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점심, 에두아르 마네
1.
다시 이야기의 시작은 살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쿠르베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살롱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의 제자를 입선시키기 위해 경쟁했으며, 일부는 은밀한 봉투를 건네며 전시장의 좋은 위치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낙선의 쓰라림은 더 커졌습니다. 낙선작엔 거절(Refuse)을 의미하는 R이 캔버스에 찍혔는데, R 낙인이 찍힌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용킨트 Johan Barthold Jongkind라는 화가는 선판매했던 그림이 낙선하자, 구매자에게 환불을 해줬을 정도였으니까요. 살롱의 인기가 치솟는 와중에, 1863년 살롱을 앞두고 파격적인 조치가 발표됐습니다. 화가당 출품작 수를 3점으로 제한한 겁니다. 분노한 화가들은 국무장관 발레스키 백작을 찾아가 항의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결국 1863년 살롱엔 약 3,000명의 화가가 5,000여 점의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여기서 충격적인 일은 또 벌어집니다. 출품작 중 무려 60%, 약 3,000점을 낙선시킨 겁니다. 화가들은 다시 국무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는 한편, 민간 전시업자들을 만나 낙선작의 개별 전시를 모색했습니다. 1863년의 대규모 낙선은 프랑스 문화계의 스캔들이 됐습니다, 결국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낙선작을 직접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권위가 걸린 문제니, 심사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 이에 나폴레옹 3세는 대안으로 살롱 개막 2주 뒤, 낙선한 작품을 모아 별도의 전시를 지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낙선전’Salon des Refusés입니다.
심사위원들이 황제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건, 나름 그들만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살롱의 심사 기준을 대중에게 공개해서, 화가들의 불평이 타당하지 않음을 확인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이런 계산을 화가들도 알았습니다, 낙선전 개최 결정 직후 600점 넘는 그림이 낙선전 출품을 포기한 이유였죠. 도록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어설픈 전시,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계산은 엇나갔습니다. 낙선전 개막 당일부터 엄청난 군중이 모이더니, 일요일엔 하루 4,000명의 방문객이 낙선전을 찾기도 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한 낙선전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그림, 나폴레옹 3세 황제에게 ‘품위에 어긋난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황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논쟁작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의 ‘풀밭 위의 점심’ Le Déjeuner sur l'herbe입니다.
2.
지금은 대중문화나 광고에서 여러 번 패러디 돼, 신비롭기는커녕, 미술 클리셰의 대표작이 됐지만, 공개됐을 당시 ‘목욕’이란 제목을 달았던 ‘풀밭 위의 점심’은 말 그대로 분노 유발자였습니다. 물론 16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르세 미술관의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이 됐죠. 미술 애호가가 아닌, 파리 여행자에게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은 쉽게 건너뛰기 힘든 여행 장소지만 동시에 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바로 5층으로 올라가라는 조언을 받게 됩니다. 유명한 인상주의 작품 대부분이 5층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착한 5층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그림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입니다.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성이 벌거벗은 여성과 숲에서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뒤에는 속옷 차림의 또 다른 여성이 연못에서 몸을 씻고 있죠. 벗은 옷가지, 음식, 바구니 등이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쿠르베 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기원’은 지금 봐도 파격적인 작품이지만, ‘풀밭 위의 점심’은 평범해도 너무나 평범합니다. 마네는 사실 소재를 찾는 실력은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그림을 자주 모사했고, 때론 과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하는 예도 많았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Tiziano Vecellio의 ‘전원 음악회’Le Concert Champêtre의 설정, ‘두 명의 누드 여성과 옷 입은 남성이 전원에서 즐겁게 보낸다는 상황을 마네가 빌린 거죠.
나폴레옹 3세를 비롯해, 많은 비평가는 왜 마네의 그림에 격분했던 걸까요. 일단 남자들은 옷을 입고, 여자는 옷을 벗은 설정 때문입니다. 퇴폐적이라는 의미였죠, 마네는 억울했을 겁니다. 티치아노는 괜찮고, 자신은 왜 안 되느냐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두 그림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이탈리아 시에서 영감을 받은, 고대 그리스 아르카디아 목동의 이야기입니다. 티치아노는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그림, 즉 허구를 그렸습니다. 관람객도 옷 벗은 여성과 옷 입은 남성을 보며 허구 속 이야기를 떠올렸겠죠. 하지만 마네의 그림은 쿠르베의 사실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입니다. 옷 벗은 여자와 옷 입은 남자의 모습은 19세기 파리 뒷골목에서 벌어지던 매춘을 떠올리게 했을테니, 관람객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죠.
