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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an 20. 2023

(작년) 베스트셀러에서 찾은 세 가지 키워드

'안전공간' '유대' '조연'

* 얼룩소에서 연재하는 글을 아카이브 목적으로 브런치에 모아둡니다.

* 브런치에는 시간차를 두고 업로드 예정이기에, 실시간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주세요.

https://alook.so/users/RKtj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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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의 신간과 독자들의 신간은 다르다


12월이 되면 올해는 어떤 콘텐츠가 있었지 떠올리며 찬찬히 톺아본다. 출판계에서 일했기에 특히 '책'에 관해서는 올해는 어떤 책이 사람들의 선택을 받았고, 사회에 영향을 주었을지 꼼꼼히 살펴보곤 했다. 수년간 서점들의 베스트셀러를 혼자 분석하며 알게된 포인트가 하나 있다면 바로 '신간'에 대한 개념이다.

신간은 새로 간행된 책을 의미한다. 업계에서는 길게는 3개월 이내 출간된 도서를 칭한다. 매일 수십, 수백 종의 책이 쏟아지는 출판시장에서 마케팅이든 광고든 홍보든 신간에 집중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한정적이기에 마케터들은 서점의 메인에 노출되려고 노력하고, 오프라인에 광고판을 세우고, SNS에 홍보를 하며 독자들에게 신간이 더 발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모든 책이 '신간'일 때 발견되는 건 아니다. 다독가나 사서, 출판업계, 인플루언서, 방송국 사람들 등 매일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출판사와 서점이 준비한 타임라인에 맞춰 책을 만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독자들은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서점에 방문하거나, 주변 사람이나 SNS에서 추천을 받거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거나 하는 순간에 '책'을 만난다. 판권면에 쓰인 출판일자보다 중요한 건 '독자가 책을 만나는 시점'이고, 독자들에게 '신간'의 의미는 새 책이자, 책을 만난 순간이 된다. 때문에 '신간'의 개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독자들에게 발견되고, 읽힐 때야 비로소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탭을 눌러보면 올해 사람들이 발견하고, 선택한 콘텐츠들이 나온다. 2022년 출간 도서가 대부분이지만 이전 출간 도서도 꽤 많이 순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신간'이 아닌 도서는 트렌드에서 제하고 분석을 하곤했지만, 나와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순위권 밖에 있지만 꾸준히 매년 500~1000부씩 팔리는 스테디셀러와 다르게, 베스트셀러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건 여전히 독자들에게 발견되며 새로움을 준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달러구트 꿈 백화점》, 《불편한 편의점》 - 알라딘 // 〈스파이 패밀리〉 - 애니플러스


같이 볼 콘텐츠, 《달러구트 꿈 백화점》, 《불편한 편의점》, 〈스파이 패밀리〉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1, 2편을 합쳐 누적 100만부 판매를 달성한 이미예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잠들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꿈'을 파는 백화점에 주인공 패니가 취직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다. 다양한 손님들의 공감 에피소드와 그에 맞는 꿈을 선물하는 따뜻한 상상력이 인상적인 책.

《불편한 편의점》은 마찬가지로 1, 2편을 합쳐 누적 100만부 판매를 달성한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서울역에서 우연히 만나게된 독고씨가 편의점에 아르바이트로 취직하면서 불편하지만, 오고 싶은 편의점으로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담은 마음 따뜻한 소설.

〈스파이 패밀리〉는 만화책 원작의 애니메이션으로 2022년 넷플릭스 최고의 히트작이다. 동서 양국의 갈등과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스파이 황혼은 딸을 키워 데스몬드라는 표적에 접촉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서로의 목적에 맞게 정체를 숨기고 만들어진 가족의 에피소드를 담은 귀여운 이야기.

2020년대 들어 누적 판매 100만부를 돌파한 책은 3종이다. 단일 도서로 기록한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 1-2권 합산으로 기록한 《달러구트 꿈 백화점》, 《불편한 편의점》이다. 이 글에서는 2017년에 출간되어 이제는 스테디셀러의 영역으로 넘어간 《아몬드》는 제하고, 2020년대 출간된 2권과 올해 상반기 넷플릭스 최고의 히트 애니메이션 〈스파이 패밀리〉를 포함해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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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공간'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금리가 오르고, 그에 따라 자산의 가치는 폭락하고 소비는 얼어붙는 요즘이다. 경기침체의 초입에 들어선 요즘은 사람들이 현재를 즐기거나,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기보다는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며 견디는 라이프스타일로 점차 움츠러드는 분위기인 것 같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일어나며 국제정세가 불안정해지는 와중에 중국의 코로나 봉쇄 같은 팬데믹 이슈로 수급 문제가 꼬여 경제적으로도 점차 나빠지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가게를 폐업하고, 회사들은 위기를 견디어내고 있다. 해외에선 대기업의 대규모 정리해고 소식이 들려온다. 사회초년생들에겐 기회가 없고, 사회적 안전망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이젠 길거리도 안전한 공간이 아니니 말 다했다.

