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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pr 22. 2018

영화 리뷰 <그랜드파더>

복수의 이야기는 각성의 여정으로 거듭난다


법이 어루만져 못한 응어리를 풀기 위해 복수의 노정에 오른 인물이 극장가에 쏟아졌던 때가 있었다. <돈 크라이 마미>(2012), <26년>(2012), <내가 살인범이다>(2012), <공정사회>(2013) 등 사적 복수를 다루었던 영화들은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인 공권력에 분노하던 대중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법으로 시원함을 안겨주었다. 이후 복수극의 대리만족은 <방황하는 칼날>(2014)과 <살인의뢰>(2015)로 이어졌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손녀 보람(고보결 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광(박근형 분)이 주인공인 <그랜드파더>는 ‘사적 복수’를 다루었던 영화들의 자장에 속한다.


<그랜드파더>는 사적 복수의 서사에 <테이큰>(2008)이 선보였던 중년 남성의 강한 액션을 덧붙였다. <테이큰>이 리암 니슨, <쓰리 데이즈 투 킬>(2014)이 케빈 코스트너, <더 건맨>(2015)이 숀 펜이란 중년 배우의 육체를 조명했다면, <그랜드파더>는 70대 배우 박근형이 보여준 적 없던 캐릭터를 파고든다. 보통의 영화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인자함이 풍기거나, 또는 노쇠하여 몸을 가눌 수 없고, 때론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반면에 기광은 전형적인 할아버지 형상과 거리가 멀다. “당신 자식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라고 말하며 삐뚤어진 사회에 분노를 분출하고, 무능력한 공권력을 대신해 목숨을 건 복수에 나서는 기광은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만날 수 없었던 강렬한 할아버지다.


기광이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설정은 캐릭터와 서사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기광은 고엽제 후유증을 술로 잊으려다 가족과 멀어진 과거를 지녔다. 온몸에 남은 상처만큼이나 그의 기억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국가를 위해 총을 들었지만, 한쪽에선 총질을 했던 일이 무슨 벼슬이냐며 비꼬고, 다른 편에선 사람 죽여본 적 있냐면서 비아냥거린다. 어딜 가도 괴물 취급을 받는 기광은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전우는 분노를 이주민 노동자 등에게 표출한다. 이주민 노동자들이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시위 현장에 맞불을 놓으며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는 전우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고엽제 전우회를 통해 접했던 익숙한 풍경이다. 빨갱이들의 집회가 있다면서 가서 때려 부수겠다고 소리치는 전우에게 기광은 뭐가 바뀔 거 같나 묻는다. 바꾸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세운 공든 탑을 지키는 거라는 대답에 기광은 말한다. “진짜 적은 그딴 놈들이 아니야.” 그 순간, <그랜드파더>는 복수의 이야기에서 각성의 여정으로 거듭난다.


기광의 심리적 변화에 사용하는 매개체는 버스다. 기광은 자신이 몰던 공장 출퇴근용 버스가 고장이 잦아 수리를 맡겨 보나 정비공은 버스가 낡아서 엔진을 바꾸어도 소용이 없다고 충고한다. 오래된 버스는 연로한 기광의 육체와 다름없다. 또한, 시간에 늦은 이주민 노동자를 절대 태워주는 않는 모습을 통해 그의 닫힌 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기광이 등교하는 손녀를 버스에 태우는 장면은 심리 변화의 변곡점이다. 닫혔던 자신의 마음으로 손녀가 들어온 후에 기광은 늦은 이주민 노동자를 기다려주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그랜드파더>를 제작한 정윤철 감독은 “시나리오가 가지고 있는 독창성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특히 모두 주저하고 방관하고 있는 사회에서 삶을 희생하고 행동하는 노인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그의 믿음을 가능하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은 박근형이다. 1959년 연극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로 데뷔한 이래 연극, 영화, TV 드라마에서 단역, 조연, 주연으로 약 300여 편에 출연한 그는 정형화된 한국 영화의 할아버지 캐릭터를 과감히 부수며 전인미답의 비경에 도착한다.


한 손엔 총을, 다른 한 손엔 가스통을 들고 복수에 나서는 모습이나 망치를 들고 악당에게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박근형의 육체적인 강인함을 드러낸다. ‘대배우’란 칭호에 걸맞은 섬세한 심리 묘사가 일품인 장면도 있다. 고물 버스가 폐차되는 장면에서 박근형이 보여주는 눈빛과 표정, 행동은 유심히 보길 추천한다. 평생 함께 지낸 친구를 보내는 슬픔, 자신을 계속 억누르던 굴레를 벗어난 해방감,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죽음의 기운 등 복잡한 심리가 투사된 명장면이다. 기광과 양돈(정진영 분)이 충돌하는 장면의 불꽃도 대단하다.


연출을 맡은 이서 감독은 핏빛 드라마의 끝은 푸른 희망과 젊음으로 매듭짓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의 끝자락에 태어나는 강아지 이름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서 따온 ‘보리’로 지었다고 한다. <그랜드파더>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데미언(킬리언 머피 분)은 여자 친구에게 쓴 편지에 이런 표현을 적는다. “우린 참 이상한 존재야. 우리 자신에게조차 말이야.” 이것은 이념과 생각이 충돌하는 상황 앞에서 대립의 소용돌이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오늘도 ‘이상한 존재’들에 휩싸여 있긴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안 해도 다른 놈들이 해 처먹는다는 양돈의 음성과 불야성을 이룬 유흥가의 풍경은 묘한 조화를 이룬다. 기광의 행동은 현실에 속한 관객에게 질문한다. “(스스로 이상한 존재에서 벗어나)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가?” 월남전 참전 군인이 주인공이었던 <택시드라이버>(1976)가 1970년대 미국 사회가 무너진 가치관의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영리하게 수용했다면, 또 다른 월남전 참전 군인이 나오는 <그랜드파더>는 인물이 지닌 과거를 현재의 상황과 명민하게 연결한 셈이다. <그랜드파더>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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