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가장 오만한 사람

화실(화가의 아틀리에), 구스타브 쿠르베

by 알스카토

1.


토마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인들'


오르세 미술관의 중앙엔, 루브르박물관에 있을법한 고전적인 대형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토마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인들 (Les Romains de la Decadence)'입니다. 만취한 로마인들의 파티를 그린 그림인데, 낮부터 시작한 술자리가 밤새 이어져 모두가 망가진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조각상에 술을 권하는 만취자가 있을 정도로 엉망인 파티입니다. 그림 왼쪽엔 혼자 멀쩡한 정신 상태로 이성 잃은 사람들을 외면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의 존재 덕에 이 작품은 교훈적인 분위기를 띄게 됩니다. 마치 '이렇게 흥청망청 놀면 되겠느냐. 19세기의 프랑스인들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쿠튀르는 루이 필리프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는 은유로, 로마 말기의 파티를 가져왔습니다.


조각상에 술을 권하는 만취자
타락을 씁쓸해하는 멜랑콜리한 젊은 남성

쿠튀르는 화가이자 동시에 다비드와 앵그르가 세운 미술 규범을 후대에 전달한 교육자였습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의 제자였죠.) 그는 인물을 그리스 조각상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 스케치 기술, 그림 속 많은 인물을 안정적으로 배치하는 구도 능력, 역사의 일화를 통해 현재에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내용적 깊이까지, 당대의 좋은 미술이 갖춰야 할 모든 기준을 '타락한 로마인들'에 담아냈습니다. 이를 통해 미술 선생님이었던 쿠튀르는 젊은 화가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창시자들, 레오나르도다빈치나 라파엘로처럼 그리라는 것이었죠. 실제로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Scuola Di Atene)은 많은 인물을 안정적 구도로 담아낸, 구성의 정답 같은 그림인데, 쿠튀르 역시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의 방식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오르세 미술관 중앙에 걸린 쿠튀르 작품의 위용은, 당시 화가들이 따라야 했을 시대의 질서가 얼마나 견고했는지 느끼게 해 줍니다. '타락한 로마인들'같은 압도적인 작품 앞에서 누가 감히 쿠튀르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1792년 살롱에 심사가 도입된 이후로, 살롱의 기준은 점점 더 미술학교, 에꼴 데 보자르의 가르침과 같아졌습니다. 또한 미술계의 전통적 후원자이자 고객이었던 교회의 힘이 줄어들면서, 화가들은 국가의 인정 없이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기존 화풍의 강고한 성벽을 무너트리기 위해선, 아주 특별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가령, 세상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괴짜 영웅.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아주 투철한 그런 인물 말이죠. 그리고 1855년, 프랑스 역사에 남을 중요한 해에, 전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괴짜 영웅이 등장하게 됩니다.


2.


상처 입은 남자


오르세 미술관의 사실주의 방에 걸려있는 한 남자의 자화상, '상처 입은 남자'(L'Homme blessé)입니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지만, 표정만큼은 고요합니다. 마치 이 정도의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분한 태도, 심지어 자신의 부상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그림은 자화상입니다. 그림의 모델이자 주인공,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 Courbet입니다. 쿠르베는 애초 연인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뒤, 마치 오늘날 헤어진 연인의 얼굴을 사진에서 오려낸 것처럼, 여인의 모습을 지우고, 혼자 남아 어색한 자신의 포즈를, 상처 입은 모습으로 둔갑시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시골 오르낭에서 태어난 쿠르베가 파리로 건너와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한, 나름의 출세작이었습니다.


화가의 자화상/가죽벨트를 한 남자

스무 살 때 파리로 온 쿠르베는 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모사하며 미술 실력을 키웠습니다. 이때만 해도 쿠르베의 롤모델은 바로크 화가, 이탈리아인 티치아노였습니다. 또 다른 자화상 '가죽 벨트를 맨 남자'(L'homme a la ceinture de cuir)는 티치아노의 '가죽 장갑을 든 남자'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데요. 실제 본인의 외모를 미화하여 그린 이 작품 속 쿠르베는 가죽벨트를 손에 쥐고 정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곤 없는 얼굴처럼 보입니다.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이죠. '상처 입은 남자'의 순교자적인 표정은 자신감을 넘어, 과도한 자기애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치 세상의 규범과 질서에 저항하다 상처받고 쓰러진 모습,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사랑하는 전형적인 낭만주의 자아의 모습이랄까요. 쿠르베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였습니다. 그리고 쿠르베의 과도한 자기애는, 그가 멈추지 않고 파리의 미술 질서에 저항할 수 있게 만든 핵심 연료였습니다.


