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매일 샤워하지 않는 나를 마주한다. 결혼 후에 생긴 습관이라기엔 좀 아이러니하지만.
애인을 졸업하고 동지가 된 남자에게 더 이상은 달달한 샴푸 내음으로 매력을 어필할 필요가 없어서일까.
그럴 리가. 샤워 횟수를 줄이는 것으로 물 절약에 동참할 만큼 환경에 남다른 의식을 가져서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이 습관의 시작은 아마도 순종이었지 싶다. 10년 경력을 자랑하는 살림 선배에 대한.
남편은 대학시절부터 자취를 했다. 냄새에 민감한 나는, 연애 시절 자취생 특유의 퀴퀴함이 없는 이 남자가 좋았다. 언제 가도 집은 깔끔했고, 옷에서도 덜 말라 쿰쿰한 물비린내가 난 적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면 우리 엄마가 하던 것처럼 싱크대 남은 물을 훔쳐낼 줄도 알고, 욕실 바닥도 늘 거실처럼 보송했다.
결혼하면 혼자 오래 살던 남자들의 지저분한 생활습관 때문에 많이 싸운다던데, 이 정도 살림 솜씨면 그럴 일은 없겠다며 혼자 합격점을 매겼던 게 실수였다.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낀다더니, 내 사랑은 코를 마비시켰던 모양이다. 판단력도 함께.
어쩌다 씻지 못하고 잠들었던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샤워하러 들어가는 나를 붙잡아 세우고는 거침없이 내 정수리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며 말했다.
“야~ 머릴 안 감아도 어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냐 넌. 그리고 이제는 나 말고는 네가 씻었는지 말았는지 아무도 신경 안 써. 내가 괜찮다는데 뭘 귀찮게 맨날 씻어”
내가 씻고 나오면 사방이 습기로 가득 차는 욕실이 불쾌하고 불편해서 하는 말인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신혼의 달콤한 최면에 빠진 나는 그날부터 매일 씻지 않기로 한다. 참 쉬운 여자.
그는 그저 습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보송한 욕실 바닥을 위해 샤워를 스킵하는 용기 있는 남자.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하는 샤워가 당연한 일상이었던 내게, 이 용기를 심어주려 신혼 시절 남편은 부단히 노력했다. 샤워하고 나온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애정을 표현해야 마땅했겠지만, 습기와 곰팡이에 대한 잔소리를 퍼부어대기 바빴다.
“넌 아직 살림을 안 해봐서 그래.
샤워하고 물기를 제대로 안 없애면 나중에 물 때 낀 곰팡이 없애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모르지?”
모르지.
30년 넘는 세월 동안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바쁜 아침 화장대에 앉아 단장하고 있으면 엄마가 숱 많은 머리를 요리조리 걷어가며 말려주고, 퇴근하고 들어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당연한 듯 정리되어 있는 일상을 누리며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얼마나 호사스럽고 과한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던 건지. 나이만 먹었지 혼자서 내 몸 하나 온전히 건사해보지 못했던 걸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어설픈 내가 귀엽다고 착각했던 것도 같다.
씻는 일만큼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던 지난 시절의 나를 아무렇지 않게 지워버리고, 안 씻는 날이 늘어갈수록 기특해하고 칭찬하는 남편의 조련에 너무 쉽게 길들여졌다.
이렇게 살림까지 잘 아는 남자가 이제 엄마처럼 나를 보살펴주는 거라 생각하니, 그가 하는 많은 말들은 모두 가르침이 되었다. 주도권을 빼앗기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남편이 하라는 대로 아바타처럼 살림을 해나갔다.
그렇게, 내 인생 2막의 주도권은 엄마에게서 남편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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