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가는 어쩌다 그들과 어울렸을까

무용교실, 에드가 드가

by 알스카토

1.


애드가 드가Edgar Degas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과 달랐다. 대학 교양 수업 시간, 강사는 인상주의를 설명하며, 모네Monet, 르누아르Renoir 그리고 드가를 소개했는데, 드가의 그림 때문에 인상주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만약 모네, 피사로Pissarro, 시슬리Sisley를 묶었다면 더 쉽게 이해했을 것 같다) ‘이들은 빛을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을 포착하려 했어요’라고 강사는 설명했지만, 드가 작품 속 대상의 형체는 찰나를 포착했다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물론 화풍은 달랐지만, 드가는 인상주의 초창기 멤버였다. 조롱이 담긴 그룹명,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 드가는 ‘라카퓌신(La Capucine)’이란 그룹 이름을 제안했을 정도로, 초기 인상주의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인상주의의 첫 전시회가 열렸던 장소가 카퓌신 거리Boulevard des Capucines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 제안은 르누아르의 반대로 무산됐다.)


2년 전, 오르세 미술관에서 인상주의 첫 전시회를 재현한 특별전이 열렸다. 모네는 번화했던 카퓌신 거리의 인파를, 시슬리는 홍수 난 마을을, 피사로는 서리가 내린 시골 밭을 인상주의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출품했다. 그들은 야외를 그렸고, 빛의 변화에 주목했으며, 풍경의 형체를 흐릿하게 그렸다, 그렇다면 드가는? 앞으로 여러 번 그리게 될 소재, 다림질하는 여성을 출품했다. 목과 소매가 늘어진 옷을 입은 여성은, 오른손으로 강하게 다리미를 누르고 있다. 드가는 실내를 그렸고, 빛의 작용보단 파리 여성의 직업 탐구에 집중했으며, 대상의 윤곽은 선명하게 그렸다. 드가가 즐겨 쓰던, 파스텔로 그린 작품이었다. 때문에 인상주의 전을 혹평했던 비평가들도 드가의 작품엔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포트 마를리의 센강The Seine at Port-Marly> 시슬리는 인상주의 작가 중 물을 가장 잘 표현했다
카미유 피사로 <서리Hoarfrost>, 인상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피사로의 출품작이다
드가의 <세탁부Laundness>. 이 외에도 드가는 총 4편의 작품을 추가로 출품했다. 인상주의보다 쿠르베에 가까운 작품.

달랐던 건 화풍만이 아니었다. 드가는 인상주의 멤버들과 달리 부유했다. 어렵지 않게 입학했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를 자퇴한 드가. 당시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하면 미술학도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로마 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다비드David와 앵그르Ingres가 받았던 로마 상은, 당시 화가 성공의 지름길이었으며, 무엇보다 국가 비용으로 로마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드가가 미련 없이 자퇴할 수 있었던 건, 특유의 반골 기질도 원인이었겠지만, 그보다는 집안의 넉넉한 재산, 즉 ‘이탈리아 유학쯤이야 내 돈으로 가면 되지’ 같은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실제로 드가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을 공부했으며,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도 루브르에서 고전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실력을 키웠다.


2.

드가가 존경했던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파포스의 비너스 Vénus in Paphos>


모네, 르누아르 등은 마네의 스승이자, 당시 프랑스 미술 규범의 대표라 할 수 있던 쿠튀르Couture에 저항했다. 다비드와 앵그르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에 대한 찬미, 형태의 정확한 묘사와 구도의 엄격함을 쿠튀르는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러나 모네를 포함한 일군의 젊은 화가들은 가르침을 답답하게 여겼다. 드가는 달랐다. 드가는 앵그르를 존경했으며, 특히 여성의 인체를 묘사하는 거장의 솜씨에 감탄했다. 실제로 드가는 앵그르를 직접 만나, 자기 작품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앵그르는 ‘이보게 청년, 선을 그리게, 많은 선을.’이라는 충고를 전했다. 드가는 이 가르침을 평생토록 따랐다. 동시에 드가는 앵그르의 라이벌, 색을 찬미했던 들라크루아Delacroix의 화풍도 열정적으로 습득했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인 드가의 <벨릴리 가족La famille Bellelli>

