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4.
풀밭 위의 점심이 불러온 마네의 스캔들은 예고에 불과했습니다. 낙선전이 끝난 지 2년 뒤, 프랑스 미술계를 뒤흔든 진짜 스캔들이 터진 건데요. (마네의 1차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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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는 ‘세상의 기원’을 통해 의도적으로 아카데미 미술의 전복을 꿈꿨지만, 정작 질서의 토대를 무너트린 핵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자신의 기질대로 그렸을 뿐인, 마네의 짓이었죠, ‘풀밭 위의 점심’이 남긴 스캔들로 낙선전은 중단됐습니다. 대신 1865년 살롱은 신인 작가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상당수가 이때 처음 살롱전 출품을 하는데, 마네 역시 2점을 출품했습니다. 문제가 된 그림은 보들레르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작품 ‘올랭피아’Olympia였습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여성 누드화가 어찌나 많은 관객을 분노케 했던지, 사람들의 공격을 피하고자 그림을 높은 곳에 따로 설치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당대의 분노를 현대적 감성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르세 미술관 학예사들은 관객을 1863년 살롱전 최고상을 받은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La Naissance de Vénus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같은 여성의 누드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선 카바넬의 그림은 신화입니다. 그러니 파리 신사들은 누드화를 보는 게 여자 몸을 훔쳐보는 일이 아닌, 신화 속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고상한 행위가 됩니다. 카바넬의 비너스는 혹시라도 그림 보는 신사들이 불편할까, 눈을 가리고 최대한 수동적 자세로 몸을 남성의 시선에 던집니다. 게다가 비너스의 몸은 너무 매끈하고 아름답습니다. 비현실적이죠. 이게 당시 미술계가 세운 누드화의 기준였습니다.
이제 ‘올랭피아’를 봅니다. 이 여성의 누드는 신화가 아닌, 파리 뒷골목 매춘부의 모습 같습니다. 즉, ‘올랭피아’의 이미지는 일종의 보도 사진인 셈입니다. 혹시 신화나 동방의 신비한 나라 이야기로 오해할까 봐, 마네는 흑인 하녀, 침대 아래의 검은 고양이, 모델이 머리에 한 꽃장식까지, 매춘부의 방임을 알려줄 단서들을 그림 속에 넣었습니다. 그 와중에 모델은 역시나 그림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 속 그 모델과 같은 인물입니다. 실제 인물이니 관객은 더 불편했던 겁니다) 게다가 올랭피아의 몸은 어찌나 사실적인지요. 색칠하다 실수로 검정이 묻어 들어간 것처럼 얼룩덜룩합니다. 카바넬의 비너스를 감상하던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마네의 붓질은 여전히 거칠었고, 원근법적 입체감은 무시됐습니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 소재를 티치아노 Tiziano Vecelli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ere di Urbino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마네는 자신의 특기, 고전을 자신의 방식대로 현대화하는 능력에 감탄하며 그렸을 겁니다. 따라서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때와는 규모가 다른 비난과 비판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한 평론가는 ‘풀밭 위의 점심’에서 보여줬던 마네의 전복성마저 올랭피아에선 사라졌다며, ‘여기 보이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주의를 끌려는 욕망뿐’이라며 혹평했습니다. 보들레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마네를 비난했고, 계속된 악플에 시달린 마네는 결국 스페인으로 긴 여행을 떠나고 맙니다.
마네에게 스페인은 치유의 장소였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모사할 때부터 마네는 엘그레코 El Greco,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고야 Francisco Goya 같은 스페인 화가를 흠모했고, 실제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뒤 스페인 무희를 그려 살롱에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마네는 1년 뒤, 다시 살롱에 도전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결과는 낙선이었죠. 이때 출품작은 ‘피리 부는 소년’Le Fifre. 마네는 살롱의 냉대가 억울했겠지만, 이 그림에 내재한 급진적 면모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이 고민한, 그림 속 입체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2차원적의 평면적 이미지를 구현한 그림이었으니까요. 한마디로 미술의 오랜 전통을 한방에 뒤집는 불온한 작품을 내놓은 거죠. 결국 ‘피리 부는 소년’은 현대 미술의 문을 열었지만, 정작 살롱 인정을 원했던 마네에게 그림의 미술사적 의미는 큰 관심 대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5.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드가 기획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기획전은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지 않은 그림을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직전 기획전은 노르웨이 화가 뭉크 Edvard Munch였죠, 마네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 특별전을 한다는 게 어쩐지 안일하고 나태한 기획처럼 느껴졌었습니다. 하지만 기획전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마네의 그림은 상당히 많았고, 스타일도 다양했습니다. 심지어 성경이나 신화를 그린 작품도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고전적 분위기의 그림 같은데요. 살롱의 인정을 갈구하며, 세상의 기준과 자기 지향점과의 타협을 보려 했던 마네의 갈등이 그림 속에 묻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획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로슈포르의 탈출’L'Évasion de Rochefo이었습니다. 마네가 인생 후반부에 그린, 역사화입니다. 1870년 비스마르크에게 완패한 나폴레옹 3세는 황제에서 쫓겨나고, 빈자리를 노동자의 정부 ‘파리 코뮌’이 채웁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금방 무너지게 되는데, 그림 속 주인공 로슈포르는 파리 코뮌의 정치인이자 좌파 언론인이었습니다. 파리 코뮌이 붕괴하면서, 로슈포르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로 귀양을 갔지만, 그곳에서 극적 탈출에 성공합니다. 탈출의 순간을 그린 마네. 보들레르가 마네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것처럼, 마네 역시 기존 질서에 저항했다 유배 간 정치인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겁니다. 결국 저항이 자유로 이어지는 로슈포르의 이야기를 보며 마네는 자신의 험난했던 인생을 위로하며, 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요.
소설가 줄리언 반즈는 마네와 인상주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에즈라 파운드는 자기가 어느 집 앞쪽의 창문에 벽돌을 던지면 TS 엘리엇이 그 틈을 타 뒷문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훔쳤다고 했는데, 이는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미술의 경우, 벽돌은 마네가 던지고 부당이득을 챙긴 쪽은 인상파 화가들이란 느낌이 든다.’ 마네는 제도권의 진입을 갈구했지만, 타고난 급진성이 화가의 삶을 험난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마네가 남긴 유산들, 특히 그의 빠르고 거친 붓놀림은 훗날 인상주의 그룹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오르세 미술관이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을 수 있던 건, 마네의 자유분방한 반골 기질이 큰 몫을 차지한 셈이죠.
프랑스의 전통적 미술계도 알았을 겁니다. 미술의 질서를 부수겠다고 덤볐던 쿠르베의 자기애도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미술의 질서를 하나둘 해체한 마네의 자유분방함이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죠. 그가 죽기 1년 전, 그와 친했던 앙토냉 프루스트 Antonin Proust가 미술부 장관이 된 후, 마네는 그가 꿈꿨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됩니다. 그의 말년작 ‘폴리제르의 바’Un bar aux Folies Bergère가 살롱의 좋은 자리에 전시되는 영예와 함께 말이죠. 그가 평생 받았던 조롱과 비난을 생각하면 사소한 보상에 불과했겠지만, 미움받을 용기가 없던, 사교적이고 유쾌했던 마네 입장에선 이만하면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