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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Jan 19. 2023

마네와 혁명


한때 미술을 열광적으로 좋아하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말하라면 전에는 셀 수도 없어서 고민했지만, 지금은 샹탈 호페, 빔 델보예, 티노 세갈, 베이컨과 리히터 정도 외엔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몇몇 급진적인 반미술과 소수의 클래식을 제외하면 현대미술 대부분이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다. 예술로서의 미술의 위상은 어떻게 돈을 쓰면 더 차별화된 과시를 할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부자들의 수집품, 그러니까 슈퍼카나 하이 주얼리 정도로 전락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통념을 재생산하는 싸구려 미술만 혐오하였으나, 지금은 미술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뱅크시조차 이제는 상투적인 밈(meme)에 불과하게 되었고, 모든 컨셉추얼은 시시한 동어반복에 다름아니며, 미술을 통해 인식 너머의 무엇을 느끼거나 새로운 관점을 상상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요컨대 미술은 ‘바깥의 사유/바깥을 사유하는 것’과는 더 이상 관계 없는, 체제와 구조 안의 하나의 장치 혹은 이데올로기로만 기능하는 체계다. 슬프게도 미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딱히 놀랍거나 충격적인 얘기가 아니다. 미술 산업은 한참 전부터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고, 모두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동시대 아티스트와 업계인들은 소유자의 취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 비싼 인테리어 장식, 혹은 편법 증여와 상속의 수단으로 전락한 미술을 애도하기는커녕 반기는 것 같다. 신진 작가든 고고한 거장들이든 명품 패션 브랜드에 기생하거나 시시한 NFT 컬래버레이션 따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몸값을 높이려 하고, 아이돌 뮤비 같은 데 맥락없이 튀어나와 존재감을 어필하기도 한다. 한편 구입은 못 하지만 아는 체는 하고 싶은 일반 대중들은 대형 기획전과 아트페어를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니며 하이 소사이어티에 대한 추한 선망을 표출한다. 요컨대 전시는 ‘감성의 분할’을 가장 천박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공간이다. 미술이 체제유지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탁월한 그림과 조각들, 혹은 행위들이 태어나고 있지만, 미술 산업의 네트워크에 속하는 순간 작품으로써의 가치는 소멸하거나 가려진다. 거칠게 말하면, 지금의 미술은 그저 자본주의의 앞마당을 지키는 충실한 번견이다. 전시의 담론은 자본에 예속됐고, 작품은 물신화됐다. 작가의 주체성이나 자율성은 전적으로 자본의 비호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기에, 현대미술은 대놓고 맘몬을 섬긴다. 신을 섬기던 중세 미술의 환속화에 지나지 않는, 아예 모더니즘 이전으로 퇴화해버린 한심한 노예 상태가 현대 미술의 민낯이다.


그렇다고 예술의 완전한 자율성을 대안으로 논하자는 건 아니다. 예술은 결코 세계와 동떨어져 오롯이 존재하는 무엇일 수 없다. 예술과 예술가는 전적으로 물질세계에 있고, 물질과 관계맺고 있으며, 물질로서 존재한다. 미술과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술을 배후의 텍스트와 개념 없이는 예술로 성립할 수 없게 한 철학 우위의 아카데미 권력은 많은 괜찮은 미술들을 결국 철학의 보조 역할,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시각 자료에 불과하도록 만들었다. 말하자면 수많은 현대미술이 중세 미술처럼 언어로 환원가능한 것으로 퇴화했고, 담론의 하이어라키가 창작을 선도하고 있다. 이제 미술에는 그것이 미술이라 주장하는 내용만 남아있고, 그 내용을 둘러싼 공허한 말들만 늘었다. 작품이나 작가, 표현과 형식이 아니라 객체 간의 상호작용과 그 현상만이 중요한 체계라면 그게 어째서 '미술'인가? 자율성 어쩌고를 떠나서, 과연 지금 진짜 미술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것인가?