그의 자기애가 본격 궤도에 오른 해는 1855년입니다. 1855년은 프랑스에겐 특별한 해였습니다.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기 때문이죠. 프랑스는 산업 문화적으로 유럽의 최강국임을 자부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만국박람회 개최를 4년 전, 영국에 빼앗겼습니다. 당시 황제에 취임한 나폴레옹 3세 입장에선 새로운 시대를 자축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런던 박람회보다 크고 화려한 국가적 이벤트가 필요했습니다.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은 파리가 런던보다 앞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특별 살롱전을 위한 예술박람회 전시관이 세워졌고, 28개국 화가들이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빛낸 건 프랑스 화가들이었습니다. 살롱을 ‘그림 가게’라고 비하하고 20년 넘게 살롱전 출품을 거부한 앵그르는 40점의 그림을 출품했고 들라크루아도 회고전 느낌으로 35점을 출품했습니다. 그 외에도 카바넬, 쿠튀르, 부그로 등 당대의 프랑스 대표화가들이 총 출동했습니다.


루브르박물관 나폴레옹 3세 아파트. 외국 대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나폴레옹 3세가 얼마나 과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줍니다. 1855년 만국박람회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겠죠.


하지만 1855년 살롱 전시회를 역사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쿠르베였습니다. 그는 그림 두 점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전시 거부를 당합니다. 이에 쿠르베는 자비를 들여 특별 전시관 바로 옆에 ‘사실주의관’을 세웠습니다. 이곳에 거부당한 자신의 그림 2점을 포함, 살롱전에 낙선한 그림 50점을 함께 전시했습니다. 사실주의관을 세운 건 쿠르베가 프랑스 미술계에 던진, 일종의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는 사실주의 전시를 두고 ‘나는 자유를 얻고 있다. 나는 예술의 독립을 지키고 있다”라고 썼는데요. 그림을 그리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미였죠. 동시에 사실주의 전시는 프랑스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려던 홍보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자기애 강한 ‘관종’ 쿠르베다운 전략이었죠. 호기심 많은 들라크루아는 사실주의관을 찾았지만, 사실 쿠르베의 야심 찬 기획은 흥행에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쿠르베가 출품한 그림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프랑스 미술에 재앙이 될 이런 그림은 꼭 막아야 했다’라는 기록을 남겼고, 시인 보들레르는 사실주의 전시를 두고 ‘무장 폭동의 난폭함 그 자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직 시대는 쿠르베의 혁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왕자병’ 쿠르베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전진했습니다.


3.


화실-‘내 예술 인생에서 7년이라는 한 시기를 규정하는 알레고리


그렇다면 쿠르베가 거부당한 문제의 작품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그림이었기에 ‘재앙’ ‘무장 폭동 같은 거친 평가를 받았던 걸까요? ‘내 예술 인생에서 7년이라는 한 시기를 규정하는 알레고리’라는 긴 부제가 붙은, ‘화실’(L'Atelier du peintre)입니다. ‘화실’의 그림 크기는 정말 거대합니다. 쿠튀르의 작품과 맞먹는 사이즈인데, 작품을 자세히 보면 뭔가 좀 어수선합니다. 가운데 화가와 모델이 있고, 양옆에는 화실에 있지 않을 법한 온갖 군상이 모여있습니다. 쿠튀르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구도부터가 불안정합니다. 그림의 윗부분은 쓸데없이 텅 비어있습니다. 마치 그리다 대충 색칠해 버린 느낌마저 듭니다. 자세히 뜯어보면, 천국과 지옥이 나오는, 세 폭짜리 중세 종교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요. 그림 오른쪽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예술적 소양이 있는 친구들, 왼쪽엔 미술엔 관심이 없는 세속적인 인간들, 그리고 종교화에서 그리스도나 마리아가 있는 위치에는 화가, 쿠르베가 있습니다.


화실에서 누드모델을 세워 놓고 자신의 고향 오르낭의 야외 풍경을 그리고 있는 화가 쿠르베

가운데 위치한 화가, 쿠르베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점이 몇 개 있습니다. 화가 옆엔 누드모델이 서있지만, 정작 화가는 인물화가 아닌, 풍경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장소는 야외가 아닌 실내입니다. 그러니까 화가는 모델을 세워두고 실내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셈인데요. 사실 쿠르베가 세 폭의 종교화 구성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은 것도, 얼핏 이해가 안 되는 은유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실내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세상을 창조하는 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겁니다. 쿠르베는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1855년, 사실주의관 전시를 치밀하게 계산했는지 모릅니다. 살롱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하지만 새로운 예술적 자유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야심을 담아낸 작품을 그린 뒤, 그 그림을 통해 본인의 사실주의 선언을 전 유럽에 외친 셈인 거죠. 이 얼마나 넘치는 자신감입니까.


