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 베르트 모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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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가 수업 중 선생에게 성폭행당한 해가 1612년이었다. 젠틸레스키는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피해 회복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붓으로 대신 바로크적 복수를 시행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위 참조) 젠틸레스키의 비극은 그녀가 직업 화가가 되기 위해 지불한 큰 비용이었다. 약 200년이 흐른 뒤, 영국의 여성 소설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은 자신의 위대한 걸작 <오만과 편견>을 이렇게 시작했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오스틴은 여성에게 부과된 결혼 압박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을 통해 묘사했지만, 그녀 역시 노처녀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한 채, 미혼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흐른 프랑스,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여성 예술가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1874년 살롱을 거부한 화가들이 모여 전시회를 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전시를 통해 저항군이 되는 것. 그들은 전시회 이상의 사회 운동을 꿈꿨는데, 그들이 저항한 질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가가 통제하는 미술 시장의 전복. 화가들은 국가가 주관하는 살롱을 통해야만 미술 시장에 편입될 수 있었다. 살롱 출품이 곧 생계와 직결됐던 것. 또 다른 저항 대상은 미술학교의 가르침이었다. 독립 전시회를 열었던 반군은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를 통해 전수되는 앵그르Ingre와 들라크루아Delacroix의 화풍에서 벗어나려 했다.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프랑스 사회의 구질서에 도전한 셈이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도 저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미술계 저항군의 핵심 일원으로 최초의 직업 화가를 꿈꿨던 여성,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가 합류했다.
저항군의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인상주의 전시회에 몰려온 보수적 비평가와 관람객은 전시된 작품을 보며 격분했다. 특히 전시작 중 당시 미술계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작품은 세잔Paul Cézanne의 < 모던 올랭피아Une moderne Olympia>였다. 세잔은 마네Manet의 <올랭피아Olympia>를 오마주 했다. 이미 9년 전, 프랑스 미술계를 격분시켰던 문제작을, 세잔은 다시 꺼내 온 것이다. 그림의 완성도는? 비평가들의 눈에 비친 세잔의 작품은 테러리스트의 폭탄과 비슷했다. 마치 그들의 심미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잔은 ‘멋대로’ 그림을 그렸고, ‘스케치’라는 작품 부제에 걸맞게, 그림은 미완성 상태처럼 보였다. 모두가 <올랭피아>에 격분하느라, 그 옆에 전시된 그림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이를 본 한 미술인은 ‘분노가 가득한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을 봐야 하는 게 몹시도 안타깝다’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세잔의 <올랭피아> 옆에 전시된 작품은 바로 모리조의 <요람Le Berceau>이었다.
<요람>은 모리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모리조는 자신과 함께 미술 공부를 했던 언니, 에드마Edma Morisot가 요람에 누워있는 딸, 블랑쉬Blanche를 지켜보는 모습을 그렸다. 옆에 전시된 세잔의 그림 때문인지, <요람>은 한결 차분하고 정돈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세잔에 분노했던 평론가들도 <요람>을 두고 “우아함과 섬세함의 극치”라며 이례적인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이 눈(snow)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흰색의 탐구(빛에 따라 달라지는 흰색의 다양함)가 담겨있으며, 배경이 되는 커튼이나 드레스 하단을 보면 모리조의 상징, 자유분방한 붓질이 잘 드러난다. 함께 출품했던 <나비 채집>의 붓질은 더 거칠었기에, 모리조 역시 ‘그림을 끝맺기도 전에 붓을 놓아버린다’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답게 모리조는 순간의 생동감을 잡기 위한 ‘미완성 전략’을 계속 추구했다.
