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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an 21. 2024

[PIMO] 드미트리 노트

스토리 레시피북 실전 예시

unsplash.com


*

옆집의 드미트리가 사라졌다. 마을에선 그가 나치와 내통을 하던 스파이였다는 소문이 돌고있었다. 내가 아는 그는 행여 고발을 당할까 서기장 스탈린 동무의 이니셜 하나 입에 올리지 못하는 한심한 위인이었기에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아니다. 드미트리가 체제전복을 추동한 간첩이라니 해가 서쪽에서 뜨고 소가 알을 까는 일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A마을의 방범대장 율리이가 아침부터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인, 마지막으로 드미트리를 본 게 언제지요?”

“언제긴요. 어제였죠.”

“어제라면 언제쯤 보았지요?”

“저녁을 준비할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요.”

“혹시 그가 수상해보이는 행동이나 말이나 한 것이 있을까요?”

“근데, 진짜로 드미트리가 나치의 스파이인가요?”


그는 수첩에다가 무얼 적으며 묻다가 스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표정으로 답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시지요. 동무.”

나도 굳이 의심을 살 필요가 없었기에 무표정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답했다. 


“평소랑 똑같았어요. 그 친구는 늘 같잖아요.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제 할 말만 하고 가는 거.”

“부인의 집에는 왜 찾아온 거죠?”

“내가 우리 집에 그가 왔다고 했나요?”

율리이는 당황한 듯 답했다. 


“아… 아뇨. 그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무슨 이야기요? 누구한테요?”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가…”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듣고 온지는 모르겠지만, 난 간첩이 아니에요.”

“부인.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모욕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미안합니다.”

그는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선심을 쓰듯 말을 이었다.


“드미트리가 우리 집에 온 건 맞아요. 그가 잉크를 빌려갔었거든요.”

“잉크요?”

“그 양반이 소설 쓰는 걸 A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잉크가 떨어졌다며 빌려갔던 걸 돌려주러 왔더군요.”

“혹시 그 병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율리이에게 자못 짜증이 섞인 기색을 드러내며 잉크병을 가져와 건넸고, 그는 이리저리 그것을 살펴보더니, 수첩에 한 번 써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답했고 휘갈겨 쓴 ‘율리이’라는 검은 글자가 마를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배급날인거 대장도 아시지요? 늦어서 쥐꼬리 만큼 받으면 책임…”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난처하다는 듯이 내 말을 중간에 끊고는 잉크병을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드미트리가 살던 집 쪽을 보았다. 벌써 군경찰이 파견되어 그의 집을 샅샅이 털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찾는 물건은 아무리 탈탈 털어도 나오지 않을 게다. 그가 내게 건넨 노트는 나한테 있으니 말이다. 


*

“이반나. 문 좀 열어봐요.”

“문 부서지겠어요. 무슨 일인데요?”

드미트리는 문이 열리자마자 제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던 종이 뭉텅이와 빌려갔던 잉크병을 내 손에 건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받은 것을 한 번 내려보고나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안경 아래쪽에는 김이 서려있었고, 좀생이 같은 콧수염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는 사냥감처럼 보였다. 


“이… 이걸 이어서 써주세요.”

“네? 뭘요. 이걸요? 이게 뭔데요?”

그가 준 것은 가죽으로 표지를 댄 노트였다. 첫 장을 펴보니 종이 한 가운데에 ‘우주의 책 7’이라고 쓰여있었다. 


“그… 그 책은… 쓴 내용을 현실로 만… 만들어 줘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뒤는 이… 이반나에게 맡길게요. 부… 부탁해요.”

“아니… 뭘 맞긴다는 거예요. 우주의 책은 또 뭐고.”


드미트리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이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쓴 내용을 현실로 만들어준다니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노트를 펼쳐보았다. 


