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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Jan 24. 2021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



최정우,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 문학동네, 2020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같은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모자라 하고 누군가는 코끼리를 삼킨 뱀이라 한다. 완전히 동질적인 경험으로부터 전혀 다른 판단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화와 불일치가 곧 정치적인 것이며, ‘감각적인 것의 분할’로서의 미학은 따라서 본래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뭔가 말하고자 한다면, 나의 현실 인식-세상과 사물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어떤 미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단 요즘의 나는 내 삶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나를 오래 알았던 사람들은 이 흔한 말이 내게 어떤 무게이자 의미를 갖는지 알 것이며, 그 이유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전히 삶 일반에서 고통은 상수값이고, 보편적으로 그러하다. 개인이 삶을 바라보는 각각의 관점들과는 별개로 이것은 건조한 사실이다. 삶이라는 것은 늘 주어진 조건들의 총화이며, 개인의 노력이나 태도 변화로 구조를 재구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상수값을 완충해 주는 다른 변수들, 고통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지속가능한 행복의 조건들이 갖춰진다면 지금의 나처럼 삶이 평균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내게는 그것이 결혼이다. 뿌리 깊은 삶의 무망감과 무기력을 떨쳐내고, 처음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나의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삶이라는 것에 감사하지 않는다. 아니, 삶에 감사하는 정적주의적 태도 자체를 (미학적으로)혐오한다. 감사는 심미적 반감, 윤리적 저항감, 정치적 투쟁심을 소거하고, 주어진 조건에 투항하며 구조에 순응해 살도록 만드는 수동적이고 패배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연대를 방해하며, 저항을 무력하게 하고, 세상에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감춘다. ‘감사’는 그야말로 ‘감각의 사망’, 감성의 마비에 다름 아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보다 명백히 불행한 타자-빈곤과 기아, 달동네와 철거민, 비정규직, 장애인과 소아암 환자 등-를 상정하고, 그에 비해 ‘우리’ 삶은 비교적 살만하니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가르침에 (미학적)거부감을 느꼈다. 이 말에 아무런 (미학적)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나눌 것이 없다. 이 (미학적)거부감이 곧 나의 윤리적 판단, 나의 정치적 입장, 나의 에토스, 나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힘주어 말하지만 나에게 여전히 “인생은 고통”이다. 내 안락한 삶이 사실 수많은 ‘몫 없는 자’들의 고통을 딛고 세워져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삶은 감사는커녕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사회 속에 존재하며 사회와 연결된-인간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며 당위적으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의도적으로, 혹은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치열한 생존 투쟁 때문에 그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봐야만 달이 뜨는 것이 아니듯, 눈 돌리고 살아도 고통은 언제나 모든 곳에 존재한다.

개인의 사적 영역이 전례 없이 확대되었고 또 중시되고 있는 세상이다. 물론 사적 영역은 소중하다. 그러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잊거나 경시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정인이 사건’을 바라보며 참담한 고통을 느꼈다. 양모를 엄벌해 달라는 청원에 참여하고, 탄원서를 쓰고, #정인아미안해 해시태그를 공유하며 공분을 나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내 슬픔과 불쾌를 감소시키기 위한 개인적 행위, 소극적 저항에 불과하다. (안전한)참여 한 번으로 정의 실현에 기여했다는 안도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손쉽게 얻을 수 있고, 가해자를 괴물로 만들어 타자화하고 내 눈앞에서 치워 없애면 내가 덜 괴롭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파편화된 사람들의, 원자화된 개인들의 세상이다. 앞서 개인의 노력으로 구조를 바꿀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런 사회에서는 정말로 그렇다. 연결과 연대, 담론 형성과 집합적 실천 없이 “서서히 좋아지고 있다”는 안도감에 젖어 살아가는 것이다. 거대담론에 관심을 갖는 것을 촌스럽게 여기고, 아무리 급진적인 좌파적 이론이라도 취미생활 이상으로 소비되지는 않을 것이며, 투쟁은 자신의 생존과 성공만을 위한 개념일 것이다. 사람들은 고립되고 세상은 서서히 몰락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는 날까지 세상을 향한 내 역겨움과 분노를 숨기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언제나 존재하는 고통이라는 상수값을 느끼고, 발견하고, 관찰하고, 그 구조와 기능을 밝히고, 힘을 모아 마침내 균열을 가하는 것이 진보이자 혁명이다. 나는 진보주의자이며, 내 사유와 삶이 ‘웰빙 좌파‘의 무력한 취미활동에 그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할수록 더욱 감각의 날을 첨예하게 세울 것이다. 내 삶에만 충실한 개인주의자, 실용적 지식으로 무장해 성공적 삶을 살아가는 스마트한 자유주의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삶의 모습들은 지금의 현실이 처한 미학-정치의 지도를 낱낱이 보여준다.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후기자본주의 체제, 노력과 감사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승해 기생충처럼 살아가고 싶지가 않다. 도덕적, 윤리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미학적 차원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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