마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로 옷 벗은 여성이 관람객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거죠, 이게 왜 불편했을까요. 전날 밤 룸살롱에서 술집 여성들과 퇴폐적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회의 점잖은 일원으로 돌아온 남성을 상상해 봅시다. 다음날 일터로 돌아온 남자에게 전날 밤 룸살롱의 난봉꾼은 숨겨야 할 비밀 정체성일 텐데, 누군가가 그 비밀 정체성을 자꾸 끄집어내려 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풀밭 위의 점심’ 속 모델 빅토린 뫼랑(Victorine-Louise Meurent의 시선이 의미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점잖은 척하는 파리 신사들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위선을 일깨우는 겁니다. ‘전날 밤 당신도 이러고 놀지 않았나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소재만 문제였던 게 아녔습니다. 평론가들은 배경의 무성의한 마무리에도 분노했습니다. 실제로 신고전주의 작가들의 꼼꼼한 묘사를 생각하면, ‘풀밭 위의 점심’ 속 배경은 거친 붓 터치로 마무리를 하다 만 느낌이 듭니다. 원근법은 또 어떤가요? 속옷을 입고 몸을 씻는 여성은 원근법을 적용하면, 비현실적으로 큰 거인이 됩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너무나 크게 그려놓은 거죠. 마네는 신고전주의파라고 하기에는 대상의 윤곽선을 지나치게 단순화했고, 낭만주의파라고 하기엔 색을 흐리멍덩하게 사용했습니다, 형식과 내용 모두, 당시 심사위원에게 ‘풀밭 위의 점심’은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3.
마네는 미술의 기준을 왜 무시한 걸까요? 그건 마네의 기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네는 부유한 파리의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법무부 고위 관료였던 마네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관이 되길 바랐지만, 마네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미술 아카데미, 토마 쿠튀르의 제자가 됩니다. 마네에겐 타고난 자유분방함이 있었습니다. 법관이 되기도 싫었지만, 동시에 쿠튀르가 가르치는 대로 그리는 것 또한 따분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861년 마네는 ‘스페인 가수’"Le Chanteur Espagnol란 작품으로 처음 살롱전을 경험합니다. 이 작품 또한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묘하게 뒤섞인,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이었습니다. 당시 롤모델을 찾던 젊은 화가들은 이 작품에 열광했는데, 그중엔 미래의 인상파 화가도 있었습니다.
마네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나와, 당시 젊은 화가들의 총사령관을 자처한 쿠르베의 화실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쿠르베 무리와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마네 입장에선 쿠르베의 반항 의지가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쿠르베 주변의 시골 혹은 노동자 출신과 어울리기에 마네는 너무 부유했고, 동시에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는 선술집이나 카페에서 미술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기보단, 대로변의 화려한 카페에서 상류층의 유흥을 즐겼습니다. 인상주의 후배들과의 관계도 비슷했습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마네를 멘토로 모시며 인상주의 일원으로 초빙하고 싶어 했지만, 마네는 단 한 번도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후배들을 좋아했지만, 특정 스타일을 내세워 운동을 만들려는 분위기를 마네는 부담스러워 했던 겁니다.
쿠르베와 비교하면 마네의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시골 출신의 쿠르베는 계산된 반항으로 프랑스 미술을 바꾸고자 했던 ‘관종’였습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프랑스 미술계에 파문을 일으켰죠. 반면 마네는 자신을 저항군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 비슷했죠. 마네는 살롱 입상을 통해 명성을 얻고, 앵그르나 들라크루아처럼 레지옹 도뇌르를 받게 되길 바랐습니다. 제도권 내의 성공을 꿈꿨던 마네에게 인상주의 전시회는 루저들의 자기 위안 정도로 여겨졌을 겁니다. 자신에게 환호하던 인상주의 후배들에게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이 쿠튀르의 제자임을 밝혔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쿠르베와 달리, 마네에겐 계산되지 않은 반항, 내면의 타고난 불온함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비난받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네의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였습니다. 마네보다 11살 많았던 보들레르는 당시 쿠르베의 계산된 반항에 조금 지쳐있었는데요. 어느 문인보다 시각적 예민함을 갖고 있던 보들레르는, 본인 스스로 프랑스 문학계의 전통과 싸우며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들레르는 마네의 그림에서 자기 모습, 즉 시대의 낡은 질서와 싸우는 고독한 천재의 모습을 발견했던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들레르는 마네의 ‘나약한 성격’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편지로 ‘마네는 절대로 자기 기질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할 걸세. 하지만 그에게는 기질이 있네. 그게 중요한 거야’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마네의 스캔들은 사실 이게 끝이 아녔습니다. 2년 뒤 벌어질 사건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예고에 불과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마네가 프랑스 미술계에 던진 진정한 핵폭탄급 사건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