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삶에 그저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고함 - 기타와 바보, <노래의 마음>
아픔을 노래하고 고통을 연주하며, 우리의 무관심과 부끄러움을 어루만지듯 찌르는 신보, 기타와 바보의 첫 정규 앨범 <노래의 마음>을 침잠하며 듣다.
미학자/평론가이자 기타리스트인 람혼(襤魂) 최정우의 연주와 목정원 작가의 담담한 노랫말만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얼핏 들으면 그저 감미로운 기타 선율에 서정적인 보컬이 더해진 담백한 포크 넘버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론가와 예술가라는 두 개의 만날 수 없는 정체성을 갖고, 평생에 걸쳐 그 둘을 접합하는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변증법적 시도를 해온 최정우답게, 비교적 덜 난해한듯한(?) 이번 작업 역시 이전의 Renata Suicide나 성무일도(Officium Divinum)와 같이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이론가로서의 사유와 예술가로서의 감성이 어떤 '감각'을 통해 접합되고 의식에 현상되는 미학적/정치적 체험을 제공한다.
그 감각이란 요컨대 세월호 사건, 사랑하는 이의 죽음, 차별과 폭력의 경험과 같은 '(목정원 작가의 표현 그대로)재현 불가능한 아픔'이다. 아픈 경험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것이지만 또한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감각 너머에 그 아픔을 표현하는 예술이 있고, 그 예술을 사유하는 이론이 있다. 이렇게 도식화하면 이론이 가장 상위의 개념처럼 들린다. 그러나 바디우가 말했듯 이것들은 서로 상하관계가 아니며 이중으로 환원될수 없는 각자 고유한 절차/형식이다.
그러나 이론이라는 것은 어쨌든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궤도에 존재하는 만큼, 가장 쉽게 탈색되거나 희석된다. 아픔을 잊은 채 아픔을 노래하는 예술을 건조한 개념으로 단순 환원하는 달필의 비평, 고통에 대한 감각 없이 사변만으로 구성해낸 무오한 이론 체계가 비평가와 이론가의 수만큼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가장 본원적인 휴머니티, 인간학적 감수성이 누락된 비평은 남의 피와 살을 팔아 제 배를 불리고, 타인의 창작을 먹이삼아 자신을 드높이는 지식 협잡질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기타와 바보의 두 예술가는 반대다. 너무 아프기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고 우연적인 운명에 내몰린 이론가들이다. 그들이 만나 몫 없는 이들의 '말 없는 아픔', '단념한 침묵'들, 우리의 무관심, 우리의 부끄러움들을 연주하고 노래한다. 그 지점에서 하나의 정치적 미학, 미학적 정치가 탄생한다. 금융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부조리, 반지성주의의 패악이 극에 달한, 경제학자 마이크 허드슨의 표현대로라면 '문명의 (파멸적)운명'이 도래한 지금, 이들과 같은 '단식광대'의 '입 없는 입맞춤'은 우리가 잃어버린 아픔과 연결의 감각을 쨍하게 환기해준다. 예술조차 자본에 종속된 시대이지만, 이것이 바로 마지막 남은 예술의 탈근대적 가능성이 아닐지. 많은 예술가들이 유아론적 세계관에 갇혀 자기만을 위한 창작을 하며 모더니즘으로 퇴행하고 있지만, <노래의 마음>은 잠잠할지언정 형형한 해방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 속삭임에 한껏 귀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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