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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 충돌한 혜민스님의 무소유

by HJH

나누기에서 종교 이야기는 사실 피하기 힘들다. 종교랑 정치 이야기는 하면 안 되지만 살짝 맛보기 정도의 생각을 말해보려고 한다. 모든 것은 개인 의견이니 나의 도그마에 오염될 필요는 없고 생각의 재료 정도로만 봐주면 좋겠다.


혜민 스님의 글귀를 참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긴 한다. 꼭 혜민 스님의 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인데, 종교학 공부를 오래 한 혜민 스님이 잘 모아놓았으니. 삶을 살아가는데 매뉴얼로 잘 참고 한다는 말이다. 집에도 혜민스님 말씀 달력과 출간하신 책이 거의 다 있고 선물도 많이 줬다. 다만, 언행일치의 사람이 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 말들에 대한 사색의 재료이지, 법정스님 혹은 성철스님 말씀만큼 와닿지는 않는다.

법정 스님이 수많은 인세를 다 기부하며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으심에 너무도 안타까웠었다. 인세던 아파트던 좋은 말씀 전하는 혜민스님이 잘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이 없었다. 대부분의 대중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혜민 스님이 다시 예전의 레벨에 도달하기 힘든 점은 딱 하나다. 무소유를 제창하면서 법정 스님이 남기신 아름다운 '무소유'의 개념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와 프린스턴대를 거쳤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더 큰 영예는 '수능만점'이다. 최근 수능 만점자도 살인을 저질러서 30년 이상 교도소에 수감될 판이다. 과거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재에는 성철 스님의 고행에서 온 최종 깨달음인 "우리 모두가 부처다"와 법정 스님께서 대중을 위해 '증명' 하신 '무소유' 정신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단순히 한 문장, 한 단어지만 평생을 바쳐서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고 해도 매번 새로움이 묻어 나올 것임을 안다. 그래서 다 같이 흉내라도 내며 매 순간 삶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불교에서의 신은 신이 아니다. 불교는 신으로 가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해탈이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불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을 뿐이지 사실상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보통 신을 믿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이 따른다. 조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논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교를 선택한다. 난 사업하시는 외가는 조계종이며, 고모들은 모두 독실하고 교회 짓는 분도 계시며 숙부님은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님이시다. 그래서 어제만 해도 어머니께서는 스님 말씀 이야기를 하셨고, 고모는 하느님 말씀 카톡을 보내신다. 양쪽 다 색깔이 아주 짙어서 종교 관련해서는 수많은 질문을 나에게 던져 봤는데, 대중은 싫어할지 모르지만. 난 기독교의 하느님을 믿고, 불교를 통해 삶의 진리와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는 개신교 외에도 수많은 분파가 있고 불교도 마찬가지인데 나처럼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가서 분파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정도는 괜찮은데 분파를 새로 만드는 것은 사실 뭔가의 개선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사실 좋아하지는 않는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성모마리아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 단 하나다. 이 차이 때문에 성례전, 성경 해석, 교황의 권위, 성인 숭배 등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유일신을 믿어야 하는 기독교 주장대로라면 천주교 사람들은 모두 지옥 간다. 실제로 일부 개신교에서는 천주교를 이단으로 간주한다. 같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인정하는대도 말이다. 머리 아픈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내 능력 밖이라 최상의 컨디션인데 할 게 없어서 심심할 때 조금씩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지 깊게는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종교 때문에 죽거나 사람을 죽어 나가는 지난 역사만 봐도 내가 감당하기 힘든 주제임은 파악이 된다.


이런 생각들을 베이스로 혜민 스님의 복귀는 사실상 환영한다. 그러나 유승준이 굳이 한국에 오지 않아도 이미 많은 꿈나무들이 유승준의 자리를 대체했듯이. 최근에는 법륜 스님 말씀에 푹 빠져 있기에 혜민 스님 행적은 예전 같지는 않다.


다만, 김소운의 특급품처럼 다시 복귀한 그의 행보는 응원한다. 무소유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법정 스님의 길보다는 풀소유를 하더라도 자신이 나아갈 길은 분명 또 존재할 것이다.

우리네 치열한 삶이 결코 스님들의 고행에 한 없이 못 미치는 수준은 아니라 대중에게 나온 스님들은 해야 할 것이 많다. 고행의 대명사인 성철 스님의 고행이 시장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나 평생을 다른 직업 못 가진 체 건물 청소하신 분의 인생에 비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성철 스님은 그에 걸맞은 명성을 얻었지만 다른 분은 그러질 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그 고행을 이해할 그릇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 모두가 부처라고 했을 때 그는 깨달음을 경지에 진정으로 이른 것이었고 또, 그것을 듣거나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느꼈다는 것이 부러웠다. 느끼진 못해도 따라 할 수는 있으니 모든 사람 안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점은 늘 상기하고 있다.


이런 내 생각은 남북 이산가족 당사자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일본 위안부로 피해 입으신 할머니들께서 대부분 하늘나라로 가시며, 전통시장이 계속해서 사라지거나 현대화되는 것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상황에서 던 새로운 인간다움이 있고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다. 이 글을 끝으로 더 이상 종교 관련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한다. 먼 훗날에도 이 글을 베이스로 출발한 생각이 뻗어갈 가지를 추정하며 나의 생각을 읽어주면 좋겠다. 오해라도 좋다. 어떤 모습이라도 나 또한 누군가의 사색의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혜민 스님처럼.


끝으로 법정 스님이 증명한 '무소유'는 더 이상 건들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나는 그러지 못하지만 내가 동경하는 무언가를 어쭙잖게 깨뜨리는 것은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끝으로 혜민스님의 건승을 바라며 앞으로 나올 책이나 구즈에 대한 구매 약속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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