나는 1943년 소비에트 연방 000지구의 A마을에 사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베르호벤스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천식으로 동부전선으로의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소설가다. 말을 조금 더듬거리고, 자신감이 없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 


등장인물 소개를 적어놓은 것 같은 초반부의 내용은 드미트리의 이야기였다. 나는 내심 ‘거창하게 우주의 책이라고 쓰여있어서 대단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일기였어?’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은 A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레프 톨스토이처럼 연방 사람들 누구나 알 수 있는 작품을 낸 유명인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서기장 동무부터 변방 마을의 꼬마 여자아이까지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투표권을 행사해 세계의 모든 사안을 이로운 방법으로 만들어간다는 지루하고 교조적인 유토피아이야기였다. 그가 바라는 작가로서의 이상이 어느 정도인 줄은 모르겠지만, 크게 될 사람은 아니란 건 문학에 문외한인 나도 알 수 있던 책이었다. 차라리 자기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마을 사람들을 작품에 출현시키는 편이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가는 문이 닫히기 전에 이 전쟁을 막아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도박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 하루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전쟁을 끝낼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이반나가 주인공이 되어 미래를 되찾을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보고는 기가 찼다.

‘고작 이만큼 써놓고 뒤를 이어 써달라고? 갑자기 전쟁을 끝낼 방법을?’ 나는 괜히 드미트리가 괘씸해졌고, 그의 문장 뒤에 이렇게 적고 밑줄까지 그었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가는 문이 닫히기 전에 이 전쟁을 막아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도박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 하루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전쟁을 끝낼 것이다. 일단 이반나에게 돌아와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다시는 이상한 짓 안 하겠습니다.”라고 사죄를 한 다음에 말이다. 


그 다음에는 펜을 놓고 내 마음대로 상상을 했다.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야 많았다. 히틀러가 장염으로 화장실을 다니다가 탈진해 죽는다면? 하늘에서 산성 우박이 쏟아져 온 세상의 모든 탱크와 전투기와 무기를 못 쓰게 만든다면? 이 세상의 모든 국가들이 국경을 없애고 하나의 나라로 통일된다면? 문제는 소설 같은 얘기나 가능한 것이지 현실화될 수는 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이었다. 괜스레 드미트리가 왜 유토피아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스푸틴이 무덤에서 일어나 달나라에서 탭댄스를 추는 상상까지 나아갔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어보니 드미트리였다. 그는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왜 또 왔어요? 이상한 일기 같은 거나 던져놓고…”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이마를 바닥에 대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이상한 짓 안 하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러지 말라며 그를 부축해 일으키자. 그는 ‘이럴 때가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흘끗 째려보고 다시 숲으로 뛰어갔다. 다시 멀어져가는 그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뒤를 돌아 책상위에 놓인 노트를 봤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새로 쓴 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정말인가?’



 *

율리이가 돌아간 뒤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급하게 옷을 갈아입다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 가봐야 이미 줄이 길게 늘어져 있을 터였다. 정오부터 배급이 시작되었지만, A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저마다 집에서 그릇이며 양철통이며 들고 광장에 나와 기다렸다. 군인들은 공산주의의 공자도 모르는 천치들이었다. 언제 줄을 서도 동등하게 배급받는 차별없는 마을을 만들어야할 터인데, 성의 없이 눈대중으로 툭툭 던져주는 그들의 분배는 언제나 불평등했다. 초반에는 감을 잡지 못해 덜컥덜컥 담아주던 양은 뒤로 갈수록 행여 못 받는 사람들이 생길까 처음에 반도 안 되는 양을 덜어주곤 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받는 인민 입장에서는 퍽 원망스러운 행태였다. 마을 사람들이 방범대장과 마을대표를 통해 시정을 요구했지만 군인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남편이 동부전선으로 징집된 후에 혼자 생활을 꾸리면서는 배급이 많을 필요는 없었지만, 식량은 언제나 다다익선이었다. 먹고사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어제 내게 절을 하던 드미트리를 떠올리며 속는 셈치고 노트를 펼쳐 그의 문장 아래에 한 줄 적었다. 


남은 이야기는 이반나가 주인공이 되어 미래를 되찾을 것이다.

나는 배급을 가장 먼저 받고, 양은 평소의 2배로 받는다. 