당연하게도 불경기 속에서 삶이 각박해지니 사람들의 키워드는 '생존'일수밖에 없다. 그것도 각자도생 말이다. 가족, 사회, 국가 누구도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고, 내 것을 지키며 이 위기를 견디어내는 방식이 너무 당연하다. '알빠노', '누칼협' 같은 단어가 인터넷을 장악하는 건, 내 앞가림하기에도 사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일 게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꿈을 사러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2022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일 게다. 살기 힘든 건 이제 디폴트고, 세상 어디에도 내가 편히 쉴 공간이나 안전한 곳은 없다. 다만 꿈에서라도 위안을 얻기 바랄 뿐이다. 아이, 어른, 반려동물들까지도 '안전하게 쉴 공간'을 찾아 꿈 백화점을 찾는다.

주인공 패니가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취직을 준비하며 읽은 책 속의 책 [시간의 신과 세 제자]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시간을 다스리는 시간의 신이 세 명의 제자를 불러모아 과거, 현재, 미래 중 다스리고 싶은 시간을 선택한다면 어떤 걸 가져가고 싶느냐고 묻는다. 첫째와 둘째가 각각 미래와 과거를 가져간 후에 셋째는 남은 현재를 받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답한다.

"제가 사랑한 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입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과거에 대한 미련도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이 굳이 잠들었던 시간까지 포함하여 떠올리지 않고, 거창한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이 잠들 시간을 고대하지 않으며, 하물며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현재가 깊이 잠들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데, 부족한 제가 어찌 이 딱한 시간을 다스려보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달러구트 꿈 백화점》 中


당연하게도 이 우화에선 지혜로운 셋째가 가장 괜찮은 선택을 한 이가 된다. 이어 '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림자가 밤새 대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둘째처럼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첫째처럼 경솔한 이들이 잊지 말았어야 할 것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
"'꿈'이라고 부르거라. 그들은 이제 너로 하여금 매일 밤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中


이미예 작가는 꿈의 시간을 미련도 불안도 없는 시간이자 마음을 회복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일상이 각박하고, 위험한 공간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의미한다. 잠을 자는 순간만이 온전히 안전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비유다.

《불편한 편의점》가 그리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사장님은 노숙자 독고 씨의 도움을 받아 지갑을 되찾는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운영하는 편의점에 오면 도시락을 내주겠다고 말하고, 독고 씨는 정말 도시락만 먹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야간 아르바이트에 자리가 펑크가 나면서, 사장님은 독고 씨를 채용하고 그가 편의점을 지키면서 가게의 분위기는 변해간다.

편의점에는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부터 내가 손님이네 하며 진상부리는 이, 술에 만취한 이들까지 별의별 이상한 인간들이 다온다. JS(진상)들이 JS가 되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각자도생'이라는 사회의 캐치프레이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리는 없고, 세상은 힘들고, 깽판을 놔도 되는 사람들에게 하향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방어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 세상의 탓이다.

안전하지 않은 길거리, 그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하는 소설 속 사회도 우리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소설에서 김호연 작가는 '마음'을 답으로 제시한다. 독고 씨는 누구에게나 편견 없이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 손님, 동료, 사장할 것 없이 동등하게 사람대 사람으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을 어눌한 말투로 던진다. 그의 말이 직접 해답을 주는 것 아니라, 말이 주는 공명이 저마다의 인물의 마음에 닿아, 사실 알고 있었지만 '세상을 산다는 이유로' 내려놓았던 자신의 진심에 닿는 방식으로 말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체 왜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고 이상한 데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죠? 주식이니 영화 제작이니 다 도박 같은 거 아닌가요? 대체 우리 아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죠? 예?"
"그게…… 아직 젊잖아요."
"이제 서른이라고요. 서른! 인간구실 못하는 서른 살 백수나 다름없다고요."
"그런데 아들이랑 이야기는…… 해봤어요?"
"내 말 따위 듣지도 않아요. 진절머리 내고 피하죠. 수없이 붙잡고 얘기했다고요. 그런데 아들은 날 무시하고 이젠 피해요. 그 녀석에게 난 식모 아니면 하숙집 주인이나 다름없다고요!"
(…)
"다시 물어봐요. 왜…… 그만둔 건지. 뭐…… 힘들었는지. 아줌마 아들만이 알잖아요. 아줌마도 아들 일이니까…… 알아야 하고요."
"들어줬다가는 진짜 그만둘까 봐 윽박지른 거예요. 왜 그만두냐고 물어도 말을 흐리길래 어떻게든 버티라고만 했어요. 근데 그러니까 그냥 질러버리더라고. 지 아빠가 갑자기 가출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
"내가 말이 너무 많았죠? 너무 힘들어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독고 씨가 들어줘서 좀 풀린 거 같아요. 고마워요."
"그거예요."
"뭐가요?"
"들어주면 풀려요."
"아들 말도 들어줘요. 그러면…… 풀릴 거예요. 조금이라도."
-《불편한 편의점》 中


