은 사랑을 받는다. 팡탱 라투르 역시 영국 팬을 꽤 거느린 나름 인기 화가였다. 그의 스타일은 마네가 그렸던 정물화와 비교해 봐도 차이가 난다. 평론가들에게 공격받던, 마네 특유의 대충 그리기-물론 인상주의 후배들이 예찬한 의도적 흘려 그리기-가 정물화에 반영됐다면, 팡탱 라투르의 꽃은 형태를 탐구하는 과학자의 작품처럼, 세밀하고 정확하다. 마네 스타일과 거리가 멀었던, 동시에 인상주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던 팡탱 라투르는 어쩌다 ‘인상주의 선언문’을 대신 쓴 것일까.
단서는 또 다른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5층, 인상주의의 유명작 사이에, 또 다른 단체 사진 그림이 있다. 실존했던 예술가를 그린 작품, 경직된 인물들. 팡탱 라투르의 작품, <들라크루아에 경배를Hommage à Delacroix>이다. 그림 가운데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주변으로 총 10명이 있다. 당대의 예술가와 평론가들인데, 주목할 인물은 그림 오른쪽에 있는 마네와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 그리고 그림 오른쪽 끝에 앉아있는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다. 들라크루아는 선에 갇혀있던 딱딱한 그림을, 자유분방한 색채로 해방시킨 낭만주의파의 거두였다,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던 작가들에게 들라크루아는 근대 예술의 출발점이었다. 10명의 인물 중엔 유독 존재감이 드러나는 인물이 있다. 검정 정장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흰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 바로 화가 팡탱 라투르, 본인이다. 두 번의 단체 사진엔 등장하지 않던 화가가, 이번엔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부각한, 화가 팡탱 라투르의 거대한 자아의식에 주목해 보자.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를 비롯, 르네상스 3 대장은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당시 그들은 교회 없이 생존할 수 없었다. 후원자는 필수였다. 종교의 힘이 쇠퇴하고, 국가가 권력을 이어받았지만, 예술가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술가의 자아가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예술가의 자격을 결정할 권한은 국가(시스템)에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바로 이런 외부의 권위에 저항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초상, 즉 예술가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가 아닌, 화가 자신이란 점을 강조했다. 바로 이 지점이 팡탱 라투르와 인상주의 그룹의 접점이었다. 들라크루아보다 자신을 더 두드러지게 그렸던 팡탱 라투르의 비대한 예술가적 자아는 주관적인 예술가적 정체성을 찾던 인상파의 투쟁이 반가웠을 것이다. 고전적 방식으로 정물화를 그리 건, 인상주의 방식으로 야외 풍경을 그리 건, 그들은 모두 예술가적 자부심을 지닌 직업 화가들이었다.
팡탱 라투르가 그린 단체 사진 그림은 하나 더 있다. 직접 본 적은 없는 <피아노 주변에서Autour du piano>. 오르세 미술관은 소장한 그림을 자주 교체하고, 때론 외부에 대여를 해주기 때문에, 여러 번 방문했지만, 이 그림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다른 3점에 비해 덜 유명하기도 하다. 그림 속 인물들이 덜 유명하기 때문이다. <바티뇰의 스튜디오>를 그리고 2년 뒤, 팡탱 라투르는 시인들을 모았고, 13년이 지난 후, 이번엔 음악가들을 그렸다. 그에겐 장르가 중요한 게 아녔다. 예술가적 진정성이 있다면, 모두가 그의 동지가 될 수 있었다. 팡탱 라투르가 그린 단체 사진 연작은 결국 예술가의 초상을 탐구했던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으며, 그 탐구 끝에 그는 예술가라는 직업적 자존감이 지닌 가치를 찾아냈다. 바로 이것이 인상주의에 동의하지 못하던 팡탱 라쿠르가 사진이 아닌 화폭에 인상주의 선언문을 대신 써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