글이나마 희망사항을 적으며 그 상황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잉크가 빨리 마르도록 후후 불었고, 노트를 펼쳐둔 채로 나와 광장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마을 인민들의 행렬은 광장 중앙의 분수대를 지나 예브게니 목공소까지 이어져있었다. 달리 말하면 거의 꼴찌나 다름없다는 의미였다. ‘그럼 그렇지.’ 하며 나는 맨 뒤에 줄을 섰다. 각목과 톱이 널브러진 채로 있는 것으로 보아 목수들도 진즉에 줄을 선 모양이었다. 광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해도 그들이 항상 선두를 선점하는 건 아니었다. 대개는 아이를 키우는 부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와 그들의 배급에 대한 절박함의 농도는 비교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늦을 줄 알았다면 소일거리 할 것이라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으로 율리이 대장이 지나갔다. 나는 원망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도 내 시선이 의식되었는지 내 쪽을 흘긋 보더니 눈을 피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범대는 인민이 아닌 군인들의 배급을 나눠썼다. 줄을 서지 않고도 무언가를 받아갈 수 있다는 특권을 그는 숨쉬듯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는 게 어쩐지 괘씸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급조 옆에 있던 군용텐트로 들어갔던 율리이가 갑자기 내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체렌스키 부인. 잠시…”

“지금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요?”

나는 까칠하게 대꾸했다. 


“뒤를 보세요. 서나 마나인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따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지금 놀리는 거예요? 누구 때문에…”

율리이는 입에 검지를 가져가며 왼손으로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설마… 정말로?’ 나는 드미트리의 노트를 떠올렸고, 마치 예언처럼 그것에 쓰인 내용이 현실로 이뤄졌다. 대장은 자신 때문에 배급이 늦어진 것이 미안하다며 텐트로 데려가 군인용 배급분을 넉넉하게 빼주었다. 거의 두 명 분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띌까 텐트 뒷문으로 빠져나와 골목을 걸어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노트라면. 내가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것도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요일이었다. 누군가 새벽부터 문을 두드리는 통에 잠이 달아나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분명 문 밖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데 아침부터 장난을 하고 있어요?” 하며 나는 문을 열었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나야.”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있어야할 표트르가 정복에 더플백을 메고 서있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양팔을 벌렸고, 어쩔 줄 몰라 눈물만 흘리는 나를 안아주었다. 이번에도 노트는 정말 신통하게도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비단 일주일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내 남편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체렌스키가 사지 멀쩡하고 건강하고,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드미트리의 노트를 쓴 이후로는 만사가 순조로웠다.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원하는 것은 모든지 얻을 수 있었고, 원치 않는 것도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표트르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전장을 다녀온 후에 그는 어딘가 달라져있었다.

나는 이따금 동부전선에서의 일을 들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끔찍한 꿈이라도 꾼 듯이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동부전선의 상황을 내게 자세히 들려준 쪽은 외려 율리이 대장이었다. 한 번은 우물에 물을 긷기 위해 양철 양동이를 들고 나서다가 그를 만났다. 그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체렌스키 소령 부인”

“좋은 아침이에요. 소령은 왜 붙이는 거죠?”

“그야. 전쟁 영웅 표트르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싶어서지요.”

표트르가 사병으로 입대해 영관까지 진급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한다. 율리이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표트르는 맨몸으로 독일군의 타이거 전차를 12대나 폭파했고, 스탈린그라드 시가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소년병 40명을 구출해냈으며, 겨울 폭풍 작전을 지휘해 잔악한 나치의 침략을 막아냈다고 한다. 소령은 어림도 없고 스타까지 받아야할 전공이지만 출신 때문에 진급길이 막힌 것이 애달프다고 그는 덧붙였다.

“중요한 건 소령이 되든지 스타가 되든지가 아니에요. 그이가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으로 충만한 감사를 할 일이지요.”

나는 그의 찬양에 괜히 으쓱하여 기분이 좋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그는 조만간 자신의 집에서 전쟁 영웅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시라고 답하며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너무 쉽게 얻은 행복은 너무도 빠르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며칠 사이에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표트르의 불안 증세는 점차 심해졌다. 잠을 자다가 쿵쿵 소리가 들려 옆을 보니 그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있지를 않나, 허공에 대고 독일어로 누군가 대화를 하고 있질 않나. 갑자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화장실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일도 벌어졌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를 안아주고 진정시키는 일 밖에 없었다. 의원에게 데려가도 표트르가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마땅찮아보였다. 아직 전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것일 테다. 나아질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A마을 공동노동 집중기간에도 참전용사 표트르는 열외였기에 그의 바닥 친 모습을 오직 나만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밭으로 나가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용감함을 상찬했고 나도 그 얘기를 듣는 게 퍽 좋았다. 평소처럼 분배한 수확물을 들고 돌아온 어느 저녁 우리 집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와. 이 반동놈의 새끼야!”