오르낭의 매장


쿠르베의 기획의도는 ‘화실’의 규모에서 두드러집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때문에 큰 화폭에 그려진 작품은 보통 중요하고 의미 있는 소재, 예를 들면 나폴레옹 황제의 취임식이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 같은 순간을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이런 관행을 부수려 했던 겁니다. ‘화실’과 함께 사실주의관에서 전시된 또 다른 쿠르베의 대작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을 보면, 쿠르베의 의도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대형 파노라마 사이즈에 그려진 이 작품의 소재는 지극히 평범합니다. 이름 모를 한 평민의 장례식을 그린 건데요. 매장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와 매장에 참여한 조문객, 그 누구도 익명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죽음을 그린 것도 놀라운데, 등장인물의 태도 또한 진지함을 찾기 힘듭니다. 쿠르베는 평범을 넘어 저속하기까지 한 시골의 일상을 나폴레옹 황제의 즉위식 그림 크기로 그려낸 겁니다. 이를 통해 그는 ‘대작의 저속화’를 시도했습니다. ‘오르낭의 매장’ 속 쿠르베의 마지막 한 방은 오른쪽 구석에 있습니다. 바로 수캐죠. 저속함에 저속함을 더하는 쿠르베의 장치랄까요.

암캐도 아닌 수캐를 굳이 그려 넣은 쿠르베의 디테일


오르세 미술관의 중앙엔 대형 그림 3개가 함께 전시돼 있습니다. (전시 작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하나는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인들’입니다. 그 그림과 마주 보는 위치에 걸려있는 그림은 쿠르베의 ‘화실’입니다. 오르세 미술관 큐레이터의 의도가 느껴지시나요? 앵그르의 후계자를 자처한 쿠튀르와 그가 세운 강고한 미술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쿠르베의 그림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해 놓은 겁니다. 그리고 ‘화실’ 바로 옆에 또 다른 대작, ‘오르낭의 매장’을 걸어놓았죠. 사실주의 전시는 1855년 당시엔 흥행과 비평 측면에서 실패했지만, 쿠르베의 전략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대성공이었습니다. 미술 비평가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브론치노의 알레고리 그림처럼, 훗날 평론가들은 ‘화실’을 보며 그림 속 인물의 의미와, 쿠르베가 심어놓은 다양한 은유를 추측하기 시작했고, 쿠르베도 조금씩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계획대로 쿠르베는 '사실주의'라는 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는 기가막힌 표현과 함께말이죠.


나르시시즘이 느껴지는 쿠르베의 작품

소설가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과도한 자기애를 계산된 마케팅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쿠르베를 두고 ‘자신이 넘지 못할 경계를 잘 알고, 또 격분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공인된 반항아의 자질이 다분했다’고 평가했죠. 실제로 쿠르베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중, 프랑스군 대포 하나를 골라 ‘쿠르베 Le Courber’란 이름을 붙인 뒤, 그 대표를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알릴 기회를 늘 엿봤기 때문입니다. 레지옹도뇌르 훈장도 상당히 받고 싶어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훈장 수여를 거부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 했던 거죠. 1870년, 결국 훈장 수여 기회를 받게 된 쿠르베는, 준비했던 것처럼 ‘영예는 직함이나 훈장 리본이 아닌, 행동과 그 동기에 있다’는 말과 함께 훈장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쿠르베가 관종 마케팅을 했다 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결국 쿠르베의 자기애 덕분에 견고했던 살롱의 벽에 금이 갔고, 약해진 벽을 쿠르베의 후배들인 인상주의 화가들이 무너트릴 수 있었던 거니까요.


쿠르베의 사진을 보면 자화상이 얼마나 미화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두고 ‘미술을 아는 청년들의 총사령관’이라고 불렀던 쿠르베는 1861년 파리 청년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냅니다. 편지에서 쿠르베는 자신이 생각했던 ‘사실주의’ 그림 요소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현재를 그려야 한다, 개성이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그린다 등등.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에 편지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쿠르베는 1866년 프랑스 미술계에 폭탄을 던집니다. 말 그대로 테러에 가까운 문제작을 선보인 건데요. 바로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입니다. 여성의 성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외설 논란이 있을 정도의 충격적인 그림입니다. 쿠르베의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부그로나 카바넬의 작품 속 비너스의 몸은 실제 여성의 몸이 아닌, 상상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사실주의 선언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그는 여성의 성기만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게 진짜 여성의 몸이라고 외친 거죠. 이토록 노골적인 작품을 보고 있자니, 쿠르베의 내면에 있던, 두려움 없는 질주 에너지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짐작이 갑니다.


세상의 기원


4.


