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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Jan 19. 2023

<너의 이름은> 비평

2017년에 해당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고 작성한 서평인데 다시 읽어보니 남이 쓴 듯 재미있어서 수정 없이 재업. 스포 많습니다.







1. 총평

<너의 이름은>을 보고 왔다. 우려했던 혼모노들의 난동은 없었으므로 충분히 몰입해서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었다. 다만 영화의 본래 주제의식이나 작가적 의도에 합치하는 즐거움은 아니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서스펜스와 스릴이 주였다. 나는 이 영화를 낭만적 멜로가 아니라 공상과학 재난영화로 소비하고 온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들을 눈물 철철 흘리며 봤고, 아직도 그 여운을 간직하고 있는 나로서는 의외였다. 자신 안에서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무언가가 훅 불거지는듯한 체험이 이번에는 없었다. 그만큼 <너의 이름은>은 기존 신카이 마코토 작품들과 많이 다르다. 하나의 줄기를 정해놓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서사방식은 같은데, 기존의 작품들이 형식과 내용 면에서 (감독 나름의)리얼리티에 투철하기 위해 극적 낭만주의를 절제하고, 우수나 고독이라는 소극적 정서로써 뒷맛을 남기던 방식이었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오로지 운명적 로맨스의 극대화를 위해 다른 모든 요소들을 수단화하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별로 여운도 없다. 뭐가 더 낫다는 이야기는 아닌데,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인문학적 시선이 많이 퇴색하였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려면 으레 그래야 하는 건가.


아무튼 영상미나 연출의 탁월함이야 뭐 말할 것도 없으니, 흠을 잡아보려고 한다. 흔한 비판이지만, 사건의 개연성과 인물의 입체감이 빈약하다. 그게 진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말대로 주제의식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욕심을 부리다보니 이것저것 많이 놓친 것인지는, 내가 인사이트가 부족해서 잘 모르겠다. 다만 다른 모든 중요한 영화적 요소들을 희생해 가며 굳이 부각시키고자 했던 그 운명적 사랑이, 좀 상투적이고 울림이 약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혜성 충돌로 인한 사망'이라는 재난, 그로 인한 영원한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렇게까지 애틋해질 수 없었잖아? 혜성을 빼버리고 이야기가 쭉 진행됐으면 이 영화는 그냥 로맨틱 코미디였다. 여주인공 가슴이나 주무르다, 어찌저찌 만나서 알콩달콩 연애하는 천진난만하고 뻔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가구야 공주 이야기>처럼 모든 우연과 비약이 허용되는 모노가타리 느낌으로 감상하기엔 <너의 이름은>은 너무 모던하다. 애시당초 그런 류의 스토리텔링은 신카이 마코토와는 아예 관계가 없는 분야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세계는 형식이든 내용이든 일단 모더니티에 충실한 것이 특징이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그 특징적 모더니티를 많이 내다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내가 느끼는 위화감은 바로 이러한 불균형에 기인한다. 사소설 작가가 쓴 동화를 읽는 느낌이랄까. 이런 균형잡기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주 잘 하는 영역인데,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좀 버거웠던 걸까? 아니면 이것도 작가적 스타일이라고 봐야 할까? 사실 난 지금 내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영화를 어떤 태도로 감상해야 했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



2. 미츠하 유감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도쿄 꽃미남으로 살고 싶었던 모던 걸 미츠하는 혜성도 맞기 전에 일찌감치 죽었다. 난 오히려 텟시가 훨씬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읽혔다. 2023년 시부야 츠타야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텟시에겐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데, JR 전동차를 타고 스쳐가는 미츠하는 이방인처럼 위화감 덩어리였다. <너의 이름은>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어정쩡한 캐릭터, 미츠하. 오히려 그녀의 할머니는 일관되게 전근대성에 투철하기라도 했지, 죽도 밥도 아닌 너의 이름은 미야미즈 미츠하. 한 인물의 캐릭터성 자체가 감독의 주제의식에 대한 강박 때문에 완전히 휘발되어 버린 것 같다.