“난 안 했어. 아무 것도 안 했다고!”

“뭐해. 빨리 끌고 가!”

헌병이라는 견장을 찬 군인 두 사람이 양쪽에서 표트르의 팔을 잡고 집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팽개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갔다. 그러자 세 사람은 내쪽을 보며 잠시간 행동을 멈추었다. 


“당신들. 뭐하는 거예요!”

나는 헌병들이 남편을 잡은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가 누군지 알아?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체렌스키 몰라?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느냐고!”

그러자 오른편에 있는 상급자로 보이는 이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진정하시지요. 부인.”

“지금 진정이 되겠어요? 빨리 그 팔 안 놓아요?”

“제 말을 들어보시지요.”

“그 팔을 놓으면 들어드리겠어요.”

이번엔 왼편에 있는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병사가 덧붙였다.

“도주 우려가 있어서 그건 어렵습니다.”

“전쟁 영웅으로 칭송할 때는 언제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요!”

“그러니까 부인. 잠깐만 진정하시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표트르. 당신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표트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흘끗보더니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부군께서, 아니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체렌스키가 내통을 한 정황이 파악되어…”

“네? 내통이요? 그이가 간첩질을 하는 스파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런 것인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고…”

“사람을 스파이로 몰아가는 건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당의 결정입니다. 우선 취조… 아니 조사를 해보고, 아니라면 무사히 귀가하실 겁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옆집의 드미트리도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나는 이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빈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미트리라니요?”

상급자는 내가 가리킨 집을 보면서 되물었다.

“드미트리. 이젠 기억도 못한다고 말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처음 들어봅니다. 부인. 피에르 자네도 들어봤어?”

“이곳에서 일생을 살았지만 처음 들어봅니다.”

“이젠 한 사람의 존재까지 지워버리는 거예요? 이러고도 그저 조사만 받는 거라고 거짓말 칠 거예요?”

실랑이가 길어지고 있자 멀리서 율리이 대장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시끄러운 언쟁이 오가는 통에 인민들이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불렀다. 


“율리이 대장!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어휴. 헉. 잠시만요. 체렌스키 부인.”

그는 꽤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글쎄. 이 군인들이 갑자기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표트르를 잡아가고 있다고요.”

“네. 저도… 사정은… 후. 대충은 들었습니다.”

숨이 아직 덜 돌아왔는지 율리이의 말에는 여백이 많았다. 나는 그가 체포를 막아설 수 있도록 한층 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이를 드미트리처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고요.”

“드… 드미트리요?”

“대장도 드미트리를 모른다 할 겁니까?”

그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누굽니까?”

“저 집에 살다가 사라진 드미트리요! 천식이 있어서 만날 콜록거리고, 소설 쓴다고 종이랑 펜을 들고 다니던 남자요. 그 일로 우리 집에도 왔었잖아요. 배급날이었고, 늦게까지 조사하느라 미안하다고 군배급까지 챙겨줬잖아요! 기억 못한다고요?”

헌병들이 순간 율리이 쪽을 일제히 쳐다보았고, 그는 눈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얼버무리면서 화제를 돌렸다. 


“체렌스키 부인. 지금 이렇게 막아서시는 건 공무집행 방해입니다. 저분들은 부인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존중? 단체로 거짓말을 하고 표트르를 잡아가는데 존중이요?”

“만약에 표트르가 참전용사가 아니었다면.”

율리이는 잠시 말을 멈추며 표트르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이어갔다.

“부인도 공무집행 방해로 함께 체포했을 겁니다. 그러니 당을 믿고 조사를 받게 해주시지요.”

“표트르. 당신이 변명이라도 해봐요. 이게 무슨…”

표트르는 그저 바닥만 보고 있었다. 율리이가 나를 집 안으로 데려가는 동안에도 그는 한 마디 말하지 않았다. 


“잘 될 겁니다. 저라면 표트르를 믿어보겠어요.”

집을 떠나면서 율리이가 던진 한 마디가 마음에 맴돌았다. 분명 표트르를 믿는 마음은 있었다. 믿지 못하는 건 당의 결정이었다. 집행하는 이들이 드미트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기억에서 삭제해버렸듯 표트르도 세상에서 지워질 수 있었다.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었다.

