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학후 May 26. 2018

영화 리뷰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

프랑스에서 온 근사한 스팀펑크 애니메이션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 작가인 자크 타르디가 과학자들의 실종으로 발명과 발전이 멈춰버린 1941년 파리를 배경으로 그린 여러 장의 그림에서 출발한다. 시각적인 아이디어만 있던 그림은 자크 타르디와 함께 <바퀴벌레 죽이는 사람>(1984)을 발표하고, 그의 작품을 영화화했던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을 소설로 옮기는 등 인연이 깊었던 뱅자맹 르그랑(국내에선 <설국열차>의 만화 원작자로 친숙한 인물)이 인물과 사건을 추가하면서 이야기의 형태를 갖춰갔다.


2007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인 <페르세폴리스>를 만들었던 JSBC가 제작을 맡고, 제작진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는 크리스타앙 데마르와 프랑크 에킨시가 공동으로 메가폰을 잡으면서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한 편의 영화로 발전했다.


1941년 파리, 스팀펑크의 판타지



자크 타르디가 그렸던 그림 그대로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1941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삼는다. 선대의 연구를 이어받은 부모님이 실종되자 아브릴(마리옹 꼬띠아르 목소리)은 유일한 친구인 고양이 다윈(필리프 카터린느 목소리)과 숨어 지내며 부모님의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한다. 그녀는 자신을 쫓는 정부와 수상한 세력에게 정체를 들키고, 부모님의 실종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두 가지 상상을 이야기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하나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전날에 병사들을 무적으로 만드는 실험을 하는 과학자를 몰래 만나러 갔던 나폴레옹 3세가 폭발 사고로 죽으면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나폴레옹 일가가 계속 프랑스를 지배한다고 가정한다. 다른 하나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서 과학자들 실종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전기·라디오·텔레비전 등 인류사의 중요한 것들이 발명되지 않았다. 나폴레옹 일가가 통치하며 과학자들이 사라진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여전히 석탄과 증기기관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전기가 아닌, 증기기관의 시대인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장르로 보면 '스팀펑크' 물에 속한다. 스팀펑크 장르는 1990년대 이후 SF에 나타난 경향 중 하나로 석유와 전기로 발전한 역사 대신에 증기기관을 모든 기술의 중심에 놓고 서술한다. 대부분 18~19세기의 연대기적 과거를 이야기상의 현재로 채택하기에 대체 역사물의 하위 장르에 위치하는 특징도 지녔다.


스팀펑크가 증기기관을 주목하는 것은 오늘날 과학과 산업의 많은 문제점을 산업 혁명이란 출발점에서 돌아보자는 의미이다. 스팀펑크는 명백한 과거를 그리지만, 현재의 거울이면서 미래가 투영된 세계를 다룬다. 그 속에서 인물은 과학의 파괴력을 목격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스팀펑크 장르의 대표작으론 <스팀보이>. <천공의 섬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꼽을 수 있다.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도 스팀펑크 장르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다. 시대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져 있고, 증기기관은 세상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증기기관의 시대이나 하늘엔 비행기구가 떠다니고 증기자동차가 달리는 영화 속 세상은 우리의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로봇 쥐와 생명공학의 힘을 빌린 말하는 고양이가 나오는 등 우리가 아직 이르지 못한 미래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또한, 과학의 힘을 신봉하는 자와 과학의 만용을 경계하는 자의 충돌이란 스팀펑크의 전형적인 구도도 나타난다.


이 작품만의 개성, 그리고 믿음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스팀펑크의 기반 위에 자신의 개성을 얹는다. 영화는 모든 생명체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궁극의 약물'을 다루며 스팀펑크 장르에 첨단 유전공학과 생체공학의 문제점을 다루는 바이오 펑크를 섞는다. 선대의 실험과정에서 변이를 일으킨 도마뱀들의 형상에선 <혹성탈출>의 반란과 <닌자 터틀>의 돌연변이도 연상된다.


대조적인 색감은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의 특징이다. 1940년대의 파리는 산업혁명으로 더러워진 상태였는데 영화는 푸른 색조가 가득한 회색빛으로 오염된 파리를 재현한다. 반대로 도마뱀들과 그들이 납치한 과학자들이 머무는 세상은 밝은 톤으로 그려지며 유토피아의 느낌을 준다. 공간의 대비에 대해 크리스티앙 데마르 감독은 영화전문지 '매거진 M'과 인터뷰에서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통해 과학의 진보와 환경 문제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과 할리우드 외에 애니메이션은 분명 낯선 영역이다. 크리스티앙 데마르 감독은 프랑스 애니메이션은 자크 타르디처럼 독자성을 가진 작가와 협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소개하면서 "작가주의 영화라 불릴 만큼 고유한 정체성과 그림체, 세계관 등의 요소들이 다양하고 풍성한 것이 특징이다"라고 밝혔다(<매거진M>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스팀 펑크의 익숙한 맛을 알 수 있으면서, 동시에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향을 만끽할 기회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두 개였던 에펠탑의 하나가 없어지고 현재로 연결하며 보여주는 인류의 공존 가능성은 트럼프의 당선, 브렉시트 등 자국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금 정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팀펑크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쟝은 말한다.


"파충류의 피는 차갑지만, 인간의 피는 따뜻하지. 나는 과학만이 아니라 과학을 창조한 인간을 믿고 싶어."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도 따뜻한 피에 기대를 걸고 있다.


2016.12.19

작가의 이전글 영화 리뷰 <스노우타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