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인 웃음과 즐거운 웃음
웃는 남자
동네 친구 스미레는 서럽게 웃었다.
재채기 소리를 들으면 우리가 아저씨가 된 걸 알 수 있어.
하긴 그와 만난 이유도 '막걸리'때문이었으니 '우리가 아저씨가 되어간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스미레는 공동구매로 '괜찮은 막걸리'를 얻었다며 원한다면 하나 갖다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좋다고 했다.
그는 퍽 잘 웃는다. 아니, 잘 웃어준다. 의식적으로 웃음을 짓는 것인지, 정말로 기뻐서 웃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의 웃음이 점차 기술적인 것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웃어야 할 일은 많다. 남들이 웃을 때 웃어야 모나지 않아 보이고, 타인이 웃기려고 던진 농에 제때 반응해야 센스 있는 사람이 된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자본주의의 미소를 항상 머금어야만 한다.
사람은 언제 웃는 것일까? 웃음은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심리학 책을 참고해야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해갈'에 가깝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마따나 웃으면 복이 오는 것 같기는 하다. 아니, 복이 온다기보다는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것 같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해결'을 필요로 한다. 해결을 하려면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이에 적합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들을 모색해야만 하는데, 애초에 문제를 피해버리면 이런 복잡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괜히 에너지 소비할 필요도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고 복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웃음에는 진심이 없다. 격투 게임에서 상대의 기술을 회피하듯 흘려버리는 셈이다. 여전히 타인을 때리려는 사람은 널렸지만 그저 씨익 웃으면서 속된 말로 유도리있게 잘 피하는 것이다.
나와 스미레는 그렇게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에 킬킬거리며, 이를테면 영화 해바라기의 김래원을 따라 하면서, 내가 웃는 것이 정말 웃는 것인지 의도적으로 웃는 것인지도 모르게 되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그저 웃는 남자가 되고 있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 냐!
이렇게 글을 마친다면 '해갈'은커녕 사랑의 감정이 메말라 '해골'이 될 게다. 그래서는 안 된다. 웃음을 앗아간 사회를, 경제를, 환경을 그리고 세상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렇지만 비판이 비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스미레의, 조금 더 좁혀 나의 진짜 웃음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한 가지 묘책을 떠올렸다. 물론 실패하고 좌절해서 더 우울해질 수도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말이다.
웃음은 일종의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오감을 통해 '재미있는 것'을 접수하고 뇌에서 판단을 하여 웃을만한 것이라면 빵! 터지는 메카니즘이다. 그렇게 보면 웃음은 수동적인 리액션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나를 웃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하지만 인간은(어쩌면 동물들도) 놀라운 기술을 쓸 수 있는데 그건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웃는 것.'이다. 말을 할 때 소리가 상대에게 전달되기 전 최초로 닿는 곳은 자기 자신의 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말하는 동시에 듣는다. 발화자이자 수화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재미있는 말을 내뱉는다면 최초로 웃음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나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웃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이에 대한 엄중한 책임과 윤리가 뒤따라야 하겠다. 스스로 자기 검열을 통해 '노잼 유우-머'를 걸러내야 하고, 상대에게 웃음을 강요해선 안 된다.(나만 즐겁다면 혼자 웃고 말아야 한다. 강요하면 부장님 유머가 되는 꼴이니)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줄만한 말을 삼가야겠지.
유우-머는 즐겁다. 즐거울 때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카페에 혼자 앉아 차를 마시다가도 문득 빵! 터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기술이 아닌, 진심의 웃음. 그런 웃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