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의 소녀들, 오귀스트 르누아르
1879년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국가가 주관하는 전시회, 살롱전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르누아르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충격이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가 누구던가. 인상주의의 첫 전시가 열리기 1년 전, 모네Monet, 피사로Pissarro와 함께 살롱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무명 예술가 협회Société Anonyme’를 만들었고, 자신들에 대한 평단의 공격에 맞서 <인상주의자L'Impressionniste>라는 잡지를 제작했으며, “엄격함은 영혼을 잠식시킨다”며 프랑스 미술 교육을 강하게 비판하던 인물이 바로 르누아르 아니었던가. 인상주의의 핵심 멤버였던 그가 인상주의 전시를 버리고 살롱으로 돌아가다니, 가히 변절이라고 부를만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르누아르는 왜 살롱으로 다시 돌아간 걸까.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본 르누아르의 <불로뉴슢의 승마Promenade à cheval dans le bois de Boulogne>. 말을 타고 있는 모자를 그린 작품인데, 르누아르 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 그렸다는 점을 빼면, 인상주의보다는 오히려 신고전주의에 가깝다. 이 작품은 모네, 피사로와 함께 ‘무명 예술가 협회’를 만들던 해, 르누아르가 살롱 출품을 위해 작업한 그림이다. 르누아르는 마네, 드가와 달리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다. 그의 고향 리모주Limoges는 지금도 관광객들이 별로 찾지 않는,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도자기가 유명한 동네다)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지만, 성공의 길, 살롱전 출품은 번번이 실패했다. <불로뉴숲의 승마>는 당시 르누아르가 살롱 출품에 얼마나 절박했는지 보여준다. 가난한 화가가 감당하기엔 거대한 사이즈(가로/세로 2m가 넘는)의 화폭(비쌀 수밖에), 다비드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말, 절제된 어두운 색채까지, 르누아르는 살롱이 요구하는 웅장함을 충족하려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이번에도 출품에 실패했다. 계속해서 고시에 낙방하는 고학생. 그럼에도 르누아르가 미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친구들 덕분이었다. 또 다른 인상주의 화가 바지유Frédéric Bazille는 르누아르의 생계를 금전적으로 도왔다. 밥값, 술값을 내주는 고시 동기 같은 존재랄까.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의 자화상을 그려주며, 돈독하게 지냈다. 인상주의 전시 후에도 생계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땐 또 다른 부자 친구이자 인상주의 그룹이었던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구매하며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자존감이었다. 연이은 낙선에도 르누아르의 자존감을 지켜준 건, 모네였다. 모네는 르누아르에게,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세상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는 듯, 새로운 화풍을 소개했다. 르누아르 역시 대학에 떨어지는 건, 내가 공부를 못해서가 아닌, 입시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믿음으로,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 실험에 동참했다.
세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물랭드라갈레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가 출품됐다. 르누아르는 지금도 많은 화가와 관광객이 몰려드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열린 파티를 그렸다. 인상주의의 일원답게, 그는 빛의 효과가 만들어 내는 광경을 포착하려 애썼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의 옷과 얼굴을 얼룩덜룩하게 그린 것. 카바넬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처럼 매끈한 몸매 표현이 인정받던 시대였다. 빛이 떨어진 신사의 등 역시 얼룩이 묻은 것처럼 지저분하다. <물랭드라갈레트의 무도회>의 얼룩덜룩한 표현은 당연히 평론가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이 그림과 함께 출품했던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보면 르누아르는 모네와 함께 빛의 실험에 동참했음에도, 색채에 대한 관심, 인물에 대한 표현 등 모네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지향점을 대표작 안에 담아냈다.
카유보트가 <물랭드라갈레트의 무도회>를 구매했지만, 르누아르의 그림 판매는 여전히 시원치 않았다. 3차 인상주의 전시회의 성공은 훗날 학자들이 미술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었다. 르누아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새로운 후원자 샤르팡티에 부인Madame Georges Charpentier이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좋아했던 부인은 르누아르를 부르주아 사교 모임에 초대해, 상류층 인사를 소개했다. 구매력 있는 고객을 만나면서 르누아르도 자신의 인생 경로를 한 번쯤 고민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르누아르는 샤르팡티에 부인을 만나고 살롱전 참여를 결정(인상주의 참여를 거부)하며, 화상 뒤랑-뤼엘Durand ruel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 못한 화가의 진가를 알아보는 수집가는 파리에 15명 미만입니다. 살롱전에서 빛을 못 본 화가의 그림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8,000명이나 됩니다.” 지독한 가난은 결국 그를 살롱으로 이끌었다.