처음에 그는 촌구석이라는 닫힌 사회의 전근대적 정신성에 끊임없이 반감을 표출하고 그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던 캐릭터로 등장했다. '카페'라는 단어만 들어도 환장할 만큼 도쿄 생활에 큰 환상을 갖고 있는 그는 현대적 소비사회와 그 안에서의 모던한 삶을 늘 동경한다. 그렇게 모더니티를 희구하던 주인공이, 정작 그 삶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오히려 완전히 비(非)모더니티스러운 캐릭터로 회귀한다. 닫히는 전동차 문 사이로 운명의 붉은 실을 다급히 건네는 미츠하의 모습은 운명론적 사랑의 열렬한 신봉자 그 자체였지, 사춘기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일련의 전회를 겪고 난 뒤의 미츠하는 이전의 다채로운 인격적 속성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평면적인 캐릭터로 전락해 버린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급진적인 진보와 변화의 선봉장처럼 묘사되는 아버지와 미츠하의 묘한 관계이다. 미츠하는 촌구석의 질서를 전복하고 개혁해야 할 대상보다는 벗어나고 뛰쳐나와야 할 족쇄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에 아버지와 같은 입장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텟시 같은 인물이 미츠하의 아버지와 같은 진영에 있는 캐릭터고, 미츠하는 그보다는 확실히 덜 능동적이고 덜 진보적이다. 즉 미츠하에게 있어서 모더니티란 주체적으로 쟁취하고 실현해야 할 무엇이라기보다는, 구름 속에 있는 것처럼 모호하고 막연한 동경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녀는 동경을 동경할 뿐, 사실 뼛속까지 시골 사람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미츠하의 내면에서 동경의 모더니티란 갈등적이고 긴장적인 이상으로만 존재했고, 마침내는 머리를 자르듯이 포기되었다.


남주인공 타키의 입장에서야 뭐, 시공을 초월해 알고 지내던 여자애가 운석 맞고 죽었다는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않겠는가? 동굴 속에서 썩은 술을 들이키더라도 설득력이 있다. 가능한 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해범위를 넓히고,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는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한번 도박을 걸어보는 것, 충분히 합리적인 리액션이고, 캐릭터의 일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츠하의 경우 무릎 깨져 가며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변전소를 폭파하고 종횡무진 마을을 누비며 노력하던 그 모습조차, 기존의 순응성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면적 성장을 이뤄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고전적인 신화 속 영웅의 모습에 가깝게 느껴졌다. 철옹성 같던 아버지를 윽박질러 마침내 뭔가를 관철시켰지만, 그건 근대성도 아니었고 가족성의 회복도 아니었다. 그냥 물리적 승리에 불과했다.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굳은 신념으로 이겨내는 영웅의 활약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박진감을 주지만 우리에게 인간학적 이해의 지경을 넓혀주지는 않는다.


반면 타키에게 있어, 미츠하의 몸을 빌려 간접 체험한 전근대의 정신성은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할머니를 업고 산을 오르며 '무스비' 이야기를 듣는 타키의 모습은 시골 공동체의 동일자가 아닌 철저한 타자의 그것이다. 결국 운명적 사랑에 투신하고, 인연을 잊지 못해 어른이 되어서까지 '님'을 찾아 헤매는 타키의 모습 역시 비(非)모더니티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의 입장에서 너무나 생경하였던, 비일상적이고 낭만적인 그 체험의 울림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익숙한 현실을 살다가 현실 속에 불쑥 튀어나온 꿈의 단맛을 본 사람이 그것을 당분간 좇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다. 그런 타키의 '믿음'은 미츠하의 할머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처럼 그저 계속 믿어왔기에 믿는 꿈 같은 믿음이 아니라, "내 망상인가? 무의식인가?"라는 인지적 회의와 검정을 무수히 거친 체계적 믿음이고, 본인의 구체적 체험으로 정립된 믿음이기 때문에 모던할 수 있다.


이런 둘이 만나서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별 생각 없이 즐기며 봐야 하는 영화인데 내가 너무 꼬인 걸까?



