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哭聲)에 대한 생각
애초에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재미로 적어 보는 영화 곡성 해석.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히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리라"
답은 처음부터 주어졌다.
종구(곽도원)는 인간이다.
무명(천우희)은 신, 혹은 신의 대리인이다.
외지인은 악마였을까?
죽기 전까지는 한낱 무속인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인간의 손에 죽기 전에 인간이었던 것처럼. 외지인은 시장에서 닭도 사고 버스도 탄다. 심지어 여권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서 도망치며 절벽에서 떨어져 아파하고, 울고, 무명(신)을 두려워한다. 아직 신과 대등한 악마가 되지 못한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무작위로 제물로 바치지만, 누가 미끼를 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곤 죽고 나서 사흘 만에, 동굴에서, 악마로 부활한다.
사흘 만에 부활한 악마는 자신을 찾아온 부제-이삼에게 성경을 읊고 손의 성흔을 보여주며 말한다.
"나다".
악마는 악마인가 예수인가?
부제 양이삼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부활한 악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무명과 부제뿐이라는 것이다. 무명이야 신이라고 놓고 보면 전지전능하니 당연히 알고 있겠다 쳐도, 부제는 악마가 부활해 동굴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을까? 돌이켜 보면, 그는 처음부터 악마의 언어를 구사하며 악마의 말을 전달하는 존재였다.
영화 속에는 종구가 뭐 이름이 그렇냐며 부제의 이름에 코멘트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냥 있는 장면이 아닐 것이다. 절대자 1이 없는 이름, '이삼'. 이삼은 사를 향한다. 사탄.
부제는 악마를 찾아가, 악마가 말하는 대로 믿겠다고 한다. 그렇게 믿자 악마가 된다. 경외심을 갖자 예수가 된다. 악마는 부제의 사진을 찍음으로써 부제의 영혼을 잡아두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부제는 그렇게 악마의 부제가 되었을까.
외지인은 부제와의 대면에서 "나는 나다"라고만 할 뿐 그 외엔 자신에 관해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악마라고 믿자 악마가 되었고, 경외심을 갖자 예수가 보였다. 그러나 시장 아주머니에게 그는 그저 닭 사러 온 남자일 뿐이고, 신부에게는 그저 무성한 소문의 대상일 뿐이다. 의심하지 않는 자들에게 외지인은 아무도 아닌 존재였다. 외지인은 악마가 맞는가?
일광
처음에 일광(황정민)은 외지인과 동등한 존재로 동등하게 대결하는 존재였다. 굿판에서 황정민이 말뚝을 박을 때마다 일본인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대놓고 보여줘 놓고, 그 굿판이 애초부터 아무 의미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술을 행하는 무속인으로서 서로 견제하던 것일까. 일광과 일본인은 똑같이 각자의 방식으로 악마의 의식을 행하는 무속인이었지만, 인간에게서 죽임을 당한 것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악마로써 부활했을 것이다.
외지인이 악마로 부활한 후, 일광은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실패하고 비로소 악마의 하수인이 된다. 어쩌면 일광(日光)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인의 하수인이 될 것임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모
장모는 누구에게서 악마 무속인 일광을 소개받은 것일까?
마지막의 집 안에서 아이 엄마는 확실히 죽었지만, 장모의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장모는 과연 죽었을까?
장모는 효진의 상태가 좋아지고 종구가 일광의 제사상을 치우려 할 때, 이것이 다 일광의 덕이라며 그를 저지한다. 악마에 씌인 효진이는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음식을 먹는다. 첫 장면에서, 장모는 사건이 생겨 떠나려는 종구에게 '사람이 죽었어도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고 '먹음'을 종용한다. 장모는 어떤 존재인가? 어쩌면 그도 악마의 하수인이었을까.
무명은 돌을 던져 종구의 관심을 끌고, 그에게 헛소문과 미신을 믿지 말고 내 말을 들으라고 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할매가 굿하지 말랬다고, 굿하면 다 죽는다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고 굿을 해서 다 죽었다고 한다. 굿을 하면 죽는다. 애초에 굿은 악마의 의식이었던 것. 굿을 멈추자 아이가 살아났다.
골목길에서 무명은 종구에게 나를 믿으라, 덫을 쳐 놨으니 집으로 가지 말라 애원하며 인간의 손을 붙잡는다. 손을 붙잡음으로써, 뼈와 살이 있으니 나를 만져 보라는 예수의 말처럼, 악한 존재가 아니니 믿으라 한다.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 22:34)
하지만 종구는 무명을 뿌리치고 떠났다. 신이 절망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어초는 계시이자 믿음의 상징이다. 종구가 믿음을 저버리자 꽃이 시들어 버렸고, 눈앞에는 재앙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덫은 악마를 잡기 위한 것이었고 아이나 엄마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신은 무능했고 너무 늦었다. 이미 가족이 몰살당했는데 악마를 잡고 말고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신은 악마를 처단할 수도 있었고,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일광이 피를 토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신은 직접 나서서 악을 처단하지 않았나. 아비규환이 벌어지는 통에 신은 어디에 있었나.
신은 악을 제거할 의지는 갖고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 에피쿠로스
성경에는 '욥'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어느 날, 사탄이 신에게 내기를 건다. 지상에 '욥'이라고 하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깊은 사람이 있는데,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면 욥은 신을 욕하게 될까. 사탄이 말하길, 신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틀림없이 욥도 신을 원망할 것이라고 부추긴다. 신은 허락한다. 사탄은 욥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리고, 그다음에는 욥의 자식들을 몰살시킨다. 후에 욥의 믿음을 어여삐 여긴 신이 더 큰 은총을 내렸다지만, 이미 죽은 자식을 어쩌란 말인가.
덫을 쳐 놨으니 집에 들어가지 말어. 지금 집에 가면 니 집안 씨가 마를 것이여.
뉴스와 신문에는 계속해서 이 사건이 독버섯 때문이라고 보도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냥 이 모든 일이 독버섯 때문이었고, 악마고 신이고 굿이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괴현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곡성이라는 공간은 무엇인가.
영화 '곡성'은 울음소리이고, 지옥도이며, 그 자체로 압도적인 하나의 굿판이다.
신으로서의 무명이 그렇듯, 도무지 실체를 내주지 않는다. 관객의 어리석음을 질타할 뿐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영문을 모른 채 압도당할 뿐이다.
나름대로 영화를 본 후 들었던 생각들을 줄줄이 적어 보았지만, 스스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 가지 있다.
1. 악마의 목적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면, 왜 인간으로부터 도망쳤는가? 무명은 왜 종구가 악마를 죽이게 했는가?
2. 박춘배는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까
3. 멍하니 있던 효진이는 악마에게서 풀려났을까? 아니면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