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
1.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인상주의나 모네 Oscar-Claude Monet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물론 모네와 마네 Édouard Manet를 늘 헷갈려하면서요. (프랑스 사람들도 헷갈리긴 마찬가집니다. 한 번은 살롱전 모네 그림에 감탄한 사람이 마네에게 칭찬을 건네는 일도 있었죠.) 인상주의는 미술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예술 운동이자 동시에, 현대 미술의 문을 연 획기적 시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보통은 여기서 예술가의 천재성을 생각합니다. 1984년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통해 예술적 천재성의 전형을 만들어냈는데요. 영화에서 예술가의 성실성은 있으나마나 한, 평범한 미덕 정도로 치부됐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 운동을 선두에 서서 이끈 모네의 삶은 천재성보다 성실성이 돋보인 여정이었으며, 미술사의 새로운 챕터를 연 인상주의 역시 저마다의 성실성이 모여 이뤄낸 성취라 볼 수 있습니다.
모네는 파리에서 가까운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아브르 Le Havre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풍자 초상화를 그려 용돈을 벌 수준의 재능은 있었습니다. 동네 표구상에 모네의 풍자화가 걸릴 정도로 유명해졌을 무렵, 모네의 재능을 알아본 한 무명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모네 최초의 스승이자 또 다른 인상주의 화가 부댕 Eugene Boudin입니다.
부댕이 모네에게 강조한 건 이랬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라.' 이를 위해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작업하길 권했습니다. 모네의 붓에 인상주의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죠. 모네는 선배들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해서 흡수했습니다. 모네의 첫 번째 도약, '흡수'입니다. 그가 선배들의 특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던 시기였습니다. 이후 모네는 용킨트 Johan Barthold Jongkind에게서 빠른 붓놀림을, 도비니 Charles-François Daubigny에게 야외에서 작업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익혔습니다.
2.
1867년 살롱 심사위원이 된 도비니의 입김으로 겨우 작품 하나를 출품한 걸 제외하면, 이후 화가 모네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살롱전에서 낙선을 하니,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그림이 안 팔리니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매번 '낙선' 딱지를 받는 일도 정신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결국 1872년 살롱전을 거부하고,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새로운 아이디어, 즉, 쿠르베 Gustave Courbet가 사실주의관에서 '화실'을 공개했던 방식으로, 독자적 전시를 열어보겠다는 생각을 시작했습니다.
모네는 르누아르 Auguste Renoir, 바지유 Frédéric Bazille, 시슬레 Alfred Sisley 등 같은 화실에서 공부했던 동문을 비롯, 자신의 스승 부댕과 용킨트를 초대했습니다. 마네는, 새로운 전시에 참여하는 게 자칫 무능한 집단의 일원으로 비칠까 우려해,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모네는 사진작가 나다르 Félix Nadar의 스튜디오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이 전시회가 미술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입니다. 모네가 1874년 첫 단체전에 전시한 열 두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고향 르아브르의 항구 풍경을 그린 작품인데, 모네는 부댕과 용킨트, 도비니에게서 흡수한 특성을 자신의 방식대로 뒤섞어, 변화하는 순간의 분위기를 포착했습니다. 밀레 등 바르비종파의 풍경화가 마치 순간을 포착한 스냅사진 같은 그림이었다면, 모네는 풍경의 변화하는 과정을 장시간 미속 촬영으로 포착한 동영상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특히 첫 전시회에서 유명해진 건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머물던 호텔 창가의 풍경을 그리고, 제목을 '르아브르의 경치'라고 할 순 없어서 일단 '인상이라고 하지 뭐'라고 대충 정했습니다. 그런데 전시회를 찾은 언론인 루이 르루아 Louis Joseph Leroy는, 전시회를 조롱하기 위해 모네의 그림에 빗대어 '이건 그림이 아니고 단지 인상일 뿐이다'라고 평했는데, 그의 비아냥 덕분에 오히려 인상주의는 이름도 얻고 불멸의 미술 운동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모네의 두 번째 도약은 '뭉침'입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예술 '운동'을 만든 게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한사코 전시 참여를 거부했는데, 이유가 있었죠.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 대부분이 살롱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패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가 피워낸 새로운 생각은 미약하고 섬세합니다. 외부의 공격에 쉽게 꺾이기 마련이죠. 그렇게 무수한 아이디어가 사장돼 갔을 겁니다. 용킨트와 도비니의 지지가 있었지만, 모네 혼자서 대상의 형태를 뭉개버리겠단 파격적 아이디어를 이어갈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쿠르베와 마네가 싸워서 다져놓은 터전이 있었고요.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시대정신이었습니다. 그 시대정신을 좇던 모네의 옆엔 그의 동료들, 르누아르, 드가 Edgar Degas, 피사로 Camille Pissarro, 시슬, 바지유, 모리조 Berthe Morisot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약한 예술적 아이디어를 보호해 줄 소중한 동료였습니다.
