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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꼬기 Feb 12. 2019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사랑에 빠질 확률

산텔모 지구 편

누군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유럽 같다’고 표현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아시안 같다’ ‘한국인 같다’라는 말로 형용하면 억울하잖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 어떤 수식어도 아닌 부에노스 아이레스 답다는 말만이 그곳을 형용할 수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크게 다섯 가지 동네로 나뉘는데 그 동네들이 모두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다. Ba의 구시가지 산텔모부터, 서울의 여의도 혹은 반포 한강지구라 불리는 푸에르토 마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가 있다는 비싼 동네 레콜레타, 대학생들의 핫플레이스인 팔레르모, 탱고의 고장이라는 항구 동네인 라보카까지. 그중 가장 부에노스 아이레스스러웠던 산텔모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산텔모,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산텔모. 요즘 서울에서 을지로, 익선동이 레트로라는 이름 아래에서 사랑받는 것처럼, BA의 감성이 낭랑해 젊은 이들에게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골목마다 숨어 있는 소품샵과 펍, 카페 그리고 오래된 레스토랑과 시장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동네이다.


산텔모 일요시장

 이 동네가 사랑스러운 첫 번째 이유는 단연 일요일의 산텔모 시장이나.


산텔모 지구의 일요일엔 시간이 멈추고 과거가 펼쳐진다. “올라? 꼬모 에타스” 라며 반겨주는 추로스 아저씨를 만나는 순간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단돈 500원짜리 추로스를 손에 쥐고 시장을 거닐다 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살아온 긴 시간 동안 수집된 추억 어린 골동품, 정성이 깃든 잡화와 음식까지 그들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셀 수 없이 많은 골동품은 이 나라가 한 때 얼마나 부유했는지, 또 이 추억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땐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어쩐지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것 같지 않나?


감성에 젖는 것도 좋지만, 이것 저것 여행을 기념할 기념품들을 사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흥정하는 재미에 맥주병으로 만든 맥주잔을 사보기도 하고, 내 이름이 새겨진 가죽 제품을 사보는 것도 추천한다.

내가 원하는 문구와 그림을 노트에 그려주면 그대로 새겨주신다. 가격은 카드지갑 기준 400페소

정신없이 시장을 누비고 나면 어느 덧 해는 시장 끝 지평선 너머로 숨어 자취를 감춘다. 정리하는 점포 사이로 추로스 아저씨가 지나가시며 남은 추로스라며 두어개를 건네주신다.추로스를 받아 한 입 ‘아작’하고 베어 먹을 때면, 반나절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2018년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 오게 된다.

산텔모 마켓

백화점보다 시장을 좋아한다. 온갖 냄새가 다 나는데 그중에 사람 냄새가 제일 좋아서. 산텔모 마켓은 매일 장을 보러 가는 친숙한 곳이자, 아르헨티나 사람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비로소 내가 이 낯선 도시에 ‘살고 있음’을 느꼈고 ‘행운’을 만났다.

이 곳에서의 하루는 시장에 출근 도장을 찍어야만  시작했는데, 사실 장보기는 뒷전이고 엠빠나다를 먹으러 가기 위함이었다. 다찌 자리에 앉아 쎄보샤이께소(양파&치즈) 맛 엠빠나다에 주황색 매운 소스를 뿌려먹어야만 장을 볼 힘이 생겼달까. 게다가, 알고 보니 이 집 굉장히 유명한 맛집이었다. 이런 유명한 집이 내가 아침마다 아무 때나 들릴 수 있는 단골 집이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옥수수엠빠나다 빼고 다 맛있는 el hornero

엠빠나다로 배를 채우고 장을 볼 때면 꼭 정육점과 채소가게를 들린다. 소고기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해서, 소고기 값이 채소 값과 맞먹는다. 부위도 다양하고 이틀에 한번 소를 잡기에 여러 가지 신선한 고기를 맛볼 수 있는데, 스페인어를 못하는 나는 매번 초록창에 “소고기 부위”를 검색해 사진으로 주문을 하곤 했다.

그 와중에 정육점 오빠에게 추천해 준 마땀브레(갈비덧살)라는 부위는 살짝 구워 치미추리 소스와  먹으면 환상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이런 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던가? 아니 이런 식감을 느껴본 적 있던가?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생에 지구 반대편에서 이리 희귀한 부위를 먹어볼 기회가 생기다니 참 행운이다.

장을 다 보고 나면, La churreteria라는 엠빠나다 옆집의 추로스 가게에서 간식을 사 간다. 따끈한 추로스에 둘세 데 레체(아르헨티나식 캐러멜) 토핑을 추가해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개당 700원에 서너 개를 한 번에 주문하면 가끔 서비스도 주시던 아저씨. 한국에 돌아간다 했을 때 사진을 찍자 하셨다. 낯선 곳에 오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 건, 그 사람이 날 기억하고 싶다 해주는 것 또한 정말 큰 행운이었다.


탱고

탱고의 고장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선 곳곳에서 탱고를 느낄 수 있다. 수많은 탱고쇼와 밀롱가는 당연하고, 탱고를 그린 벽화, 길거리 공연 등 그들이 숨 쉬는 모든 곳이 곧 공연장이었다.

특히, 산텔모 일요시장 점포들이 하나 둘 정리를 할 때면 노상에서 탱고 공연이 열리곤 한다. 물론 고상하게 앉아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 한 잔 곁들이며 보는 공연은 아니지만, 이 나라 사람들 사이에 서서 공연을 보는 이 기분은 천금을 줘도 쉽게 얻지 못할 추억이 분명하다.

산텔모 지구에는 영화[여인의 향기]의 배경지로도 유명한 Bar Sur 탱고바도 있는데, 다른 탱고 공연과 다르게 바에서 진행되는 공연이라 땅게리아와 소통을 할 수 있다. 공연 마지막엔 포토타임도 갖게 해 준다만, 음식도 공연도 클래식 탱고 공연에 비하면 아쉽긴 하다. 그래도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루는 한 번 탱고를 춰봤는데 ‘탱고는 위로야’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먼저 손을 내밀어 탱고를 청한 상대와 서로를 안은 채로 스텝을 밟으니 상대의 체온이 전해질 때 무언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스텝이 꼬여서 틀려도 괜찮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탱고가 위로해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르헨티나에서 산텔모가 가장 낙후되고 위험한 느낌이라고 한다. 부정하지 못한다. 지어진지 100년이 넘은 건물이 많아 집들의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 내가 머물던 집은 하루는 물난리가 나고, 난방이 되지 않아 히터 두 개로 버텨내야 했다. 가로등이 많지 않아 밤이면 어쩐지 으슥한 느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텔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침이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이웃 주민과 시장 사람들의 따뜻함, 탱고 음악이 들리는 곳이 곧 무대가 되던 활기참, 으슥해 보였던 골목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술집과 밀롱가의 신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그게 음식이든 술이든 사람이든 장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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