드가는 앵그르에게 칭찬받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며, 실제로 1865년부터 매년 한 두 작품씩 살롱에 출품했다. 드가는 굳이 살롱에서 떨어진 ‘낙선전’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살롱에 출품했던 작품 중엔 이모 가족을 그린 걸작, <벨릴리 가족La famille Bellelli>이 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그림을 공부할 때, 드가는 벨릴리 집안에 머물렀다. 1858년 그리기 시작한 <벨릴리 가족>은 10년 뒤에 완성됐을 정도로 드가가 공들인 작품이었다. <벨릴리 가족>엔 드가의 가장 천재적인 재능, 즉 구도와 배치를 통해 이야기를 함축하는 능력이 잘 드러나 있다. 이모부는 등을 돌리고 앉아 가족을 쳐다본다. 이모 표정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보인다. 첫째 딸은 엄마의 품속에 푹 안겨있지만, 둘째 딸은 슬쩍 등을 돌린 아빠를 조심스럽게 쳐다본다, 가족들의 태도와 배치를 통해, 드가는 이모 부부 사이의 관계는 물론 벨릴리 가족의 불행한 집안 분위기를 응축적으로 담았다. (가정에 무관심한, 혹은 축출된 아버지, 어머니를 선택한 큰 딸, 아빠에 대한 연민이 있는 둘째 딸.)


이모의 표정을 통해, 벨릴리 부부의 결혼생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드가
부부 싸움 사이의 난처함을 보여주는 둘째 딸. 엄마 눈치 보느라 아빠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둘째는 아빠가 신경 쓰인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드가를 인상주의 그룹에 소개한 건 마네Manet였다. 프랑스 정규 미술 교육을 받던,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두 남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처음 만났다. 둘은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마르가리타 공주 Infanta Margarita>를 모사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네는 드가의 뛰어난 스케치 실력에, 드가는 마네의 도발적 화풍에 인상을 받고 가까워졌다. 당시 ‘모네와 친구들’은 마네의 화풍에서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었고, 마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그룹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마네는 드가에게 프랑스 미술 질서의 전복을 꿈꾸던 젊은 작가들을 소개했다. 살롱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면서도, 드가 역시 공장식으로 빽빽하게 그림을 전시한 뒤, 심사위원들이 등수를 매기는 살롱의 방식에 회의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왼쪽은 드가의 작품, 오른쪽은 마네의 그림. 둘 다 제목은 같다. <목욕통Tub>.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3.

드가는 마치 신앙심이 깊은 유물론자 같았다. 앵그르와 신고전주의의 엄격함을 추종하면서도, 인상주의 그룹이 추구하던 새로운 길에 동참했다. 모네와 르누아르가 존경하던, 그리고 드가를 인상주의에 소개했던 마네가 인상주의 그룹을 ‘패배자 무리’ 정도로 여기며 전시회 참여를 거부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드가는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고, <세탁부>, <발레 수업La Classe de danse>, 그리고 <시골 경마장Aux courses en province> 등을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선보였다. 물론 인상주의 첫 전시회에 걸린, 정제되지 않은 다양한 화풍을 보고 있으면, 모네 스타일의 전형적 인상주의 그림은 일부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첫 전시회에 참가한 화가들은, 인상주의 화풍의 추종이 아닌, 그저 관습적 질서에 저항을 표출하고 싶어 했다.

<시골 경마장Aux courses en province>
<발레 수업La Classe de danse>. 드가가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들. 전혀 인상주의 작품 같아 보이지 않는다

드가의 작품들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비슷하다. 연극적 면모를 강조한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위적 구도와 달리, 드가가 배치한 인물들의 모습은 스냅사진처럼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잘 드러나지 않거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뒤로 서 있는 식이다. 이러한 면모는 드가의 대표작 오르세 버전 <무용 수업La Classe de danse>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림 전면에 선 발레 댄서들은 뒤돌아 서 있고, 선생의 모습은 볼품없으며, 배경이 되는 댄서들은 별다른 동작하지 않는다. 마치 쿠르베의 사실주의 작품처럼, 특별한 것 없는 인물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스냅사진 같은 구도는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비드의 그림과 달리 드가는 관람객에게 자신만의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동시에 드가는 발레 댄서들의 동작을 통해, 앵그르 선생처럼 인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애썼다.