하소연할 사람이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모두가 힘들다는 걸 알기에 가족도 친구도 서로에게 힘듦을 토로하기 어렵다. 위 인용 부분의 선숙이 독고 씨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교회에서도, 가족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선숙의 아들도 엄마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엄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일 게다. 가정이라는 공간도 더 이상 편안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고전적인 '홈 스윗 홈'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있다.

꿈 백화점이든, 내 속마음을 들어주는 점원이 있는 편의점이든 우리에겐 '안전공간'이 필요하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저 '힐링의 공간'이 아니라, 생존투쟁과 매순간 힘듦을 견디는 일상에서 한 발 나와 온전히 쉬고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2022년의 독자들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서라도 고민거리 없는 '안전공간'을 찾기를 바란 것이다.


연대가 아닌 유대의 방식으로


여기까지 읽었다면 사람들이 바라는 건 '안전공간에서의 연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연대보다는 '유대'에 가까운 관계라고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연대의 사전적 의미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으로, 단어 자체에 '공동의 목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유대의 의미는 '둘 이상을 서로 연결하거나 결합하게 하는 것'이다. 함께 무언가를 도모한다기 보다는 '정서적인 지지'에 가깝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어깨걸고 술을 마시던 시대는 갔다. 함께 같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으쌰으쌰하던 시대도 아니다. 2022년은 여전히 '각자도생'의 시대이니 말이다. 사람들이 픽션을 통해 바라는 관계의 모습도 내편/우리편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도 나도 각자의 삶이 보장되는, 말하자면 '선을 지키는 관계'에 가깝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패니는 꿈 백화점에 고용된 직원이고, 《불편한 편의점》의 독고 씨도 마찬가지로 고용된 계약직 직원이다. 그들이 공감하고 관계맺는 인물들은 대개는 손님이나 동료로 '내 사람'의 바운더리에 속하기에는 멀지만, 생활하며 자주 만나기에 마음은 가까운 느슨한 관계에 가깝다. 그렇기에 '연대'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서로가 응원하는 정도의 스탠스면 충분한 것이다.

〈스파이 패밀리〉의 가족 구성원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스파이 '황혼'은 전쟁을 억제하고 동서 양국의 평화를 위해 '오퍼레이션 올빼미' 작전을 수행중이다. '오퍼레이션 올빼미'는 가족을 구성하여 고위급 자제들이 다니는 이든 칼리지에 잠입해 오스타니아의 제1총재 도노반 데스몬드에게 접근하는 작전이다. 때문에 황혼은 가족을 구성해야 했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 분장하고 '로이드 포저'라는 가명을 쓴 채로 고아원에 간다. 그곳에서 '아냐'라는 아이를 입양한다. '아냐'는 어린 시절 생체실험을 당해 사람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아이로 스파이 만화를 좋아하기에 스파이인 로이드가 자신을 입양하도록 유도한다. 와이프인 '요르'는 낮에는 시청에서 일하지만 밤에는 청부살인을 한다. 그에게는 결혼 혹은 가정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숨길 소속이 필요했고, 우연한 계기로 로이드와 아냐를 만나 가족에 합류한다. 심지어 반려견 본드조차도 자폭테러용 훈련견으로 성장했지만, 구조된 후 아냐를 위기에서 구한 후에 자신도 안전한 곳을 찾아 포저의 집으로 들어왔다.