오랜만에 드미트리의 노트를 폈다. 그리고 무언가 발견했다. 물을 흘렸는지 노트의 앞부분, 드미트리가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이 번져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을 수가 없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고, 새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체렌스키가 헌병 조사로부터 무죄를 판명받고, 건강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온다.


표트르가 돌아온 건 사흘 후였다. 나는 집 뒤편 공터에서 감자의 흙을 씻어내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소쿠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뒷문을 여니 그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눈은 퀭했다. 마치 생선처럼 눈을 깜빡이지도 않으며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은 살짝 벌어져있었다. 나는 내가 예고한 미래를 보는 일이 이젠 익숙해져서일까 소쿠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며 뒤를 슬쩍 보니 그는 벽에다 대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표트르가 이렇게 변하는 데에 필요했던 시간은 고작 2년이었다. 평범했던 광부였던 그에게는 쉬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을 게다. 나도 표트르도, 아마 A마을 사람들 누구 하나도,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당을 위해, 국가를 위해, 연방을 위해 같은 말은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징집된 이들이 마을로 돌아온다면, 우리가 ‘평범한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망가지고 부서져 삶의 궤적이 원래 길에서 한참이나 이탈한 이들의 삶을 누가 책임질까? 아무리 표트르처럼 전공을 많이 세웠다고 해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관료가 되어 팔자를 펴고 출세할 가능성은 있을 리도 만무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우리는 소모품이 될 걸 알면서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늘 저녁 스튜는 조금 짤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도 남편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하루 온종일 의자에 앉아 있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를 혼자 두고 이제 막바지로 접어든 공동노동을 하기 위해 나서는데 광장 쪽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공연히 궁금해졌고, 집합 시간은 아직 남았기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러나세요. 물러나세요.”

마을 사람들은 가운데에 무얼 두고 빙 둘러싼 모양새로 서있었고, 군인들과 마을 방범대가 인민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건 여러 사람들의 괴성과 같은 울부짖음뿐이었다. 마침 안쪽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오고 있던 제분소 집의 다리나를 발견했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사람이 모여 있대요?”

“이반나. 이반나군요. 아이고. 어떡한답니까.”

다리나는 벌써 한참을 울다가 왔는지 새빨개진 눈으로 훌쩍였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그런데요?”

“니… 니콜라이 아저씨가 죽었어요…”

“목수 니콜라이 아저씨 말이에요?”

“네… 어젯밤에 갑자기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아저씨를 끌고가더니…”

“그래서요?”

“나치놈들이랑 붙어먹었다고… 방금 전에… 즉… 즉결…”

“즉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도대체.”

그가 다시 감정이 올라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우는 통에 뒤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리나를 두고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팔짱을 끼고 스크럼을 짠 군인들 사이로 천에 싸인 시신 한 구가 수습되고 있었다. 흙바닥을 따라 붉은 피 웅덩이는 번져갔고, 하얀 천마저도 서서히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공교로웠다. 너무나 공교로워서 구역질이 났다. 입을 틀어막고 발걸음을 재촉해 다시 집으로,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표트르에게 그 사흘간 있던 일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것을 보고 말았다. 빙글빙글. 혀를 길게 늘어놓은 채로 공중에서 힘없이 휘청거리고 있는, ‘표트르였던 것’을 말이다. 



미안합니다. 니콜라이 아저씨.

미안합니다. 이반나.

미안합니다. 모두들.

빨리 돌아오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저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체렌스키는 지옥에가서도 사죄를 구하겠습니다. 


율리이 대장이 남편을 수습해가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에 앉아있었다. 그가 노트에 남긴 유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해가 다 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들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았지만 단 한 사람, 니콜라이 아저씨를 잃은 엘리자베타 아주머니만 나무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내 뺨을 후리고, 또 후리고, 다시 한 번 후렸다. 나는 속절없이 맞았다. 그 손을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내 얼굴을 응시했다. 시뻘건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더 짜낼 눈물도 없어보이던 그는 한참을 보다가, 이내 나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뚝이 터진 듯 그간 참아왔던 내 안의 울음도 쏟아져 나왔다.

엘리자베타 아주머니를 부축해 집까지 바래다 드리고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반복해서 쓰인 ‘미안합니다.’라는 문장을 보다가 다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검은색 잉크로 쓰인 그 글자가 번지며 뭉개지기 시작했다.

