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오르세 미술관 문 앞에서

오르세 미술관 입장 전 당신이 알아야 할 것

by 알스카토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프랑스 미술의 당대 위상을 먼저 언급해야 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에서 시작됐고, 그 뒤 중심이 로마로 옮겨가며, 오랜 기간 이탈리아는 전 세계 미술 재능을 끌어당긴 나라였습니다. 프랑스 미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니콜라스 푸생 Nicolas Poussin도 예외는 아녔습니다. 라파엘로의 후예를 꿈꾸며, 이탈리아 미술계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푸생은, 하지만 조국의 미술 발전을 꿈꿨던 리슐리외 총리의 호출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루이 14세는 미술 국립기관을 세웠고, 매년 국가 장학생 한 명을 뽑아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주는 '로마상'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총리의 조합은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시켰죠. 나라가 부강해지고 돈이 몰리면서, 프랑스 미술은 이탈리아 미술과의 격차를 좁혀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를 근대 미술의 중심으로 만든 오랜 전통, 살롱이 시작된 것도 이 즈음였습니다.


1874년 살롱전의 분위기는 이랬습니다. 당대의 트렌드 세터들이 모여 미술의 경향을 논하던 자리였죠.


살롱. 지금으로 치면 K-팝 아티스트를 뽑은 오디션과 비슷했을 겁니다. 살롱은 국가가 후원하는 전시회입니다. 1692년 루브르 궁전에서 처음 열린 이후, 국립 미술학교인 에꼴 데 보자르의 최고 작품을 매년 공개한 건데, 1792년부터는 살롱에 출품하려는 화가가 너무 많다 보니, 전문가들이 심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살롱 출품작이란 이름표는 걸작의 인증마크가 됐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온 다비드 Jacques-Louis David나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 같은 화가들 (네. 둘 다 '로마상' 수상자들입니다.)이 고국으로 돌아와 살롱 입선의 기준점을 제시했습니다. 때론 출품 기준을 두고 선을 중시하는 앵그르와 색을 중시하는 낭만주의파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가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예술적인 논쟁을 거치면서 프랑스의 미술은 점점 더 풍성해졌고, 프랑스 밖의 미술 재능들도 살롱전 출품을 위해 프랑스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오귀스트 앵그르의 '성체를 숭배하는 성모'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정말 프랑스, 아니 세계 최고였던 인물이 바로 당대의 미술 기준을 만든 오귀스트 앵그르였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그림들이 바로 국가가 사랑했던 그림, 즉 아카데믹한 살롱 그림들입니다. 바꿔 말하면 당대의 규칙과 질서를 가장 충실하게 따른 모범적인 작품들입니다. 색을 중시했던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도 살롱전 심사위원장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시 프랑스 미술의 기준은 다비드와 앵그르가 확립한 신고전주의였습니다. 일단 그림이 정확해야 했습니다. 스케치와 묘사의 정밀성이 중요했죠. 때론 형태의 왜곡을 통해서라도 실제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소재 제한도 분명했습니다. 종교, 신화, 역사 속 이야기를 담아야 했습니다. 즉, 상당히 있어 보이는 그림, 그것이 당시 살롱이 주도한 프랑스 미술의 주류였습니다.


인상주의 메카라 불리는 오르세 미술관이 당시 엘리트들이 그렸던 작품을 먼저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살롱이 사랑했던 그림의 공통점을 찾아보라는 겁니다. 그림의 규모도 전반적으로 크고,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작품들처럼, 표현 방식이 섬세하고 정교합니다. 우리가 흔히 미술 하면 떠오르는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있지만, 당대 살롱 그림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비너스의 탄생'입니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아닌, 윌리엄 부그로 William-Adolphe Bouguereau의 그림인데, 신고전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당시 잘 그린 그림을 두고 ‘부그로적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부그로는 당대의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비너스의 탄생'
아름다운 여신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입니다. 이 정도면 오만한 앵그르도 만족스러워했겠죠.


부그로의 작품 옆엔 또 다른 '비너스의 탄생'도 있습니다. 카바넬 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이죠. 알렉상드르 카바넬 역시 지금으로 치면 동네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 모범생이자, 장학금을 받고 에꼴드보자르에 입학을 한 수재였죠. 1863년, 카바넬은 '비너스의 탄생'으로 살롱전 1위를 차지하면서, 장레옹 제롬 등과 함께 당대의 최고 화가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서울대 수석 입학생의 작품을 감상해 보시죠
사실 '비너스의 탄생'은 당대 신사들이 대놓고 즐길 수 있는 에로물이었습니다. 여자의 누드가 나오지만 그건 신화 속 이야기니 '외설'이 아닌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부그로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만큼 유명한 작품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카바넬의 그림이 유명해진 것은 1863년에 살롱에 출품됐다가 탈락한 다른 그림 때문입니다. 바로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의 '풀밭 위의 점심'이죠. 맞습니다. 안타깝게도 카바넬의 그림은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 '풀밭 위의 점심'을 더 빛내주는 감초 같은 조연이 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오르세의 미술해설사들도 늘 마네의 올랭피아를 설명하기 위한 교보재처럼 카바넬의 그림을 활용하죠.)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오르세 미술관이 살롱의 아카데믹한 그림을 맨 먼저 전시한 또 다른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바로 근대 미술의 문을 연 작품들의 가치를 분명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측면입니다. (물론 고전주의 그림들도 그 자체로 훌륭합니다만,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의 진짜 목적은 아니니까요.) 근대 미술 혁명가들의 파격을 알기 위해선, 기존 질서의 모습부터 알아야 하니까요.


미술학교의 열등생이었던 인상주의 화가들을 제치고, 1874년 살롱에 출품된 작품의 일부입니다. 매력이 느껴지나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당대의 열등생, 혹은 배운 대로 그리지 않는 저항가, 좀 더 과장하자면 혁명가들의 그림입니다. 푸생 이후, 1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살롱의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방식대로 그림을 그렸고, 나아가 자신들의 스타일을 하나의 사조로 만들려고 했던 결과가 바로 오르세 미술관입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매번 특별한 기획전을 자주 여는데, 지난 4월엔 'Paris 1874'란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인상주의의 첫 전시를 재현한 건데, 여기엔 보너스로 1874년 살롱전 출품작도 함께 소개됐습니다. 당시의 명문대 학생들 작품인 셈인데, 제가 아는 화가는 없었습니다. 그림도 좀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이발소에 걸린 달력 그림 느낌이 나기도 했죠.


1874년 살롱전의 그림 앞은 썰렁했지만, 당시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었던 르누아르의 그림 앞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당대의 규범을 무너트린 저항 예술가들의 전당입니다. 때문에 오르세미술관의 이야기를 시작은 당연히 이 사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텁고 견고했던 벽을 가장 큰 망치로 부수려 했던 나르시시스트, 바로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입니다.



당시의 미술을 지배했던 앵그르의 파워를 좀 더 알고 싶으신 분을 위해


https://brunch.co.kr/@haine8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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