모든 미술이 시장통에 내몰리거나 상아탑에 갇힌 지금, 이백 년 전 마네의 회화를 생각한다. 마네를 막연하게 초기 인상주의를 개척한 화가 정도로 뭉뚱그리는 것은 쇼팽을 낭만주의라는 투박한 범주화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환원이다. 마네의 의의는 생활세계에 속해 있었고 생활세계 속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고 싶어했던, 조금은 소심했고 그래서 우울했던 한 화가의 그림이, 인류 정신 전체를 과거의 전통과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계-모더니티로 내딛게 하는 전복적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마네는 결코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 하거나 기존 체제를 적극적으로 전복하려 시도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낭만주의와 보들레르의 몫이었다. 마네의 반항심은 그가 세상을 사랑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마음보다는 작았고, 사람들의 모욕에 냉소로 화답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강하지도 않았다. 과거와의 대립은 늘 그에게 고통과 좌절만을 주었고, 그런 삶 속에서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노력했다. 거대한 흐름에 몸을 내던지지도 않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기획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네의 그림은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바꿨다. 마네를 다른 예술가들보다 좀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러한 우연적 필연성이며,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크나큰 의미로 다가온다.


마네의 그림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위반’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미술과 화가에게 기대하고 요구하였던 형식과 내용 일체를 거부한 마네의 회화는 대중의 미학에 부합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각 차원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적대감과 멸시라는 감정으로 표출됐고, 보들레르와 소수의 예술인들 외엔 그 누구도 마네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최종 심급, 갈등과 적의라는 감정으로부터 모더니티가 탄생했다는 점이 놀랍다. 바타유에 따르면 금기를 깨는 행위는 금기를 허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금기를 완성한다. 경계를 넘는 것은 경계선을 명확하게 한다. 마네의 그림은 위반을 통해 과거와 현대 사이에 선을 그었다. 선은 곧 단절이며, 기존 세계를 지배하고 구성하던 관점, 사상, 상식과의 결별이다. 마네라는 혁명적 사건이 사람들의 감각 일반을 재편하고 미적 판단의 준거를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현대라는 것은 곧 감각 체계의 변혁과 함께 도래한 것이다.


한편 현대란 아직 우리가 그것을 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현대다. 중세인이 현대를 상상하지 못했듯, 우리도 살아보지 못한 현대 너머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 욕망, 상식, 사상, 이념, 관점 일체가 현대라는 틀 안에서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산발적 반작용은 현대 자체를 전복하지는 못했고, 아방가르드는 좌초했으며, 종교 도그마나 전제 권력의 억압보다도 더 강력한 현대 사회의 감시와 처벌, 호명과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이 급진적 사유 자체를 가로막고 있기에, 우리는 탈현대는 고사하고 이미 주어진 예술도 제대로 곱씹지 못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어제 매수한 주식이 폭락하고 있는데 진보 따위를 이야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생업을 내던지고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고대하며 광야의 세례 요한처럼 살아가고자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결국 우리는 전적으로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생활인의 위치에서, 멈추지 않는 고민과 나름의 작은 투쟁들로 각자의 해방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중세와 현대가 그랬듯이, 현대 너머의 세계 또한 끊임 없이 경계를 넘고 금기를 위반하는 수많은 시도들, 그 힘의 축적과 연속으로 불현듯 도래하지 않을까? 그래서 예술은 여전히 중요하다. 나는 관념론 미학이나 칸트식 상관주의에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 편이지만, 예술을 통해 주어진 인식 범주를 초월한 현실의 또다른 양상을 발견할 수 있고, 개인이 윤리적으로 변혁될 수 있다는 루카치의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서두에서 미술을 혐오하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이젠 너무 편해져 버린 기존의 미술에 국한한 말이다. 우리의 현대적 감각이 선호하는 미술, 우리의 세련된 상식과 취향이 반영된 미술은 이미 낡아 버린 미술이다. 나는 불편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미술을 사랑한다. 인류를 적대하고 세계를 부정하는 마네의 미술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방을 사유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느 시대의 미술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 미술에, 예술이라는 것에, 해방과 혁명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요즘 가장 비싸게 팔리는 쿠사마 야요이나 데미안 허스트가 아닌 오래된 모더니즘 미술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다소 슬프긴 하지만, 지금 이 퇴락한 근대의 경계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에드몽 뒤랑티의 말처럼 오직 마네의 그림만이 다른 모든 것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우리는 지금 마네를 마치 고전처럼 소비하지만, 마네는 당대의 반미술이자 아방가르드였다. 언젠가, 내 생전에 그런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너머의 세계에서 돌아봤을 때,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만한 미술, 마네와 같이 뚜렷하게 구별되고, 시대를 초월한 에너지를 가진, 그런 미술이 마침내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감각적 불편함과 적개심 가운데 그 미술의 진가를 알아보고, 완벽하게 매혹되고 완전히 중독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작가가 성공을 추구하든, 세속적 욕망에 충실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다.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고, 급진적 운동이다. 능히 그럴 수 있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그런 미술을 만날 날까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미술을 혐오하고 또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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