‘설마…’ 나는 재빨리 노트의 맨 앞을 들춰보았고, 경황이 없어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표트르가 책상 위에 있던 내 노트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사실이었다. 쓴 내용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우주의 책, 우주는 표트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만 것이다. 이게 다 그 노트 때문이었다.

남편이 격전지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갑자기 A마을로 귀향한 것도, 빨리 돌아오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그를 대신해 니콜라이 아저씨가 총살을 당한 것도, 그가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것까지도 결국은 다 쓰인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설령 그 모든 것이 우연이 겹쳐 생긴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었다.

모든 걸 처음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런데 맨 처음 내게 노트를 준 사람. 그… 누구였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모든 것을 돌릴 수는 없다라지만, 내가 벌인 이 사달을 수습을 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우주의 책이라도 이미 죽은 이들을 되살릴 수는 없을 터이기에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엘리자베타 아주머니의 슬픔이 사라진다. 


다음 날 엘리자베타 아주머니와 그의 아이들은 니콜라이 아저씨와 같은 죄목으로 공개처형을 당했다. 


A마을에 스파이는 없다. 더 이상 적과 내통한 죄로 죽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날 저녁 자율방범대의 율리이 대장은 연달아 벌어진 인민들의 죽음에 대해 치안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을 내 분란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내란죄 명목으로 처형당했다. 


군인들이 철수하고, 마을 안에서 죽는 사람이 없어진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을에 주둔하던 소련병사들도 동부전선에 투입이 결정되었다. 그들이 철수하면서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가 싶었지만, 흉흉해진 분위기에 집을 버리고 떠나던 로만 씨네 가족이 마을 밖 10km 정도 떨어진 숲에서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전장에서 탈영한 소년병 세 사람이 두려움에 난사한 총에 비극이 벌어졌다고.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할수록, 고쳐보려 할수록 사람들은 죽어갔다. 잘 되게 하려고 한 건데,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조치한 것인데 의도와 결과는 번번이 어긋났다. 나는 어느새 펜과 노트만으로 거진 열 명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있었다.

엘리자베타 아주머니의 일가가 사라지던 때의 죄스러움은 만회해야한다는, 내가 하루 빨리 평화를 복구해야한다는 강박에 희미해져 갔고.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했다. 주에 한 번 있던 배급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기에 모두의 몸과 마음은 각박해졌고,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까지 흉흉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공책의 여백은 단 한 줄을 쓸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과오를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사실 단 하나 뿐이었다. ‘지옥에 가서 사죄하겠습니다.’ 더 살아서 무엇 하나 싶었다. 


노트를 앞장에서부터 찬찬히 넘겨보았다. 다 번져버린, 내게 노트를 준 이름모를 사람의 기록부터 나의 조잡한 소원들, 표트르의 마찬가지로 글이 번진 유서. 그리고 되돌려보려고 간절하게 우주에 기도했던 순간들이 시간 순으로 쓰여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꼬인 걸까. 되뇌며 복기를 하며 문득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면서 단 한 번 밖에 ‘나’를 주어로 문장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남편이 바뀌기를, 엘리자베타 아주머니가 나아지기를, 군인이 철수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 내가 바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배급을 빨리, 두 배로 받게 해주세요.’가 나에게 바란 유일한 변화였다. 이제와 나를 바꾸는 마지막 선택으로 자살을 택하는 건 너무 비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문장만은 나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께서 비루한 나에게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노트를 받아든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한다면, 올바른 미래로 돌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속죄의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움직여 A마을을 구해낼 것이다. 단 한 번만 기회를 주기를 바라며 마지막 문장을 적어갔다. 어느새 죽고 싶은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 노트가 백지였던 시간으로 나, 이반나 미하일로브나 체렌스키를 보내줘. 



이 문장을 적고나서 바로 노트에서 빛이라도 나며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나는 밖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기위해 뒷문을 열었다. 줄을 거둬서 마지막 가는 길에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땐,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평생 본 적 없는 생경한 풍경이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는지 저 멀리 폐허가 된 마을이 보였다. 아니, 도시라고 해야 할까. 집이라고 하기엔 구름에 닿을 듯 건물들이 솟아있었다. 나도 표트르도 수도는커녕 도시에 가본 적이 없었기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상상했던 그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왜? A마을도, 내가 바라 마지않던 과거가 아니라 이곳이 나타난 것일까. 나는 일단 외투를 걸치고 노트를 챙겨 문밖을 나섰다. 그곳에 도달한다면 내가 찾고자한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문밖은 광산의 복판에 서있는 듯 공기가 탁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걸어가는 내내 몸 곳곳이 간지러워서 긁지 않으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A마을처럼 사람 하나 없이 황량했다. 여기저기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기계들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이따금 사람의 뼈처럼 보이는 것들도 보였다. 


