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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ug 23. 2017

영화 리뷰 <100미터>

100미터 완주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광고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라몬(다니 로비라 분)은 아내 인마(알렉산드로 지메네즈 분)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린, 일과 사랑을 거머쥔 성공한 남자다. 고민이 있다면 예전부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장인어른 마놀로(카라 엘레할데 분)와 티격태격하는 정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라몬에게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다발성 경화증'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라몬은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km를 연달아 치르는 철인 3종 경기를 인생의 새로운 목표로 삼고 도전장을 낸다. 강하게 반대하던 인마는 마놀로가 돕는 조건으로 라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문자 매체와 영상 매체에서 흔히 접하는 것 중 하나가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다. 처한 상황이 고통스러울수록 눈물의 농도는 짙어진다. 실화라면 감동은 더욱 커진다. 분명 흔해 빠졌건만 '인간 승리'의 서사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좌절을 극복하고 내일을 긍정하는 메시지가 희망을 주기 때문이지 싶다. 사회적 경험을 쌓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한 의지로 맞부딪히는 도전의 가치는 한층 크게 다가온다. 도전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그럴 것이다.



영화 < 100미터 >도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인간 승리를 다룬다. 영화는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실존 인물 라몬 아로요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라몬이 겪는 다발성 경화증은 면역체계에 오류가 일어나 신경을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공격하는 병으로 운동장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며 재발과 완화를 반복하는 무서운 병이다. 김명민 배우가 열연한 <내 사랑 내 곁에>(2009)에서 다발성 경화증과 유사한 루게릭병을 통해 마비되는 육체의 두려움을 보여준 바 있다.


"1년 후면 100m 걷기도 힘들 것"이란 진단을 받은 라몬은 깊은 상심에 빠진다. 영화 속엔 라몬처럼 다발성 경화증을 갑작스럽게 접한 환자들의 얼굴이 담겨 있다. 어떤 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어떤 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 라몬은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라며 애써 병을 외면하나 시시각각 변하는 육체의 상태 앞에서 그는 무너진다. 절망의 끝에서 그는 철인 3종 경기의 도전이란 희망의 불씨를 찾는다. 환자가 왜 그걸 하느냐고 묻는 인마에게 라몬은 반문한다. "환자 아닌 사람은 왜 하는데?"


< 100미터 >가 다른 '인간 승리' 영화들과 다른 점은 라몬과 마놀로의 관계에 있다. 둘은 단순히 도움을 주고받는 '멘토-멘티' 구도를 형성하지 않는다. 라몬이 육체가 굳어가는 병에 걸렸다면 마놀로는 아내를 갑작스레 잃은 상처로 마음이 굳어버린 상태다. 대립하던 두 사람이 점차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는, 굳어버린 육체와 마음을 풀어주는 과정엔 웃음이 짙게 배어있다. 그 속에서 영화는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을 만든다. 절벽에 선 라몬이 마놀로에게 자신의 처지를 느끼도록 해주는 장면과 마놀로가 자전거를 타며 라몬이 선물한 영상을 보는 장면은 정동을 영상의 언어로 멋지게 쓴 대목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라몬은 "가장 중요한 건 이기는 거죠"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는 다발성 경화증이란 늪에서 빠져나와 가족들과 같은 병을 겪는 환자들의 희망을 짊어지고 이기는 것이 아닌 완주를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곁에 선 마놀로는 "포기란 건 사전에 없다"고 외치고 인마는 "당신만의 경기가 아닌 우리 경기야"라고 말하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절망의 상징이었던 100m가 의지의 상징으로 변하며 가족 모두가 함께 100m를 달리는 장면은 영화가 그리는 내일의 풍경이다.


<군함도>,<덩케르크>,<스파이더맨: 홈커밍> 등의 대작 틈바구니에서 개봉한 < 100미터 >는 전국 관객 1738명이란 성적표를 거두었다. 상업적인 실패가 웃음과 감동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극장가에선 쓸쓸하게 막을 내렸지만, 다운로드와 IPTV에서 많은 관객이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 100미터 >는 그럴 가치가 충분한 좋은 영화다. 아직 영화 < 100미터 >의 경기는 끝난 게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영화 속 문구처럼 100m 완주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나 또한 박수를 보낸다.


2017.8.9

영화칼럼니스트 이학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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