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 나의 누추한 이해와 글로 차마 표현하기 미안한 아픔과, 죽음과, 상실이 있었던 곳이다. 수 십 명에서 수 백, 수 천명의 사람들이 신문 국제면에 그저 숫자로서 그들도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리고 6년 간 활자 속으로 사라져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해가 지날수록 관련 기사를 열어보는 빈도는 더욱 낮아졌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오늘 이 기사를 읽게 된다.
<내전의 포화 속에서 동물을 구출하라 / 한겨레 신문, 10월 12일 자>
http://www.hani.co.kr/arti/animalpeople/wild_animal/814202.html?_fr=mt2
사실 이 기사가 눈에 띄었던 것은, 내전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하게 사고하지만 (슬프다)
전쟁 속 동물의 사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어보니, 분쟁 상황에서 남겨진 혹은 버려진 동물들을 구출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지난 몇 달간 최대 격전지인 알레포에 있는 동물원에 생존해 있던 동물 십 여 마리를 구조해 낸 것이었다.
나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귀여워하는 정도의 지극히 보통 사람 수준이고 동물보호에 대해서도 특별히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일까, 내전으로 매일 사람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목숨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물들을 구출하는 활동이 대단히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 신선하기도 했다.
구조된 동물들은 대부분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어쩌면 터키로 향하는 길에 죽을지도 모를 위험, 어쩌면 가까스로 국경을 넘자마자 생명을 다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소수의 동물들을 구출하는 데에는 그들의 사명도 한몫을 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일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 이 기사를 읽으며 떠오른 것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홍수로 죄인들을 쓸어버리기 전에 당시 유일한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가족과 함께 동물들을 한 쌍 씩 방주에 태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노아 전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들을 포함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잘 지키라고 맡겨주셨다.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시리아 동물 구조가 어쩌면 굉장히 성경적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겹쳤다.
보통 사회의 약자를 떠올리면, 아동, 노인, 장애인 등 (그 외에 너무나 많지만 생략)이 있는데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동물 역시 약자 중의 약자이다. ‘쓸모 가치’의 기준으로 보면 사회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큰 이익이 안될 것 같은 그룹을 약자로 본다 (이 시스템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곧 죽을 노인, 성인에 비해 힘도 없고 쉽게 억압할 수 있는 아동, 몸과 지능이 (비장애인 기준으로) ‘성하지’ 않은 장애인... 하지만 하나님의 공식은 분명하게 ‘존재 가치’가 기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그리고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꾸준히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당장 국제사회가 하이에나 한 마리가 부족해서 시리아 동물을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사랑을 우리는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뭔가 교과서적 정답을 내거나, 교훈을 제시해보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크리스천으로서 생명과 존재가치에 대해 재고할 계기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결국 그들은 여러 검문소와 무장세력의 위협, 교전상황을 뚫고 동물 13마리를 구조해냈고,
임신 중이었던 암사자 다나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직후 새끼 한 마리를 무사히 낳았다고 한다.
그렇게 생명이 생명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