좀 더 걸어가니 멀리서도 높다랗던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을 위로 열 채, 아니 스무 채는 올려도 닿을까 말까한 웅장한 크기였다. 마치 닭장처럼 비슷비슷한 패턴으로 창이 달린 그 건물은 누가보아도 부서져있었다. 타이거 전차의 포격을 맞은 것처럼 타격 받은 곳이 파여 있지는 않았지만, 온 유리창이 다 깨져있었고 거뭇한 때가 건물 전반에 묻어 있었다. 방치된 마을이라면 담쟁이넝쿨이라도 자랐으련만 이 근방은 잡초 하나, 개미 한 마리조차 생명의 흔적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순 없었다.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비슷한 모양새로 망가진 채 방치된 그 길을 걷다가 멀리 움직이는 흰색 덩어리가 하나 보였다. 나 외에 단 하나 움직이는 생명체였고, 척추가 기립해 있는 것이 동물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손을 흔들면서 그것을 향해 뛰어갔다.

“여기요! 여기 좀 봐요!”

내가 내지른 소리는 쩌렁쩌렁 공간을 가득 메웠다. 메아리치듯 “여기요! 여기 좀 봐요!” 하는 소리는 몇 차례 잔향과 함께 그것이 있는 곳까지 전달되었다. 흰 색의 그것은 뒤를 돌아 내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무언가를 뒤집어 쓴 인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의 앞에까지 달려갔고, 투명한 창 너머 그 얼굴을 확인 했을 때는, 뇌리를 관통하는 기시감에 온몸이 떨렸다. 그는… 내게 노트를 주고 사라진 그 사람. 비로소 기억해낼 수 있던 그 이름,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

그는 잠수복처럼 얼굴만 투명한 유리창을 덧대고, 나머지는 이불을 꽁꽁싸맨듯 부해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숨을 쉬었는지 그의 얼굴 앞에 김이 서렸다. 그러더니 이내 근처에 풀어놓은 가방 쪽으로 총총총 달려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어서 써요. 이러고 온 거예요?”

그가 건넨 건 방독면이었다.

“더 늦기 전에 빨리 껴야만 해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내 얼굴에 방독면을 씌우고는 뒤통수 쪽에 달린 고무줄로 단단히 조였다. 시야가 좁아지고, 호흡도 어려웠지만 정화통을 거쳐 들어오는 공기는 전보다 한결 나았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나에게 이 노트를 주고 갔는지. 그간 어디에 있었는지. 내가 쓴 모든 것들을 다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있는지.

드미트리는 나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내가 들고 있는 노트를 빼앗듯이 가져가 읽기 시작했다. 김이 서린 유리창에 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장까지 내용을 읽고 나서는 공책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간 뜸을 들이더니 말을 꺼냈다. 


“이반나. 당신이 그린 미래는 이런 거였나요?”

눈빛만으로도 그는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소용없어요.”

“내가 여기까지 왔잖아요. 모든 걸 처음으로 돌릴 수 있는 거죠?”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책의 표지에 각인된 이름, ‘우주의 책 7’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벌써 일곱 번째 같은 선택을 했거든요.”

“그… 그럴 리가…”

“나는 이반나의 시대부터 벌써 200년 째 이어지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당신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하지만… 내게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았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전쟁이 끝나길 가장 바라는 사람을 찾아간 거였어요.”

“내가요?”

“그렇다고 믿었죠. 1942년에 머물 수 있는 건 단 5분뿐이거든요. 그나마도 이번엔 당신이 이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영영 과거에 갇힐 뻔했다고요. 어쩌면 시작부터 실패는 결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단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젠 끝났어요. 그 종이를 만들 수 있는, 바로 여기에. 이번에는 핵이 떨어졌거든요.”

드미트리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말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사람을 믿은 게 잘못이었나 봐요.” 나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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