살롱전 출품작은 <사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Madame Charpentier et ses enfants>. 르누아르를 외면했던 살롱은, 이번엔 그를 환대했다. 그의 작품은 살롱전 명당에 걸렸고, 반응은 뜨거웠다. 한 비평가는 “이제 르누아르와의 불화는 끝내기로 하자.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라며 그를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르누아르는 오래간만에 받는 호평에 신났겠지만, 인상주의 동료들은 그의 변심이 쓰라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르누아르의 베프였던 모네는 친구의 결정을 존중했다. 모네 역시 가난한 예술가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르주아 드가Degas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대놓고 르누아르를 ‘변절자’라고 비난했고, 그를 인상주의 그룹에서 '제명'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이란 얼마나 고달픈 것인가’라며 르누아르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했던 피사로는 드가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줄리 마네와 고양이Julie Manet avec un chat>. 인상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딸이자, 마네Manet의 조카를 그린 초상화다. 따뜻한 컬러, 줄리의 얼굴에서 르누아르의 스타일이 느껴지지만, <물랭드라갈레트의 무도회>나 <그네>와 비교하면 다르다. 일단 줄리의 얼굴은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줄리의 얼굴 묘사 역시 르누아르의 실력을 생각하면 부자연스럽다. 변한 건 르누아르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그는 화풍에도 변화를 줬다. 당시 프랑스 미술의 질서였던 앵그르의 가르침, 즉 르누아르는 선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살롱 출품을 따뜻하게 감싸준 피사로마저, 르누아르의 화풍 변심을 두고 ‘그가 길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인상주의 일원이었던 줄리의 엄마, 모리조도 딸의 초상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르누아르 역시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며 이 작품을 그리던 시기, 자신이 슬럼프에 빠져있음을 암시했다.
살롱 전 출품과 신고전주의로의 회귀. 정녕 르누아르는 변절자의 길을 선택한 걸까. 그의 변절을 알기 위해선, 그가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특별 관람석La Loge>과 <파리의 여인La Parisienne>을 보자. 두 작품 모두 여인의 드레스를 표현한 방식은 마네의 화풍과 닮아있다. 드레스의 재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붓질을 거칠게 터치했지만, 두 여성의 얼굴은 모두 윤곽선이 분명하다. 또한 <파리의 여인> 속 드레스의 화려한 컬러나, <특별 관람석> 모델의 핑크빛 피부를 보면 처음부터 르누아르는 빛보다 여성의 아름다움, 이를 강조하기 위한 색채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싶던 화가에게, 빛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형태의 무너짐은 견디기 힘들었다. 실패를 견디기 위해 모네의 실험에 동참했지만, 사실 르누아르는 처음부터 목표가 달랐던 것이다.
집이 부유했던 마네와 드가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여행하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했던 르누아르는 살롱전 성공 이후에야 이탈리아를 처음으로 여행했다. 인물 초상에 관심이 많았던 르누아르는, 라파엘로Raphael의 작품을 보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림을 보고 “이 그림들에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다”며 감탄했다.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남부에서 인상주의에 회의를 느꼈던 세잔Paul Cézanne을 만나기도 했다. 세잔 역시 인상주의 실험이 점점 형태를 무너트린다고 생각하며 그룹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살롱전 출품 이후 경제적 여유를 얻은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토대 위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그 결과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은 르누아르의 걸작을 완성시켰다.
<피아노 앞 소녀들Jeunes filles au piano>.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다섯 가지 버전으로 그렸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에도 있고, 미국에도 한 점 있지만, 가장 유명한 버전은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이다. <피아노 앞 소녀들>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평생 추구한 르누아르 예술의 결정판이다. 인상주의 시절과 앵그르를 추종하던 시절이 절묘하게 뒤섞인 이 작품은 대상의 형태는 잃지 않으면서도 선은 흐릿하게 처리하여 두 인물 사이의 행복을 표현했다. 색은 더 밝아졌으며 분위기는 따뜻해졌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버전과 비교하면 오르세 버전의 탁월함을 더 잘 알 수 있다. 인상주의 시절의 유산이 더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느낌이다. 이 그림을 보고 에콜 데 보자르의 관계자는 국가가 이 작품을 사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4,000프랑에 팔렸다. 첫 인상주의 전시회 직전, 퐁네프를 그린 르누아르의 그림은 300프랑에 팔렸으니, 10년 만에 그림값이 10배 넘게 뛴 셈이다.
르누아르는 결국 가난과 세상의 무시 속에서 방황하다 자신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는 처음부터 부셰나 프라고나르처럼, 장식적이고 화려한, 동시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살롱 출품 직전 그렸던, 배우 <진 사마리의 초상>을 보면, 르누아르의 선택은 애초부터 예견돼 있었다. 그는 인상주의의 변절자가 아니다. “나는 순교자 역할을 맡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만일 살롱전에서 내 그림들이 낙선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림을 계속 출품했을 것이다. (중략) 나보나 나은 사람들이 나보다 앞서 해놓은 것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난 늘 그렇게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르누아르가 남긴 글을 보면, 인상주의의 선전부장으로 언론과 충돌했던 그가 얼마나 속으로 힘들어했을지 짐작이 간다. 결국 가난 속 방황 끝에 그는 <피아노 앞의 소녀들>에 도달했다.
"내게 한 폭의 그림은 사랑스럽고, 즐겁고, 예뻐야 한다네. 그렇다네, 예뻐야 해! 세상에는 이미 불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가 굳이 더 만들어낼 필요가 있겠나?" (르누아르가 한 말을 비평가 조르주 베송George Besson이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