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는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살아왔다. 고등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너끈히 합격했고,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몸이 아파서 입원했던 한 학기를 빼고는 모두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대기업의 유망 계열사이며 스톡옵션이 부여되는 코스닥 회사에 입사할 때까지도 민서는 늘 한결같은 자세로 최선을 다했다.
민서는 어렸을 때부터도 그랬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위해 협조하고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민서는 모든 사람이 언제나 모범생이라고 인정해 주는 주변 환경에서 살아왔고, 그런 민서의 비위를 거스르는 친구들은 왕따 비슷한 걸 경험해야 했다.
민서의 형제들도 공부 잘하는 민서에게는 대들지 않았다. 민서의 부모님조차 민서가 공부를 잘해줘서 이웃들과 친척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걸 너무도 좋아했기에 민서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장학생인 민서는 특별대우를 받는 쪽이었고 회사에 입사할 때도 수석은 아니었지만, 그에 거의 버금가는 성적으로 입사했으리라 짐작이 되어 장래가 유망한 민서에게 상사들도 호의적이었다.
민서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민서 건너편에 앉은 민서의 동기가 자꾸 건방지게 굴어서 경고를 날려주고 난 다음부터였다. 민서의 동기를 옥상 루프탑 공원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어디 SKY 대학도 안 나온 게 설치고 깝죽거리고 지랄이냐고 한 방 날려줬다.
민서의 동기인 경선은 서울권 대학교를 나오기는 했지만, SKY 출신은 아니었고, 입사 성적도 입사 하한선을 간신히 넘긴 성적일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아마도 면접관 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성적을 살짝 올려줘서 입사가 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을 민서는 하고 있었다.
입사 면접관이면 회사의 중역이라 상당한 배경이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올해의 입사 면접관은 객관적인 사원 선발을 위해 외부 인사들로 특별히 초청되어 신입사원 면접을 본 만큼 회사 내부의 중역이 아는 사람이나 친인척은 아니라고 민서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서는 자기 깜냥도 모르는 동기 계집애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학창 시절에 갈고닦았던 갈구기 기술을 얼마 전부터 경선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든지 자기의 공부를 방해하거나 목표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살게 굴었다.
그리고 민서의 수법은 직설적이고 잔인해서 몇 번 민서에게 당한 애들은 민서에게 기를 펴지 못했다. 민서는 풀이 죽어 민서 앞에서 설설 기는 그런 애들을 보면 공부나 일로 쌓인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분이 나아졌다.
민서는 언제나 주변에 자기를 지켜줄 배경을 만들어 두었는데, 민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반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동식이가 민서를 호위하고 있었고, 대학교에서는 체육 특기장학생인 명훈이와 친구들이 민서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서는 늘 편안하고 자신 있게 공격하는 지위를 가졌다.
민서가 경선을 옥상 루프탑에서 만나 면박을 주고 난 그 이후부터 경선은 민서에게 말을 조심하는 것 같았다. 민서는 이후에도 사소한 일로 계속 경선을 골탕 먹이며 회사 일의 스트레스를 풀었고, 모든 것은 민서의 뜻대로 잘 굴러가는 듯했다.
민서의 신경을 건드리는 문제가 터진 것은 이 전무님의 부서 방문 때 일어났다.
보통은 민서의 부서장인 강 부장님이 담당 과장과 실무자들을 데리고 임원 회의장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 전무님의 방으로 불려 들어가서 자세한 보고를 올리는 형식으로 업무가 진행되었는데
이번엔 뜻밖에도 이 전무님이 직접 오셨다.
전무님 눈에 들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에 민서는 깜짝 놀라 브리핑 자료를 찾았다.
다들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동기인 경선이 앙큼하게도 차를 타 가지고전무님에게 아양을 떠는 것이 아닌가.
이 전무님은 경선을 아주 좋게 보고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창문 밖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브리핑 자료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민서는 속이 끓었다.
' 내가 저년을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어줘야겠어. 저년이 어디라고 내 자리를 넘봐'
경선이 빈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민서는 급히 경선에게 다가가서 팔꿈치 옷자락을 끌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 야, 너 어디서 이런 여우짓이야. 너 이런다고 네가 돋보이고 그럴 것 같아? 이 회사에선 서울대 아니며 적어도 SKY 출신 정도는 돼야 저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동네 구멍가게가 아니라고. 알았어? 설치고 다니지 마. 너 이딴 식이면 수습 기간도 못 마치는 수가 있어."
민서가 광분하자 경선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는 민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직원 휴게실에서 나갔다.
민서는 속이 후련했다. 경선이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앞으로는 눈에 거슬릴 일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며 민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잠시 후에 보니 경선이 다시 이 전무님이 있는 부장실로 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민서는 더 이상 자기 선에서 해결하기보다는 얼마 전부터 자기에게 찝쩍대기 시작한 오 과장을 이용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민서는 오 과장을 직원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친근한 어투로 말을 붙였다.
"과장님, 어제 저한테 밥 사준다고 하셨죠?"
오 과장은 아주 반색을 했다.
"응, 그랬지. 내가 아는 맛있는 맛집이 있거든? 근데 다른 직원들까지 우르르 몰려가면 앉을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나랑 민서 씨하고 딱 둘이서만 가야 먹을 수 있어. 알지? 무슨 말인지?"
민서는 오 과장을 제대로 홀리기 위해 웃으면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잘 알죠. 근데 제가 요즘 기분이 밥 먹으러 맛집이나 다니고 할 기분이 아니에요."
오 과장은 모처럼의 찾아온 기회를 잡으려고 민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다.
"왜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나? 우리 민서 씨를 누가 건드려? 어디 한 번 나한테 얘기해 봐요.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민서는 됐구나 싶었다. 제대로 걸려들었다.
'경선이 너, 이제 사회의 뜨거운 맛 좀 봐라'라는 생각을 하면서 민서가 입을 열었다.
"제 동기 경선 씨요.
저랑 동갑이고 출신 대학교는 과장님이랑 저처럼 서울대도 아니고, SKY 대학도 아닌그저 그런 인 서울 학교 나왔잖아요.
근데 요새 경선 씨가 너무 설치고 다녀요. 자기 주제는 모르고 강 부장님한테도 꼬리를쳐요.
아까는 이 전무님한테까지 또 차를 들고 들어가서 꼬리를 치더라니까요?"
오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알았다.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마'라는 식의 몸짓이었다.
"우리 민서 씨가 괜히 스트레스받은 게 아니고만. 어디 수습 주제에 설치고 다녀.
물론 민서 씨도 수습이지만 민서 씨는 형식적인 기간 채우기에 불과하지.
이 미모에 이 학벌에 이 실력에 말이야.
민서 씨는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아요. 내가 경선 씨를 불러서 아주 혼쭐을 내줄게. 놀라서 사표를 내고 싶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