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을 필터로 추출한 불신의 정서
인간은 괴이한 이야기에 매혹을 느낀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기이한 이야기나 수학여행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다. 과거엔 구전과 책으로 전해지던 괴담은 TV가 발달하며 <전설의 고향>,<토요미스테리 극장> 등으로 무대를 옮겼다. PC 통신, 인터넷, 스마트폰이 활성화되면서 괴담은 더욱 가까워졌다. 이젠 클릭이나 터치 몇 번으로 어렵지 않게 괴담을 쓰거나 접할 수 있다. 시대는 흐르고 방법은 바뀔지언정 괴담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2013년 5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숨바꼭질>은 영화로 만들어진 도시 괴담이다. 소재로 삼은 것은 서울과 수도권 일부 오피스텔과 원룸촌의 초인종 옆에 이상한 표시가 적혀있다는 '초인종 괴담'. 메가폰을 잡았던 허정 감독은 두 번째 연출작인 <장산범>에서도 괴담을 소재로 쓴다. 그는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목격되고 있다는 하얀 털을 가진 괴생명체 이야기인 '장산범 괴담'에 주목한다.
장산범 괴담은 이미 온라인에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2013년엔 웹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정 감독이 괴담계에 인기 스타인 장산범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괴담에 관심이 많았다"며 "이야기가 시대상을 반영하고 각자의 목격담과 경험, 혹은 다른 이야기들까지 섞여 구전으로 전파되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관심이 영화로 표현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도시를 떠나 장산으로 이사를 온 희연(염정아 분)과 민호(박혁권 분) 부부가 우연히 숲속에서 여자아이(신린아 분)를 만나고 그 후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을 그린 <장산범>은 장산범 괴담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덧입혔다. 아빠 목소리에 잠에서 깬 아이가 아빠와 대화를 나누다 다시 잠들었는데 사실 아빠는 다른 방에 있었다는 내용의 '아빠 괴담'과 호랑이가 오누이의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내는 대목이 나오는 전래동화 '해님 달님'은 <장산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영화의 도입부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검은 고양이>에서 빌려왔다. 아내의 시체를 벽 안에 유기하고 완전범죄를 꿈꾸던 남편의 악행이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드러난다는 소설의 설정은 동굴에 갇힌 강아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장산범>은 영화 <마신자>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빨간 눈과 소리로 시선을 끈 후에 영혼을 빼앗는 존재를 뜻하는 대만의 괴담 '마신자'와 '장산범'은 닮았다. 영화 역시 괴담을 바탕으로 한 점, 목소리 등으로 사람의 유혹하는 전개, 죄의식을 자극한다는 설정에서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마신자>가 마신자의 괴기한 형체를 보여준다면 <장산범>은 장산범의 외형에 힘을 주지 않는다. 괴담을 통해 상상한 이미지 또는 웹툰에서 접한 것과 거리가 멀다는 의미다.
<장산범>은 장산범을 묘사하는 대신에 '소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허정 감독은 "전부터 소리가 소재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장산범 괴담을 듣자마자 바로 내가 찾던 소재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로 <장산범>은 소리를 중요시한다. <장산범>에서 느끼는 소리의 힘은 구전 또는 문자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주연을 맡은 박혁권 배우는 "시나리오를 받고 어떤 사운드와 영상으로 완성될지 궁금했다"고 이야기한다.
소리를 담당한 김석원 사운드 디자이너는 <장산범>의 사운드를 '방향성'으로 정의하며 "극장 사운드 시스템은 5.1 돌비 채널이 대다수이지만, 그 채널에서도 360도 전 방향 효과를 가진 사운드를 통한 스릴를 완성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장산범>은 극장에서 소리를 체감하는 맛이 풍부하다. 백미는 바로 동굴 장면. 암전과 소리가 공간을 지배하는 동굴 장면은 쉼 없이 관객의 심장과 고막을 자극한다.
얀 해롤드 브룬번드 교수는 책 <사라진 히치하이커>에서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 단순한 이야기, 실재한다는 신념에 근거, 의미 있는 메시지 또는 도덕성을 암시를 도시 전설의 요건으로 꼽았다(참조: 조민준, <한겨레>, "도시괴담은 공포를 먹고 산다"). 그가 언급한 요건 가운데 세 번째는 괴담이 그 시대의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임을 뜻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괴담에도 시대의 정서가 반영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은 군대나 학교라는 갇힌 집단을 소재로 사용하여 폐쇄성을 드러냈다면 최근 늘어난 조선족 등 중국과 관련된 괴담은 우리 사회에 흐르는 경계심을 표출하고 있다.
<숨바꼭질>에서 다룬 '초인종 괴담'은 시선과 침입의 공포를 담고 있다. 여기에 영화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동산의 욕망을 투사하여 "집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건드렸다. '장산범 괴담'은 낯선 존재가 주는 무서움이 서려 있다. 영화는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장산범을 통해 '불신'을 끄집어낸다.
영화는 목소리에 홀린 사람들을 보여주며 "목소리를 믿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소리다. 확대하여 해석하면 목소리에 담긴 권위와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믿음이 안 가고 방송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세월호의 "가만히 있으라"는 거짓된 목소리를 떠올린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장산범>은 의도한 것보단 시대의 무의식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나온 많은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장산범>은 허술한 설정도 나타나고 후반부는 다소 늘어지는 느낌을 준다. <디센트>,<인시디어스>와 겹쳐지는 장면도 있다. 인물을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아쉬움도 남긴다. <숨바꼭질>처럼 부족한 부분이 많다.
빈칸을 채워주는 가장 큰 힘은 소리다. 가히 사운드호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영화에 나타난 상실과 죄책감이 시대와 맞물려 남다르게 다가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괴담을 필터로 욕망과 불안을 추출하는 <장산범>을 보고 허정 감독이 좋은 각본을 만나면 엄청난 물건을 하나 만들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2017.8.17
영화칼럼니스트 이학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