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사표를 냈다. 멘탈이 터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놨고, (주로 가족/어른들에겐) 괜찮느냐는 말보다는 다음 직장을 구했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던 어느 날이었다.(찡찡거림을 견뎌 준 분들게는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뿐이다.) 오전에는 임원과 면담을 했고, 밖에 나가면 직장 구하기 쉬운 줄 아느냐는 이야기를 듣다가 나왔고(물론 이런저런 고마운 말도 있었다.) 오후에 사직서를 제출했더랬다.
회사는 인수인계를 위해 휴가기간에 일해주기를 부탁했고, 첫 회사에 대한 애정과 아련 모먼트가 섞여 그러겠노라 했다. 나는 나름대로 로열티가 높다고 자부하는 직원이었고 다음 담당자님을 위해 동업자 정신을 발휘하여 빡세게 인수인계를 했더랬다. 시원섭섭섭섭섭섭하게 나의 첫 회사의 일은 마무리는 되었고, 혼자 청승 모먼트 터져서 벽 한번 만져보고 하늘 보고, 의자 한번 만져보고 하늘 보고 그러다 한분 한분 인사드리고 떠났고, 그 모습을 본 어떤 분은 출소하는 것 같다고 했더랬다.
운 좋게도 인수인계를 하는 사이에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와서바로 다음 주에 출근하게 되었고 이 또한 일복이며 인복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내겐 나흘이 주어졌다.
원래는 국내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2013년 12월 겨울왕국이 한창 렛잇고 열풍을 몰아칠 때 제대를 하고 마침표 여행 갔던 것이 생각나 그곳으로 가려했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야만 할 것 같은 곳 영주 부석사가 그곳이었다. 마침 영주 사과축제 기간이었고 의도치 않았지만 풍류를 쌉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다 타버리고 나서
짐을 싸고 청량리로 가는 길에 몸이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속이 계속 좋지 않았고, 편두통이 오고 속이 볶였다. 나는 그대로 내려 반대쪽 승강장으로 가 집으로 돌아왔다. 숙소도 계획도 없었기에 잃을 건 없었다. 그치만 그대로 내리 3일을 약 먹고 누워있었고 자고 (왠지 휴일이 아까와서) 께임하고 다시 자며 간만의 연휴를 잃어버렸다. 나갈 힘도 바꿀 힘도 없어 나를 방치해두다 보니 일요일이 되었고, 출근하기 전에 뭐라도 하자는 생각에 좋아하는 카페 '서양미술사'에 나왔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상황이다. 해야만 하는 일들에서 나를 잃어간다는 생각은 수백 번 했지만 무엇을 해야 나를 되찾을지, 되찾을 내가 없다면 무엇을 해야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지 몰랐고, 계속 헤매는 중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미 다 타버린 모양이었다.(남일처럼 얘기하는 건 잘 몰랐기 때문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 번아웃 증후군 극복법을 검색하다가, 기토 일간과 사수자리의 11월 운세를 검색하다가, 동기부여 영상을 수없이 돌려보다가 했다. 그런다고 고갈된 의욕이 생기진 않더라.
그러다가 문득 내 인생에서 마감과 루틴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와는 별개로 내게는 언제나 대여섯 개의 마감과 루틴이 있었고, 그것들이 결과물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기꺼이 했더랬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회사에 매몰되며 사라진 나의 작은 프로젝트들은 이제 남은 게 하나 없었다.
# 마침표를 찍어보자.
프로젝트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전히 월 1회 독서모임 느빌을 하고, 글리프 독립잡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곧 론칭할 책방 표사라는 팟캐스트 첫 회 녹음을 마쳤다. 다만 내가 이 모든 일들을 지킬 힘이 없을 뿐이었다. 전 회사 정리하고... 새 회사 가서 배우고... 하는 이유로 미루고 미루고 있지만 부족한 건 시간이 아니라 시도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있었다.
표정이 잘 펴지지 않는 요즘 컨디션에서 텐션을 쭉 뽑아내며 사이드 프로젝트를 잘할 거란 자신이 없다. 그치만 그럼에도 다시 하고는 싶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하고 싶다.
이건 번아웃과 첫 직장(퇴사 이후 여전히 매일 회사 꿈을 꾼다.)의 마침표를 찍고 다시 무언가 해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글이다. 동아줄을 잡으려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어찌어찌 줄을 잡았으니 이젠 매달려있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흔들든 떨어지든 올라가든 다시 흔적을 만들고 싶다. 새로운 곳에서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나의 기록들을 다시 편하고 즐겁게 사람들에게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다짐이 낯선 것을 보면 그간 나는 나 자신을 많이 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시 킵 허쓸할 생각이다. 킵 프로페셔널 해질 때까지 루틴을 세우고 즐겁게 일을 벌여볼 생각이다. 이번엔 지치지 아니하도록 나를 아끼며 나아가고 싶다.
앞으로 막 연재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리뷰도 하고 내 글도 쓰고 그럴 거임ㅇㅇ 다시 힘내어 가보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