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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ug 01. 2021

영화 리뷰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성차별·인종차별·정신질환에 맞서... 쿠사마 야요이의 투쟁사


'호박', '무한 거울의 방'으로 유명한 화가, 조각가, 설치미술가인 쿠사마 야요이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다. 여성 아티스트 가운데 역대 경매 낙찰가 1위(2014년 710만 달러)를 기록했고, 미술 전시 중 세계 최다 관람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2016년엔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열렬한 사랑을 받아 2013년 대구 미술관에서 개최한 개인전은 무려 33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쿠사마 야요이가 처음부터 미술계와 대중의 환영을 받았던 건 아니다. 195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대부분의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남성 중심, 서구 중심의 미술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한 쿠사마 야요이의 인생을 담았다.


연출을 맡은 헤더 렌즈 감독은 순수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접하면서 과거 미술계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쿠사마 야요이의 진가와 그가 현대 미술에 기여한 바를 알리고자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힌다.


"어두웠던 과거를 포함해 성차별, 인종 차별, 정신 질환을 극복하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좇아온 개척자로의 쿠사마 야요이를 알리고 싶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출생과 성장기,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제안으로 이뤄진 미국 진출, 1950~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의 활동, 1973년 일본 귀국, 이후 창작 활동까지 쿠사마 야요이의 삶을 연대순으로 다룬다. 영화는 쿠사마 야요이와 직접 나눈 대화와 자서전의 문구, 수많은 사진과 비디오 외에 미술관 큐레이터, 미술품 수집가, 예술사 교수, 평론가, 갤러리 디렉터, 작가, 화가 등 미술 분야 전문가의 인터뷰와 글을 통해 열정, 영감, 집착, 심리적 트라우마 등 거장의 면모와 화가, 조각가, 설치미술가, 활동가, 작가, 페미니스트 등 작가의 활동을 폭넓게 조명한다. 고향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적인 면모를 탐구하기도 한다.


영화는 쿠사마 야요이의 두 가지 이면을 보여준다. 먼저, '작품'의 이면이다. 영화엔 '호박', '무한 거울의 방'을 비롯해 '무한 그물', '태평양', '남근의자', '집적: 1000척의 배', '나르시스 정원', '쿠사마의 자기 소멸', '맨해튼 자살중독자', '전쟁', '쿠사마의 사랑의 메시지' 등 쿠사마 야요이가 만들거나 참여한 그림, 조각, 설치미술, 영화, 시 등 다양한 작품이 등장한다. 그리고 어떤 개인적 경험과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통해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무언가 머릿속에 들어오면 지우질 못하는 강박신경증 진단을 받은 쿠사마 야요이는 "강박, 그리고 강박적으로 몰려오는 집적, 집적의 철학이 제가 강하게 끌리는 작품의 테마"이며 "저의 심리적 문제들을 작품으로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그녀에게 작품 활동은 곧 치유로서의 과정인 셈이다.


또 다른 이면은 '작가'로서 나타난다. 쿠사마 야요이가 미국에 진출한 1950년대 후반 뉴욕의 미술계는 여성 아트 딜러조차 여성 작가의 작품을 꺼릴 만큼 남성 작가가 업계의 주를 이룬 시절이었다. 여성, 게다가 동양인이었던 쿠사마 야요이가 갤러리의 문턱을 넘긴 참으로 어려웠다. 그녀는 과감하고 새로운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차별과 편견에 맞섰지만, 그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도리어 동료라 여겼던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루카스 사마라스 등 남성 작가들이 쿠사마 야요이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사태를 맞이하자 충격을 받아 우울증이 악화되어 자살 시도까지 한다. 한 전문가는 "쿠사마는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그들만큼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성차별과 인종 차별이 분명 개입했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성차별과 인종 차별에 시달리고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쿠사마 야요이는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예술가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다. 1989년 뉴욕 국제현대미술센터에서 활동 초기에 발표한 수채화를 포함한 모든 작품을 전시하는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을 개최하며 미국과 일본에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93년엔 일본 대표로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일본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에도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개인전, 순회전, 회고전이 계속 진행되는 중이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예술가의 흥미진진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또한, 우울증과 좌절감을 극복한 여성 아티스트의 치열한 투쟁사이기도 하다. 쿠사마 야요이는 성차별, 인종 차별, 정신 질환에 맞서 강인함으로 버텼다. 그리고 예술적 재능을 꽃피웠다. "세상의 편견에 맞선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감동적인 초상"(로스엔젤레스 타임스), "경의를 담은 의미 있는 찬사"(더 가디언) 등 해외 매체의 평가는 결코 과찬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이야기다. 제34회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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