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증명-확신-자신감 사이클
10년전, 아니 5년전만해도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무슨 확신을 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믿음이 남들보기에 촌스러워 보여도 내 것이니까, 나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다녔다.
자신감이 사라지고, 내 안의 확신들도 사라지는 요즘, 내가 3-4년 전부터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땐 막연히 무언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는데, 사실 그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앞단의 프로세스부터 완전히 망가진 것이 아닐까 요즘에서야 의심이 들더라.
나는 장판파의 장비를 좋아한다. 오직 검 한 자루로 일대백으로 싸우는 사무라이를 좋아한다. 믿을 건 실력하나 뿐인 오디션 참가자도, 기본템로 풀템을 찍어누르는 게임 고수도 좋아한다.
아마도 내가 잊어버린 그 무언가는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는 ‘실력’에 대한 리스펙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태어나지 않기에, 그런 핸디캡도 극복할 정도의 실력을 나는 막연히 동경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도구만 생기면, 내가 환경만 개선되면 날아오를 수 있도록 기본 스탯을 올리려 노력했고, 그걸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방식에 문제가 있던 것 같다. 나는 끝없이 나를 채근했다. ‘그거 다 핑계야. 정신차려. 이럴 때 아니야.’하면서 나의 없음에 몰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과분한 문화자본과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는 교육자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늘 비어있었다.
어쩌면 피해의식일지도 모르겠다. 조건이 갖춰진다는 말은 허상 같았다. 내가 그 도구든 조건이든 가질 수 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맴돌았다. 욕심을 부리고, 나도 누릴 수 있다고 상상하고 쟁취했다면 업그레이드가 되었을탠데, 시작부터 앞서간 사람들을 어느 순간 따라가기를 포기했다.
첫 회사를 관둘 때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준내 커서 갑질하는 거래처가 될테다! 아니, 거래해달라 해도 안 해줄거야! 나는 몇 년 후 아무것도 아닌 백수가 되었고, 그 회사는 여전히 건재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니, 이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원래 세상이 다 그런거니까.
의욕도 의지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깨진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가설-증명-확신-자신감의 사이클이 깨졌기 때문일 게다. 실력만 있다면 어느 분야든 나를 알아봐줄 사람이 있을 거다 생각했고, 증명하지 못했다. 확신도 자신감도 있을 수 없다. 증명을 못했지만, 언젠간 다 부숴버릴 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도 시간이 지나며 삭아갔다. 그렇게 자기비난의 늪에 빠질 찰나 이젠 가설조차 세우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가설이 없다면, 증명해야할 것도 없다. 그러니 노력으로 끌어온 내 상태도 유지할 수 없다. 다운그레이드, 또 다운그레이드. 이젠 이런 말을, 아니 내 생각이나 고민들도 남에게 말하기 점점 싫어진다. 말할 수록 다 초라해지니 말이다. 하지만 허황되더라도 가설을 던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에 나는 달라질 테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핑계와 남탓 세상탓을 멈춰야 할 때다.
나는 새로운 가설을 만들 거다. 희망, 공감, 극복 같은 건 이젠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가 지금 할 수 있은 일부터 시작해볼 생각이다. 망하고 다시 쭈굴할지어도 노트를 펴고 다시 스타트를 끊을 셈이다. 삶을 포기하진 말자. 열등감에 쩔어서 못난 사람이 되진 말자. 그냥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