3. 어정쩡한 화해

대부분의 사건은 나름의 확률분포를 따른다. 아무리 체계적으로 통제되고 확률이 낮아도, 수없이 독립시행이 거듭되다 보면 일어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쯤 되면 인지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랜덤이나 마찬가지고, 사람의 인지는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연에 의미를 부여한다. 개인의 선행이나 결함에 귀인하거나, 어떤 초월적 운명 같은 인위적 인과를 갖다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오류이나 또한 사람의 본능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사람은 불안을 느끼며, 뭐든 갖다붙여서 이건 이래서 이렇다고 '믿어야만' 불안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의 발생을 운명이나 업 혹은 '무스비'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건 전근대의 정신적 징후다. 시골 사람들은 사고나 죽음, 질병조차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알지 못하는, 그래서 불안을 주는 모든 현상들을 하늘의 뜻에 맡겨버린다. 그렇다고 이게 마냥 순수하고 숭고하지도 않은 게, 텟시의 조소처럼 거기에는 부패와 악덕도 존재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전원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했지만, 그 정신성까지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도시건 시골이건 그 양상과 종류가 다를 뿐, 수많은 위험요소가 존재하는 건 똑같다.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이토모리보다 수많은 자동차와 전차가 도로를 누비는 도쿄가 위험의 총량 면에서는 월등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대사회의 경우에는 그게 매우 체계적으로 시스템화되어 있고, 통제가능한 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혀 조직적으로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예컨대 안전지침이나 교통법규 같은 것), 해로운 사건의 발생확률은 최대한 낮게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과학 덕분이며, 우리가 신비주의에 의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이러한 체계에 의해 많은 것들이 설명가능하고, 대부분의 현상의 인과관계가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은 어떤 결과의 원인들을 찾아내고, 그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파악된 것에 대해 사람은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고, 그것은 곧바로 활용가능한 것, 정확히는 발전을 위한 '생산수단'으로 고양된다. 과학을 통한 탈신비화는 모더니티의 대표적 속성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물적 토대를 축적해 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미츠하의 아버지는 이러한 근대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감독은 미츠하의 아버지 역시 바람직한 캐릭터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럼 뭐야? 이어갈 것은 소중히 지키며 이어가되, 개인에 대한 억압이나 강제에는 반대한다? 그러면서도 급진적인 변화나 개혁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감독의 입장이 애매하다. 제작 과정에서 너무 지브리를 의식한 걸까? 감독은 대립과 갈등을 실컷 묘사해놓고, 거기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려주지 않은 채 극을 재빠르게 종결지어 버린다. 미츠하의 신념은 아버지를 이겼고 타키의 순애보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럼 전근대가 근대에 승리한 건가? 미츠하 할머니와 같은 삶에도 물론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주제의식은 신카이 마코토가 평소 별로 탐탁찮아 하던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그렇다고 현대적 합리성이 구시대의 신비주의를 완전히 구축한 것도 아니다. 모던 가이를 대표하는 타키도 결국 그 신비주의에 매몰돼 버렸다. 그러면 이것은 전근대적 낭만과 모더니티의 극적 화해를 그린 작품인가? 그러나 운석씩이나 동원해서 마을을 깡그리 날려버려야 겨우 가능한 화해라면 애초에 화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냥 시골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강제로 상경한 거다.


전근대의 정신성이나 전통문화를 가장 세련되고 현대적인 형태의 문화컨텐츠로 재구성해내는 능력은 확실히 일본만이 가진 소프트 파워다. '무스비' 역시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자 꽤나 매력적인 소재임에 틀림없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이런 비(非)모더니티적 주제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데에는 아직 익숙치 않아 보인다. 결혼식을 현대식으로 할 지 전통식으로 할 지 갈피를 못 잡는 사야카처럼 감독도 둘 사이에서 관객들이 납득할만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다. 구태여 갖다붙이자면 "운석 맞고 끝장난 전근대의 정신성은 두 도시남녀의 운명적 사랑을 통해 계승되고 이어진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지만 영 탐탁치 않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해변의 카프카>를 거쳐 <다자키 쓰쿠루>까지 나아간 하루키의 성취에 비추어 보면, 스스로 '하루키 키드'를 자처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4.불편한 부분

미츠하와 타키, 둘 중 하나의 와꾸가 개빻았더라면 어땠을까? 서로 일기를 주고받고 알콩달콩 사랑을 싹틔우기 이전에 경찰서 먼저 가지 않았을까? 몸이 바뀌둔 운석을 맞든 뭘 어떻게 하든간에, 일단 잘생기고 예쁘고 봐야 한다? 내가 대부분의 통속적 멜로 장르를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아무리 리얼하게 연애관계를 묘사한들 그것은 평범하게 생긴 우리들의 이야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신카이 마코토의 기존 작품 주인공들이 별로 안 예쁘고 잘생겨서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굳이 잘생기고 예쁘다는 묘사가 들어간 주인공들의 애틋한 로맨스, 못 생겨서 그런 거 못 해본 사람들한테는 살짝 폭력인 것이다.


평범한 우리가 잘난 애들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다고 볼 수도 있을까? 대리만족은 결핍을 전제한다. 현실을 왕따시키며 오로지 대리충족으로만 삶을 영위하는 혼모노들도 있긴 있지만, 인문학적 보편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충성팬들을 양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단순히 미관상으로, 기능적 측면에서만큼은 매우 유효한 설정이지만, 작품성에는 걸림돌이 되었다.


쓸데없는 서비스신은 왜 굳이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전거 타고 운석 피하러 가는데 굳이 여고생 팬티를 보여줘야 하는가? 극의 흐름에 위화감을 주면서까지 혼모노들의 욕정을 만족시켜야 했는가. 신카이 마코토는 겨우 그 정도 창작자란 말인가. 본인의 그릇을 왜 스스로 깎아먹을까.



5. 그래서 어떻다고?

대단한 수작이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대단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의 전적으로 형식적 측면에서만 그렇다. 뭔가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기는 커녕 기존 작품들이 갖고 있던 인문학적 효용조차 담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직 신카이 마코토가 지브리의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증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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