쿠르베가 철거했다가 다시 세워진,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상


빅토르 위고만큼이나 유명해지고 싶다던, 쿠르베의 열망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파리 코뮌이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달성이 됩니다. 과도한 국가 권력에 불만이었던 쿠르베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권 ‘파리 코뮌’을 적극 지지합니다. 코뮌 정부도 쿠르베를 예술 정책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미술 권력을 손에 쥔 쿠르베는 국가의 살롱 심사 폐지를 통해 화가들의 자율성을 되살렸습니다. 동시에 그는 왕정의 상징인,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동상 철거를 주도하게 되는데, 하필 이 사건이 쿠르베의 말년을 처량하게 만들게 됩니다. 72일 만에 파리 코뮌이 무너지면서, 새로 들어선 프랑스 3 공화국은 쿠르베에게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동상 철거 비용 구상권을 청구한 겁니다. 28만 6550프랑, 쿠르베가 갚을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자존심을 내던지고 국가에 사면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쿠르베는 스위스로 쫓겨나듯 도망갑니다. 이후 빚을 갚기 위해 쿠르베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파리 청년의 총사령관 말년 치고는 참으로 씁쓸한 마지막이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누드여인과 개

‘프랑스에서 가장 자부심 강하고, 가장 오만한 사람’이었던 구스타브 쿠르베. 새 정부 입장에선 그만큼 좋은 먹잇감이 없었을 겁니다. 파리 코뮌이 남긴 흔적을 다 담아서 없애버리기엔 쿠르베의 모난 성격만큼 적당한 게 없었을 테니까요. 오르세 미술관의 또 다른 쿠르베의 그림 ‘폭풍우 치는 바다’(La Falaise d'Etretat). 이 작품은 모네를 비롯한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렸던 에트르타의 바다를 그린 건데, 프랑스 미술계에 도전하려 한 도발적 작품들과 비교하면 힘을 빼고 그린 느낌이 듭니다. ‘누드 여인과 개’ (La Femme au chien)를 보면 ‘화실’로 프랑스 미술계에 폭탄을 던진 화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각적이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마치 루브르의 로코코 작품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평생을 지치지 않고 투쟁해 온 쿠르베지만, 이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 역시도 싸우지 않는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밀레의 대표작, 만종(L'Angelus)


사실 쿠르베 전에 밀레 Jean-François Millet가 있었습니다. 밀레 역시 아카데미가 가르친 ‘좋은 그림의 기준’을 따르지 않은 화가였습니다. 밀레는 당시에 그림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계층, 농민들을 그렸습니다. 나아가 그는 농민의 모습을 성스럽게 묘사했습니다. 루이 필리프 왕이 2월 혁명으로 쫓겨나고, 세 번째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밀레의 그림은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귀족이 아닌 서민의 그림,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게 관심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밀레는 결코 자신의 화풍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프랑스 미술계와 싸우던 쿠르베가 밀레를 찾아가 사실주의 운동을 함께 하자고 요청했지만, 밀레는 거절했습니다. 밀레의 선택을 보면서, 만약 쿠르베도 그때 밀레와 마찬가지로, 투쟁 대신 평화를 택했으면 미술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해 봅니다. 과연 인상주의가 그렇게 시대를 호령하는 대세가 될 수 있었을까요. 쿠르베의 망치 없이, 인상주의가 아카데미의 질서를 무너트릴 수 있었을까요. 결국 오르세 미술관의 걸작은 거의 대부분 쿠르베의 오만함에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습니다.


5.


캔버스 뒤편의 그리스도 성상


‘화실’을 다시 보면, 단순히 미술계에 충격을 주기 위한 작품이라고 보기엔, 미술 그 자체로도 흥미롭습니다. 일단 쿠르베가 그리는 그림 속 풍경은 그의 고향, 오르낭의 모습입니다. 캔버스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성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상 모습은 자연스럽게 1875년에 쿠르베가 그린 자화상과 연결됩니다. 쿠르베는 그 자화상의 제목을 ‘파이프를 문 그리스도’라고 지었거든요. 누드모델 옆에는 그림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습니다. 마치 화가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일, 순진무구함의 상징 같아 보입니다. 화가의 오른편엔 실존했던 인물, 철학자 프루동, 작가 샹플뢰리 등이 보이고, 그림 왼편의 개를 데리고 있는 사냥꾼은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의 미술사적 의미를 완전히 지우더라도, ‘화실’은 뜯어보기에 좋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보는 사람도 재밌는 만큼, 쿠르베 역시도 ‘화실’을 그리면서 스스로 창조의 기쁨을 한없이 느끼지 않았을까요.


프루동, 샹플뢰르 등 쿠르베가 좋아했던 친구들
나폴레옹 3세의 얼굴을 꽤 닮은 사냥꾼


쿠르베는 1854년 사실주의 전시를 앞두고 ‘누구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아니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아카데미 미술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쿠르베가 궁극적으로 원한 건, 명성을 넘어서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교회나 국가, 혹은 클라이언트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과거의 예술가가 아닌, 예술적 성취를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적 의미의 자유로운 예술가의 초상, 그 이미지가 바로 쿠르베가 ‘화실’을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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