오르세 미술관 버전 <무용 수업La Classe de danse>. 비슷한 그림을 여럿 그렸다. 발레 선생은 당대 저명했던 인물. 하지만 그가 주인공은 아니다.
첫 전시회에 출품했던 또 다른 <무용 수업>. 역시나 등을 보이는 전경의 인물. 특히 어둠 속 신사를 그림으로써, 드가는 그림 속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와이드 한 화폭에 담긴 파격적인 구도. 드가는 과감하게 인물을 잘라냈고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Danseuses montant un escalier>


때론 인물을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그림 속 주인공은 꽃병. <꽃병 옆에 앉은 여인Femme assise près d'un vase de fleurs>


극단적으로 와이드 한 화폭에 담은 발레리나의 모습. 주인공을 화면 구석에 배치하고, 중앙엔 커다란 꽃병을 갖다 놓았던 드가의 파격적인 구도. 내게 드가는 파격 구도의 아이콘이었고,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드가 특별전이 열렸을 때, 이런 오해를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빌려온 작품, <마네와 그의 부인Monsieur et Madame Edouard Manet>. 마네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아내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마네 부인의 얼굴은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마네 부인의 얼굴을 가려, 관람객이 마네와 부인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한 드가 특유의 파격 구도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네 부인의 얼굴을 가린 건 드가가 아닌 마네의 짓이었다. 드가가 그린 아내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네가 칼로 아내 얼굴 부분을 도려냈던 것. 이에 드가는 격분했지만, 난 지금도 마네 덕분에 그 작품은 좀 더 드가다워졌다고 생각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2023년 열린 마네-드가 특별전

일본 기타큐슈 미술관이 소장 중인 <마네와 그의 부인Monsieur et Madame Edouard Manet> 드가라면 충분히 부인의 얼굴을 잘라낼 법한.

4.

마네의 스튜디오는 늘 북적거렸지만, 드가의 스튜디오는 썰렁했다. 사교적인 마네와 달리 드가는 괴팍했다, 인생 말년, 내성적인 드가가 더 외로워지게 된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한 유대인 장교가 독일군 스파이로 누명을 쓰게 된, ‘드레이퍼스 사건’, 프랑스를 둘로 쪼개 놓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 앞에서 드가는 평소에 갖고 있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주변 지인들은 드가를 떠났고, 그는 더 외로워졌다. 파리 뒷골목 여성, 발레리나, 여성 노동자를 주로 그린 드가에겐 반여성주의자란 꼬리표도 따라다녔다. 그림 속에서 드가가 여성을 표현한 방식, 혹은 모델의 머리를 4시간이나 빗겨줬다는 식의 일화에서 비롯된 평가였다. 드가도 이런 평가를 의식한 듯, ‘여자들은 나를 증오한다. 나에게 무장해제를 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네-드가가 나란히 그린, 카페의 취한 여인들. 만취한 여성을 바라보는 두 화가의 시선에 차이가 느껴지는가. 드가는 이번에도 여성의 공허한 표정을 포착해 냈다.

드가는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이고,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존경하던 미술 엘리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가는 굳이 인상주의 그룹에 합류할 이유가 없었다. 모네가 야외에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면, 드가는 앵그르의 가르침대로 풍경을 기억한 뒤, 화실로 돌아와 작업했다. 그는 고전주의 스타일대로 마지막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드가가 열등생들의 전시회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서는 그의 말년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드가가 발레만큼이나 열중했던 소재, 경마장. 드가는 1866년에 그린 <장애물 경주>를 약 30년이 지나 <말에서 떨어진 기수Scène de Steeplechase : Le Jockey Tombé>라는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 형태는 훨씬 단순해졌고, 색의 면들만 강조했다. 후배 세잔Cézanne의 작품과 비슷하달까. 마치 피카소Picasso와 브라크Braque의 출연을 예고하는 것처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말에서 떨어진 기수Scène de Steeplechase : Le Jockey Tombé>. 더 이상 사실적 정확성은 드가에게 중요하지 않다

루브르에서 마네와 함께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모사할 때, 드가는 마네의 어설픈 스케치에서 혁신적 면모를 발견했다. 자기 작품을 훼손한 마네를 미워하면서도, 드가가 마지막까지 마네와의 관계를 놓지 않았던 이유다. 오르세 미술관 5층에 있는 드가의 조각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발레리나 연작을 통해 탐구했던 신체의 묘사를 조각으로 표현한 건데, 무릎 앞에 접힌 타이츠의 재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다. 근대의 미켈란젤로인가. 결국 성공이 보장된 드가가 인상주의 무리와 어울렸던 덴, 새로움에 대한 드가의 집착이 있다. 관습적인 방식을 따르는 건 지루했다. 자신의 작업을 변주할 때 비로소 예술가적 희열을 맛본, 새로움에 대한 지치지 않는 추구. 그러니 살롱전 출품이 따분해졌을 즈음, 야심 가득한 젊은 예술가들을 만났을 때, 드가는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렇게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의 일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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