스파이 작전, 입양, 신분 은폐와 같이 저마다의 '안전'이 필요한 주인공들은 이상적인 핵가족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안전공간'을 확보한다. 혈연으로 구성된 정통 가족이 아닌, 계약으로 이뤄진 유사가족이지만 그들의 유대는 어떤 가족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비단 가족이 아닐지어도 느슨한 공동체가 주는 힘은 유효하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공동의 목표를 '함께'이루는 아름다운 그림은 월드컵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픽션들에서도 독자들은 타인이 내 맘과 같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너는 너, 나는 나. 함께여서 즐겁지만 나는 너를 응원하고, 너도 나를 응원하면 돼.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라는 말로 이 스탠스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는 세상을 담아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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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세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점을 하나 더 꼽는다면 '옴니버스'라는 형식이다. 넓게 보면 '일상물'로 분류되는 이야기들이기에 각각의 독립된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야기가 적합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부분을 그저 형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조연들'이라는 키워드로 집중하고 싶다.

작법을 공부할 때면 반드시 한 번은 만날 이름이 있다. 바로 '조지프 켐벨의 영웅의 여정 12단계'이다. 영웅이 일상 세계에서 소명을 부여받고, 스승을 만나 성장하고, 위기에 빠졌다가, 적과 대면하고, 승리 혹은 패배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이 원형적인 서사구조는 수백년 전 신화부터 요즘 히어로 영화나 웹툰/웹소설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툴이다. 몰입할만한 영웅, 다시말해 주인공에 독자들은 감정이입을 하고, 그의 마음으로 서사를 따라간다. 그리고 종국에 주인공이 깨닫는 영약같은 순간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일상에서 우리는 주인공일 수 있을까. 어린시절부터 네가 세상의 주인공이야!라는 만화를 보고 자란 밀레니얼들도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는 알 수 있다. 아주 소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대개는 '조연'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각할 게다. 픽션의 주인공은 용감하고, 정의롭고, 인간적이면서도, 진취적이고, 외향적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고, 그런 인간상을 자신의 자아로 장착하는 사람은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힐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최승호 시인의 '북어'라는 시처럼 모두가 북어가 되어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하며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조소하고, 애닲아하고만 있을텐가. 아니다. 창작자들은 외려 형식에서 방법을 찾았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화자는 패니지만, 실제 주인공은 꿈 백화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개인사와 꿈을 찾는 이유가 이 책의 핵심이 된다. 《불편한 편의점》도 마찬가지다. 독고 씨는 들어주는 사람에 가깝다. 속마음을 꺼내는 이들은 손님과 동료고, 그들의 이야기가 독자들과 맞닿는 컨택포인트가 된다. 물론 장르적인 특성으로 〈스파이 패밀리〉를 두 권의 책이 구사한 형식과 동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이 애니메이션 또한 옴니버스가 주는 독립성을 잘 활용해 주인공 '포저 일가'를 둘러싼 이웃, 동료, 친구의 이야기를 대충 다루지 않는다.

평범해보이는 이야기들도 모이면 힘이 생긴다. 각각은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담론이 되고, 하나의 이미가 되어, 픽션을 구성하는 맥락이 된다. 공감의 포인트가 될 수도 있고, 재미를 반감하는 아쉬움의 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지만 독자들은 전자에 집중한 것 같다. 누구나 아우를 수 있는, 혹은 나도 일원이 되고 싶은 안전공간의 조연으로 기꺼이 들어가고 싶게 만든 것이다. '나도 저 이야기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하는 건, 그만큼 이야기가 내 삶에 닿아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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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어떤 이야기가 찾아올까?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독자들은 사는 일이 힘들어 환상의 공간으로 도피할 수도, 상상력의 여지가 줄어들어 냉정한 르포를 선택하기도 하고, 세상을 은유하는 거대한 담론이 담긴 큰 이야기를 선호할 수도 있다. 내년도 올해와 비슷하다면 지금의 '안전공간'에 대한 수요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질 것이 없는 세상에서 허구의 이야기라도 기댈 곳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안전공간'보다는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길 바란다. 안전은 일상이 되어야 하고, 픽션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내며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만진다. 내 한 몸 챙기기도 어려워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여의치 않다. 오늘 함께 읽은 베스트셀러들이 나와 내 주변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면 그 다음은 사회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이야기들이 발견되면 좋겠다.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욕망추구 서사도 물론 재밌지만, 그보다는 더 큰 주제를 아우르는 상상력과 작품들이 보고 싶다.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세계가 확장되어 서로가 서로를 유대관계로 품을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신간으로 발견되어 입소문을 타고 세상에 퍼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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