캔자스시티 애트킨스 박물관이 소장 중인 모네의 '카퓌신 대로'Boulevard des Capucines입니다. 당시 모네가 추구했던 예술적 지향점을 '인상 해돋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카퓌신 대로는 첫 번째 전시가 열린 나다르의 스튜디오가 있던 곳입니다. 모네는 파리의 근대적 풍경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근대적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생활양식은 모네의 눈에 낡은 예술이 새로운 예술로 대체되는 은유처럼 보였을 겁니다.
동시에 그는 인파를 완전히 뭉개버립니다. 왜냐면 인간의 시각과 대상 사이엔 빛과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그리고 싶었던 모네는 빛이 가한 형태의 왜곡을 묘사했습니다. '인상'과 마찬가지로 모네는 빛의 역동성을 담아내려 했고, 그 결과 장노출 사진처럼 형태는 흐릿해졌습니다. 역시나 인상주의의 적 루이 르로이는 이 그림을 두고 '내가 카퓌신 대로를 걸어갈 때, 저렇게 보인다는 건가? 결국 날 놀리는 거구만'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3.
소설가 헨리 제임스 Henry James는 신문 기고를 통해 인상주의 전시를 미국에 소개했고, 인상주의 암흑기 때부터 그들의 가치를 알아본 화상 뒤랑-뤼엘 Paul Durand-Ruel은 영리하게 모네의 그림을 미국에 홍보했습니다. 인상주의 그룹은 반목과 갈등 속에서도 8번의 단체전을 마무리한 뒤 흩어졌고, 모네는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즈음 인상주의는 모네의 '성실함'과 맞물려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모네의 세 번째 도약, '실험'입니다. 모네는 뒤랑-뤼엘에게 자신이 구상 중인 기획을 알렸는데요. 단일한 장면을 다양한 조건에서 반복적으로 그리겠다는 '연작 실험' 계획이었죠. 그 첫 번째 시도로 의붓딸을 모델로 '우산을 든 여인'La femme à l'ombrelle 연작을 그렸습니다. 자세와 구도가 비슷한 작품을 여러 번 그림으로써, 모네는 빛과 공기가 빚어내는 변화무쌍함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마치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며 가설을 입증해 내려는 방식과 비슷했죠.
'건초더미'Meules는 모네의 대표 연작입니다. 건초더미를 보면 모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농촌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삼았다는 건 '무엇을 그리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쿠르베와 마네가 미술 제도권과 '무엇을 그리느냐'를 두고 투쟁하며, 소재의 영역을 넓혔다면, 모네는 소재의 의미를 아예 없애버린 겁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모네의 관심 대상은 빛과 공기였습니다. 스냅사진이 아닌 미속 동영상을 찍었던 모네는 이제 자신이 촬영했던 동영상을 다시 연속 사진으로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순간성(instantaneity)라고 불렀던 특징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이 작업이야말로, 그의 첫 번째 스승 부댕의 가르침, '자연을 포착하라'를 완성시키는 기획이라고 모네는 생각했을 겁니다. 왜냐면 자연의 핵심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성에 있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루앙성당 Cathédrale de Rouen만큼 모네의 실험 욕구를 자극한 대상은 없었을 겁니다. 루앙대성당은 실제로 보면, 그 압도적 규모와 정교함에서 중세 사람들이 느꼈을 경외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엔, 사람들의 경외심을 끌어내 신앙의 권위를 강화하려면, 인간이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건물이 필요했을 텐데, 루앙대성당이 딱 그렇습니다. 건축물이라기보다 조각상에 가깝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입니다. (공사 기간만 400년)
돌이라는 불면의 소재로 온갖 정교한 조각을 빚어낸 중세의 성당이야말로 빛과 공기가 대상에 미치는 변화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소재 아니었을까요. 루앙을 방문하고 모네는 아내에게 '루앙 성당 맞은편에 아파트를 구하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겠지'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후 그는 같은 풍경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눈이 놓친 '순간성'을 더해갔습니다. 공기와 빛은 변화무쌍하니, 모네 입장에선 체력만 버텨줬다면, 수 천작의 다른 작품을 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연작 시리즈가 비싸게 팔리고, 모네는 미술계의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동시에 모네는 '저항 세력'에서 고갱 Paul Gauguin과 고흐 Vincent van Gogh의 그림을 악평하고, 쇠라 Georges Seurat가 함께한다는 이유로 단체전 참여를 거부하는 꼰대, '기존 질서'가 됐습니다. 하지만 명성을 얻어가던 1889년, 그는 사망한 마네의 '올랭피아'를 국가에 헌정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2만 프랑을 모금해 마네의 미망인에게서 올랭피아를 구매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인상주의 출품을 거부하고, 살롱의 인정을 원했던 마네였지만, 모네는 인상주의 성공에 마네가 끼친 영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겁니다. 기존 미술 질서와 싸워서 결국 생전에 승리를 맛본 인상주의 작가들에게 '올랭피아'는 저항의 시작이자 상징이었으니까요. 선배들의 유산을 받은 모네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세 번의 도약을 통해 미술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제 모든 예술가의 야심은 인상주의 운동을 따라가게 됐습니다. 모두가 인상주의 성공의 후계자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