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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Feb 28. 2016

영화 리뷰 <방 안의 코끼리>

시각의 '체험'을 넘어 현실의 '인식'으로


<아바타>가 일으켰던 흥행 돌풍은 3D가 새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새로운 수익원에 목말라하던 극장과 발전된 기술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창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며 3D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영화가 3D 카메라로 촬영되거나 2D를 3D로 변환되어 극장에 쏟아졌고, 범작과 졸작이 범람하는 와중에 주목할 만한 3D 영화도 하나둘 등장했다. <휴고>, <그래비티>, <잊혀진 꿈의 동굴>, <피나>,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은 창작 세계에서 입체 기법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입증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입체 영화의 열기는 한국에서도 유효했다. 제작 여건의 한계로 인해 할리우드처럼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몇몇 제작자와 감독의 관심 속에 3D의 가능성은 실험되었다. 괴수를 보여준 <7광구>, 배우들의 육체와 정사 장면을 강조한 <나탈리>, 몽환적인 여정을 걷는 <물고기>, 밀폐된 공간의 느낌을 전한 <터널>, 기술적인 역량이 총동원된 <미스터 고>는 한국 영화가 3D로 빚은 결과물이다.


한국 영화 교육의 산실인 한국영화아카데미(Korean Academy of Film Arts)도 3D에 관심을 기울였다. ‘3D 영화의 활성화’라는 기치 아래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출과 기획 중심의 교육과정인 ‘KAFA+ Next D’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총 30편에 달하는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2014년에는 <부당거래>의 류승완, <하루>의 한지승,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연출을 맡은 3D 단편 영화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 <신촌좀비만화>를 개봉시키는 성과를 일구었다. <치킨게임>, <세컨 어카운트>, <자각몽>으로 구성된 <방 안의 코끼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극장가에 선보이는 두 번째 3D 옴니버스 영화다. 메가폰은 <돌이킬 수 없는>의 박수영, <관능의 법칙>의 권칠인, <사이코메트리>의 권호영 감독이 잡았다.



<신촌좀비만화>와 <방 안의 코끼리>는 감독과 이야기를 연결하면 커다란 차이점이 나타난다. <신촌좀비만화>에서 류승완의 <유령>은 신촌 사령카페 살인사건이란 실화가 소재이고, 한지승의 <너를 봤어>는 좀비 로맨스였다. 김태용의 <피크닉>은 여덟 살 아이가 겪는 환상의 모험을 다루었다. 이렇듯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면모보단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쪽에 가까웠던 <신촌좀비만화>와 달리, <방 안의 코끼리>는 감독들이 장기를 발휘했던 장르 위에서 새로움을 모색한다. 각자의 무대는 블랙코미디, 멜로, SF 다.


단편 <핵분열가족>과 <가족 같은 개, 개 같은 가족>, 장편 영화인 <죽이러 갑니다>와 옴니버스 영화 <판타스틱 자살 소동>의 <암흑 속의 세 사람>에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B급 코드와 피범벅을 양념 삼아 요리했던 박수영 감독은 <치킨게임>에서도 블랙코미디의 색채가 생생하다. 해안 절벽에 매달린 자동차에서 여배우(신동미), 수입차 딜러(곽시양), 정체불명의 괴한(김태한)이 벌이는 소동극인 <치킨게임>엔 집, 학교 등 작은 공간과 반전에 능한 감독의 장기가 유감없이 나타난다.


SNS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즐기던 인경(미람)이 한 남자(서준영)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세컨 어카운트>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으로 대표되는 세태 속에 사랑은 어떻게 숨 쉬고 있는가를 젊은 눈높이로 포착한다. <사랑하기 좋은 날>로 데뷔한 이래 <싱글즈>, <뜨거운 것이 좋아>, <참을 수 없는>, <원더풀 라디오>, <관능의 법칙>까지 줄곧 사랑과 여성을 이야기했던 권칠인 감독은 <세컨 어카운트>에서도 관심사가 변함없다.


<평행이론>에서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사람이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는 소재로, <사이코메트리>에선 신체 접촉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자를 등장시킨 바 있었던 권호영 감독은 <자각몽>에서도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장르적 행보를 이어간다. 타인의 의식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하는 비밀 요원 지섭(권율)의 이야기를 건네며 SF 영역에 발을 내딛는 권호영 감독에겐 할리우드의 상상력에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신촌좀비만화>가 에피소드 간에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다면, <방 안의 코끼리>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선명하다.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리는 게임 명칭이자, 모두 파국에 치달을 수 있는 무분별한 경쟁을 비꼬는 용어인 ‘치킨 게임’을 제목으로 쓴 <치킨게임>은 다양한 의견을 뭉개버리고 오직 아군과 적으로 구별하려는 한국 사회의 흑백 논리를 비판한다. 하얀 태권도복을 입은 남자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그리고 가운데 위치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를 보여주는 한 장면은 극단으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날카롭게 함축한다. 뒤엉킨 세 사람의 대결은 3D로 호소력을 더한다.


<세컨 어카운트>는 일명 ‘세컨 계정’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익명의 나를 건드린다. 가상의 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는 SNS는 자유로이 타인과 교류하는 장으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익명에 기대어 남을 공격하는 무대로도 악용된다. 인경이 남자에게 받은 상자를 떨어뜨리며 그 속에 담긴 종이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은 3D의 효과와 어우러져 진실함이 결여된 관계 맺기의 공허함을 잘 전달한다.


<자각몽>은 꿈을 꾸는 도중에 스스로 꿈이란 사실을 인지한다는 사전적인 용어다. 3D의 질감이 빚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주인공이 마주하는 것은 다른 이의 죽음과 그것을 막지 못했던 미안함이다. <자각몽>은 대한민국 내면에 감춰졌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의식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꿈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꿈과 현실이 구별도 안 간다는 주인공의 대사는 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한다.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는 분명한 사실을 못 본 척 할 때를 의미하는 서양 속담이다. <방 안의 코끼리>는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알면서 애써 외면하는 흑백 논리, 소통의 문제점, 죄의식이란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세 명의 감독은 3D로 시각의 ‘체험’을 넘어 현실의 ‘인식’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결과물은 매우 근사하다.


웹진 넥스트플러스 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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