또 다른 출품작 <절벽 위에서On the cliff>는 아예 연필 선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수채화로 작업한 이 작품은 모리조의 큰 언니 이브Yves Morisot와 조카를 그렸다. 연필 선이 드러나 있기에 여전히 미완성처럼 보이고, 수채화를 사용해서 작품은 한층 더 가볍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모리조는 인상주의 전시에서 모네Monet나 세잔처럼 세게 비판받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 화가였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그림의 ‘가벼움’을 여성 화가가 지녀야 할 특성이라고 여겼다. 인상주의가 공격받던 지점, 즉 지나치게 밝은 색감, 자유분방한 붓 터치, 일상적인 소재, 형태의 모호함은 집에서 그림을 취미활동 정도로 여기는 여성 화가에겐 권장될 만한 특성이라고 본 것이다. 여성 직업 화가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평단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한 셈인데, 모리조 역시 이를 두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실제로 베르트 모리조와 언니 에드마가 미술 공부를 시작할 때,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당한 악기 연주와 그림 실력은 양갓집 규수가 익혀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직업 화가가 되는 일은 제인 오스틴도 상상할 수 없던 파격이었다. 무엇보다 여성은 때가 되면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여성은 전업주부가 될 테니, 모리조의 어머니는 딸의 미술 교육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베르트 모리조보다 더 뛰어난 미술 재능이 있었던 언니 에드마는 결혼하며 그림을 포기했다. (베르트는 언니 에드마의 그림 실력에 질투를 느끼곤 했다) <요람>을 다시 보자. 딸의 모습을 보는 언니의 표정이 어딘가 침울해 보인다. 재능을 포기한 언니를 보며, 화가 모리조는 자신이 느낀 안타까움을 언니에게 투영하지 않았을까. 여성의 결혼과 직업이 양립할 수 없다고 믿던 시대, 모리조는 언니의 우울한 표정을 통해 그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모리조는 언니와 다른 선택을 했다. <요람>을 그렸을 당시 모리조의 나이는 31살. 혼기가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모리조는 결혼 대신 인상주의 패거리와 어울렸다. 특히 인상주의의 정신적 지주, 마네는 모리조를 12번이나 그림 모델로 세울 정도로 모리조의 검은 눈을 좋아했다. 모델 작업을 위해 마네의 스튜디오에 자주 놀러 오면서, 모리조는 이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모네의 동생이자 모리조의 예술적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남자, 외젠 마네Eugène Manet였다. 모리조는 33살의 나이에 외젠 마네와 결혼했는데, 마네는 아내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전업 남편을 자처했다. 심지어 외젠 마네는 결혼 후에도 아내의 성 ‘모리조’를 지키도록 했다. 형의 영향 덕에 예술에 조예가 있어서였을까. 외젠 마네는 모리조의 탁월함을 한눈에 알아봤다.
결혼 후 마네는 아내의 매니저이자 비서를 자청했다. 아내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전시, 기획, 작품 운반, 액자 맞춤까지 모든 잡일을 도맡았다. 남편의 가장 든든한 지원은 야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운 것. 모리조의 그림을 보면 대부분 집안 정원이나 테라스에서 그린 작품이 많다. 당시 여성은 야외에 혼자 돌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 돌아다니는 여성은 매춘부로 오해받아 남성들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결혼 후 마네는 아내의 보디가드를 자처했다. 모리조가 얼마나 충실한 인상주의 화가였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젠느빌리에의 밀밭에서Dans les blés à Gennevilliers>이다. 인물에게 집중하는 대신, 모리조는 인물을 풍경 일부로서 빛과 색의 조화 속에 녹여내려 애썼다. 모리조가 과감하게 밀밭에 나가 작업을 할 수 있던 것도 남편 마네 덕분이었다. 배경이 된 거대한 밀밭이 남편, 마네가 소유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모리조의 든든한 뒷배, 외젠 마네는 안타깝게도 건강하지 못했고, 예순이 되기 전 지병으로 사망했다. 마네가 죽은 지 3년 후, 딸을 혼자 키우던 모리조도, 독감에 걸린 딸을 간병하다 병에 전염되고 만다. 결국 모리조는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된다. 외동딸 줄리Julie Manet가 16살이 되던 해였다. 모리조가 사망한 뒤 작성된 사망 신고서 직업란엔 ‘무직’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인상주의의 핵심 멤버였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녀를 직업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조에겐 저항 동지들이 있었다. 모리조는 피사로Pissarro와 함께, 개성 강하고 괴팍한 인상주의 작가들을 하나로 묶던 구심점이었다. 이에 동료들은 공식 문서상 ‘무직’이었던 모리조의 작품을 모아 모리조만을 위한 대규모 특별전을 준비했다. 멤버 중 가장 까칠했던 드가Degas는 직접 전시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후 그는 모리조의 딸 줄리의 후견인을 자청, 그녀를 딸처럼 돌봤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서 소장 중인 <부지발 정원의 위젠 마네와 그의 딸Eugène Manet et sa fille dans le jardin de Bougival>. 파리 근교 휴양지에서 딸과 놀아주는 남편을 그린 그림이다. 아마 모리조가 집에서 그림 작업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가장 자주 봤을 광경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딸과 놀아주는 남편의 모습. 모리조는 남편의 부성애를, 가장 사적인 순간을 통해 표현했다. 그것도 모리조적인 가벼운 붓 터치와 미완성된 마무리로. 세상은 그녀를 ‘무직’으로 규정했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전업 화가로 평생을 살았던 모리조의 일상이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했는지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젠틸레스키와 오스틴은 여성 예술가의 길을 외롭게 개척한 선구자들이다. 모리조 역시 그 노력의 연장선에 서 있는데,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에겐 든든한 저항 동료와 ‘전업 가사인’을 자처한 남편이 있었단 점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모리조의 조카사위 (큰 언니 딸과 결혼한) 폴 발레리는 “모리조의 특별함은 자신의 삶을 살 듯 그림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삶을 그리듯 살았다는 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요람>에서부터 <숨바꼭질Cache-cache>까지 모리조는 행복한 일상에서 어떠한 부담이나 압박을 벗어던진 채, 일기를 쓰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예술이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거나, 인생을 위해 예술을 포기하지 않은, 가정과 직업(예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삶, 이것이 바로 조카사위가 예찬한 모리조의 진정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