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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ug 12. 2020

드라마 리뷰 <로스트 룸>

빗·가위·시계·버스표의 변신... 인간 탐욕이 만든 끔찍한 일


딸 애나(엘르 패닝 분)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형사 조 밀러(피터 크라우즈 분)는 우연히 한 범죄자로부터 10호실이라 적힌 모텔방의 열쇠를 입수한다. 그 열쇠는 어느 문이든 따고 들어간 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모텔 10호실을 거쳐 문을 열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열쇠를 노리는 개인과 집단이 나타나면서 조는 로스트 룸에 얽힌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딸은 모텔 10호실에서 사라진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 룸>은 2006년 케이블TV인 Syfy 채널에서 방송한 3부작 미니시리즈다. 이후 DVD는 한 화를 두 개로 분할하여 1화 '열쇠(The Key)', 2화 '시계"(The Clock), 3화 '빗(The Comb)', 4화 '상자(The Box)', 5화 '눈(The Eye)', 6화 '최상위 오브젝트(The Prime Object)' 총 6부작(420분)으로 발매했다. 국내에선 현재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인 왓챠에서 6부작으로 서비스하는 중이다. 단, 6화의 제목은 '투숙객(The Occupant)'으로 바뀌었다.


<로스트 룸>은 설정 자체가 흥미롭다. 1961년 5월 4일 오후 1시 20분 44초에 발생한 어떤 '일'로 인해 모텔의 10호실은 현실에서 사라졌고 방 안에 있던 물건(오브젝트)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얻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에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한 발상이다. 조가 소유한 평범한 모텔 '열쇠'가 어떤 문이든 따고 들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빗'은 시간을 10초 남짓 정지시키고 '가위'는 사람이나 물건을 회전시킨다. '버스표'는 텍사스의 한 마을로 순간이동이 가능하고 '자명종 시계'는 금속을 녹인다. '볼펜'은 촉에 닿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강력한 전기충격을 가한다. 이 외에도 연필, 우산, 손톱 가는 줄, 라디오, 손목시계, 술병, 단추, 동전, 안경, 트럼프카드, 폴라로이드 사진, 유리눈 등 다양한 오브젝트가 드라마에 등장한다.



<로스트 룸>의 각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제작자이자 각본을 맡은 크리스토퍼 레온은 두 개의 아이디어를 합한 결과가 <로스트 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모텔방 아이디어다. 이것은 호텔방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겠다는 공동제작자 폴 워크맨의 엉뚱한 발상에 바탕을 둔다. 오브젝트에 관한 대부분의 아이디어도 폴 워크맨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극 중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오브젝트 '유리눈'이다. 크리스토퍼 레온은 유리눈을 손에 넣으려는 무리들이 식당이나 볼링장에서 서로를 죽이는 장면 등 몇 가지 설정을 떠올렸지만, 한 편의 시나리오로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로스트 룸>의 각본을 함께 작업하던 로라 학컴이 '모텔방'과 '유리눈'을 하나의 이야기로 합치자고 제안하며 실마리가 풀렸다.


크리스토퍼 레온과 로라 학컴은 모텔 10호실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구상해 오브젝트의 '소유'라는 규칙을 세웠다. 그리고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오브젝트를 차지하려는 개인과 집단의 '싸움'이란 이야기의 뼈대를 마련했다. 여기에 인간의 탐욕, 성경의 요소들, 음모이론, 음모와 살인, 종교집단의 등장, 선과 악의 대립, 선택의 딜레마를 하나씩 입혔다.



<로스트 룸>은 모텔 10호실의 비밀과 오브젝트의 고유한 힘이란 초자연적인 소재로 극의 재미를 돋운다. 이런 전개 과정 속엔 SF, 슈퍼히어로,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필름누아르 등 여러 장르의 색채가 녹아있다.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은 <환상특급> 시리즈와 스티븐 킹의 소설일 것이다. 게임에 가까운 전개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았던 <로스트> 시리즈와 초능력자들이 등장하는 <히어로즈> 시리즈도 소재와 전개에서 비교해봄 직한 구석이 있다.


각본을 작업한 로라 학컴은 <로스트 룸>이 항상 현실 세계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보이길 원했다고 밝힌다. <로스트 룸>이 그린 건 슈퍼히어로물이나 초능력이 아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오브젝트가 현실에 등장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탐구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종교집단 '재통합의 교단'은 오브젝트가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라 믿는다. 심지어 오브젝트 자체가 신이라 숭배하는 자들까지 나타난다. 현실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전개다.


과거 중세 시대는 성물 숭배 사상으로 가득했다. 마틴 루터는 성인 및 성물 숭배 사상을 우상 숭배라 비판하며 종교 개혁을 주장했다. <로스트 룸>에서 오브젝트가 세상을 파괴할 위험성을 지녔다고 보고 모두 파괴하려는 조직 '리전'처럼 말이다.


<로스트 룸>에는 각각의 이유로 오브젝트들을 모으는 '컬렉터'들이 나온다. 어떤 이는 오브젝트에 집착하다 광기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오브젝트의 힘에 사로잡혀 노예가 된 이도 보인다. 이런 군상들을 통해 <로스트 룸>은 현대 사회의 물신주의를 비판한다.


오브젝트들은 모텔 10호실 안에 있던 평범한 물건(작품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상위 오브젝트까지 사물로 보고 있다)들이다. 바깥에선 힘을 발휘하나 10호실 안에선 능력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물질이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힘을 얻는다는 비판적 목소리를 은유한다.


극 중에서 조는 "열쇠를 발견하고 인생이 더 나아졌나요? 나빠졌나요?"란 질문을 받는다. 오브젝트를 가지면 다른 오브젝트를 계속 쫓거나 또는 사냥꾼들에게 쫓길 뿐이다. 조가 가진 모텔 10호실의 열쇠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문으로 나갈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가능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본인에게 달렸다.



<로스트 룸>은 극의 흡입력이 강하다. 반면에 전개의 많은 지점도 의문으로 남겼다. 특히 가장 궁금했던 1961년 5월 4일 오후 1시 20분 44초에 모텔의 10호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질 않는다. 사실상 열린 결말인 셈이다.


<로스트 룸>이 평행 우주, 천국과 지옥, 외계인, 과학 실험 등 어떤 구체적인 해답을 주었다면 더 좋은 작품으로 남았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설정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즐겼다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로스트 룸>은 < 1408 >(2007)과 <아이덴티티>(2003)처럼 근사한 '방'을 남겼지 않나.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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