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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Jan 01. 2018

영화 리뷰 <콜로설>

분명 괴수 영화인데... 어쩜 이리 '신박'할까


나초 비가론도 감독의 첫 단편 영화 <영화수업>(1999)은 그가 어떤 태도로 영화를 만드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3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간단한 상황과 두어 가지 장치만으로 관객의 궁금증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를 설명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예측불허'는 이후 그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로 기능한다.


3분짜리 영상 3개를 묶어서 정체성을 탐구한 <코드 7>(2002), 식당에 모인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오전 7시 35분>(2003), 범퍼카를 통해 남성이 힘을 증명하려는 <충돌>(2005), 여러 차원에 존재하는 나를 연결하는 <세상을 바꿔라>(2007), 외계에서 온 우주선을 카메라로 찍는 남녀가 등장하는 <일요일>(2007), 한 여자의 모습을 수백 명의 얼굴로 보여주는 <마리사>(2009), 자신의 감정을 기계로 표현하는 남자가 포착한 <카를로타>(2013) 등 여러 단편 영화를 통해 그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장편 영화에서도 다음을 궁금케 하는 나초 비가론도의 재능은 반짝거렸다. 장편 데뷔작 <타임크라임>(2007)은 시간 여행을 하는 주인공이 다른 시간대의 자신과 사투를 벌인다는 구상이 돋보인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긴박한 상황이건만 사랑에만 몰두하는 황당한 연애담인 <엑스트러터레스트리얼>(2011)은 5명의 배우와 대부분 분량을 집안에서 소화하는 소박한 규모로 만들어졌다. <오픈 윈도우즈>(2014)는 여배우의 열성팬이 해커가 친 함정에 빠져 범죄에 연루되는 과정을 컴퓨터 화면과 CCTV만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야심으로 충만하다. 옴니버스 호러 영화인 < VHS 3 >에선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나의 세계를 넘어간다는 발상이 빛을 발했다.


나초 비가론도의 단편, 장편, 옴니버스 영화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 소재가 흥미롭다. 둘, 얼핏 단순하게 보이는 설정으로 시작하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는 흘러간다. 셋, 커지는 사태 속에서 영화적 실험(<타임크라임>의 시간 편집과 <오픈 윈도우즈>의 영상 편집)이 이루어지고, 한정된 인원과 공간 같은 제작 여건의 제약은 이야기의 실험무대(<타임크라임>과 <엑스트러터레스트리얼>이 그렇다!)로 활용된다. 넷, 참신한 소재를 독특한 스토리텔링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차용된 장르의 관습은 산산조각이 난다(<타임크라임>은 시간 여행 장르, <엑스트러터레스트리얼>은 외계 침공 장르, <오픈 윈도우즈>는 관음을 다룬 스릴러 장르에서 새로운 문을 열어젖혔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예측불허'란 단어에 수렴된다.


"색다르고 특이한 시나리오" 앤 해서웨이의 기억



<콜로설>(한국에선 2017년 4월 개봉)은 나초 비가론도의 네 번째 장편 영화다. 제작 규모는 이전보다 커졌다. 캐스팅 역시 <레미제라블>의 앤 해서웨이,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의 제이슨 서디키스, <미녀와 야수>의 댄 스티븐슨으로 화려함이 더해졌다. 장르는 무려 괴수의 색채가 가미된 SF 스릴러! 면면이 커진 탓에 롤랜드 에머리히가 감독한 <고질라>(1998)의 유명한 카피이자 패착이었던 "'Size does matter(크기가 중요하다)"가 떠오른다.


나초 비가론도는 자신의 장점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구호 "It's the economy, stupid(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인용하면 나초 비가론도는 "바보야, 문제는 이야기야"란 영화의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콜로설>은 직장과 남자친구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글로리아(앤 해서웨이 분)가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 한복판에 나타난 거대 괴수와 연결되었다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를 앤 해서웨이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주 색다르고 특이한 시나리오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존 말코비치 되기>나 <망각의 삶>처럼 판타지스러운 영화라 매력적이었다."


특별한 이야기인 <콜로설>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각본을 쓴 나초 비가론도 감독에 따르면 두 명이 공원에서 술에 취한 채로 싸우고 두 거대 괴수가 다른 곳에서 맞서는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밝힌다.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단계에서 한 여자를 놓고 두 남자가 다투는 구도를 넣었더니 흔한 삼각관계로 흘러 지금의 인물 구도로 바꾸니 자연스럽게 글로리아와 오스카가 떠올랐다고 말한다. 여기에 두 사람이 싸우는 이유를 찾으면서 특별한 시나리오 <콜로설>은 완성되었다.


공간과 괴수로, 주인공 내면 표현한 감독



<콜로설>은 괴수 장르의 형태를 지녔으나 거대 괴수가 맞붙는 <고질라>, <퍼시픽 림>, <킹콩>의 전개와 거리가 멀다. 영화는 폭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괴수 장르를 빌렸을 뿐이다. 영화에서 글로리아와 오스카는 '통제 불능'에 놓여있다. 두 사람은 자신과 타인에게 중독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글로리아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제멋대로 군다. 오스카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한다.


영화는 두 가지 방법으로 글로리아와 오스카의 내면을 묘사한다. 하나는 공간이다. 글로리아의 집은 텅 비어 있다. 그녀의 현재 모습처럼 말이다. 오스카는 자신이 준 물건으로 글로리아의 집을 하나둘 채워가며 잠식하려고 한다. 자상한 얼굴 뒤에 감춰진 삐뚤어진 감정과 중독된 폭력이란 오스카의 이중성은 엉망진창인 집으로 드러난다. 그가 운영하는 컨트리바는 한층 직설적이다. 극 초반에 나오는 "이 가게의 어두운 비밀"이란 대사는 그의 가면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글로리아와 오스카의 내면을 보여주는 다른 하나는 괴수다. 영화는 괴수의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회를 둘에게 한 차례씩 준다. 그러나 결과에 반응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글로리아는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며 바뀌려고 몸부림친다. 반면에 오스카는 "왜 자신한테 용서를 구하는데?"라고 주장하며 폭력을 일삼는다.


<콜로설>은 그들의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며 타인과 관계에서 이뤄지는 여러 층위의 폭력을 새로운 각도로 조명한다. 그리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나라와 미국을 괴수가 등장하는 무대로 삼았기에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을 여지도 다분하다.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은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스페인에서 최근 주목하는 후배 감독을 묻자 "나초 비가론도 감독의 <콜로설>은 내가 좋아하는 몬스터가 등장하는 영화라 추천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더 바>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는 <줄리에타>의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함께 현재 스페인 영화를 대표하는 거대한(colossal) 이름이다.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는 코미디, 스릴러, 드라마의 요소를 뒤섞고, 괴수 영화를 배반하며, 로맨틱 코미디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나초 비가론도를 스페인 영화의 미래로 눈여겨본다. 자신과 비슷한 기발한 상상력이란 DNA가 나초 비가론도에게도 있음을 알려준다. 앞으로 나초 비가론도를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는 스페인 영화의 거대한(colossal) 내일이다.


201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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