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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ul 31. 2019

불확실성의 두려움 앞에서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를 읽고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

제여란 / 미메시스

20,000원



소장가치 9 / 트렌디 7 / 재미 5 / 정보 7 / 감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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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불확실성의 두려움 앞에서>

* 이 글은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의 리뷰보다는 개인적인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들어온 분들께는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평소에 가고 싶던 전시가 마지막 날이라는 소식을 듣고 주말에 미술관을 찾았다. 도슨트 시간에 맞춰 가서 40분 정도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함께 둘러보았다. 해설을 재미있게 잘해주셨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제여란 작가의 '어디든 어디도 아닌' 연작을 볼 때였다. 


(제여란 작가의)이 작품은 무엇이 연상이 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가 아니에요. 여러분도 그런 불확실함을 견뎌내셔야죠.


이상하게 이 말이 가슴에 남아 도슨트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 그림을 보다가 책을 사서 미술관을 나왔다.


어디든 어디도 아닌 연작 중 하나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는 도록이자 인터뷰집이다. 작품에 대한 평론가의 해설과 작가의 작업방식, 작품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실제로는 꽤 큰 작품인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라는 거대한 추상화는 책 속에도 프린트되어있었다. 내가 본 것은 단 두 점뿐이었지만 책에는 다른 연작 작품들도 수록되어있었다.


미술관에서 느낄 수 있는 원본이 주는 질감과 기운을 100퍼센트 재현할 수는 없었겠지만, 프린트된 종이 속 '어디든 어디도 아닌'을 나는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보나 규칙을 찾을 수 없는 그림 앞에서 나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알지 못하기에 알려고 해도 알 수없기에 두려움은 솟아나는 것 같다. 그림을 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나의 미래에 대해서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쪼그라든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월초에 계획한 목표를 채우기 위해 눈앞에 떨어진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큰 것은 놓치고 한 치 앞만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왕왕 생긴다.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서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잊고 다시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퇴근 후에 한없이 갑갑해질 때가 있다. 3년 후, 5년 후도 아니고 당장 다음 달도 잘 그려지지 않을 때 나는 문득 두려워진다.


이렇게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죽겠구나.


반전도 분기점도 없이 그냥 코앞만 보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면, 괜스레 억울해지고 산다는 게 무엇일까 괜히 청승을 떨게 된다. 허나 그림을 보다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스스로를 확실성의 세계에 가두고, 그 세계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 목표, 연 목표는 회사라는 확실성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나다. 내가 그만두거나 부득이하게 잘리지 않는 이상 나는 내년에도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성의 세계에서 한 발도 나가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일을 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패턴으로 살아갈 것이다. 허나 나의 삶에도 불확실성은 존재한다. 나는 내가 파주에 살면서 파주에 있는 회사를 다닐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맞나? 이게 맞겠지? 하면서 작은 선택들을 하다 보니 이곳에 있었고, 어쩌면 앞으로 수많은 선택들을 거쳐 지금 이곳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닿을 수도 있다. 불확실성의 세계 안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며 역으로 무엇이든 다 잃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불확실성이 데려갈 알 수 없는 곳이 두렵기도 하고, 지금의 것보다 더 나빠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현재를 욕하면서도 현재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변수는 불확실성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변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다. 리스크는 작든지 크든지 성공한다면 보상을 가져오고, 실패한다면 지금 가진 것조차 잃게 할 수도 있다. 나는 그저 억울했던 것 같다. 지금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많은 시간을 유예해왔는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무섭고 쓸쓸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그냥 죽기에는 너무 아깝지 아니한가. 당장 내일부터 나 하고 싶은 대로 가겠다며 무작정 나의 길을 갈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불확실한 방향으로 한 발 한 발, 발을 담가볼 생각이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리고 아무도 닿지 않는 곳으로 선선히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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