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지 않기 위해

그림책

by 글도둑

나에게 시작은 현재의 종말이고 새로운 두려움이었다. 시작과 끝이 만들어내는 노을은 향긋했지만, 뜨는 해를 보면 두렵고 지는 해를 보면 왠지 울적해지는 것이 나라는 놈이었다. 끝이 두려웠기에 새로운 시작이 싫었다. 나에게 해돋이는 어디까지나 오천 원어치 복권에 천 원짜리 당첨금 같은 향기였다.


매년 새해가 되면 뜨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러 가곤 했다. 딱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기보다는, 가족 모두가 모여서 한 곳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해보면 그때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년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같은 흔하디 흔한 소원을 풍등에 실어 보내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도록 그저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겨울 새벽 강추위에 벌게진 양 볼로 어묵 국물을 홀짝이는 소리, 인파가 내뿜는 새벽 밤안개 같은 입김들과, 파도소리 사이에 간간이 들려오는 코 먹는 소리였다. 매년 새로운 시작 속에서 항상 그대로인 풍경은 시작을 알리며 뿜어내는 빛줄기보다 나를 설레게 했었다.


그때의 나는 죽고 지금 이 순간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년도 떠오르는 태양도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자리. 항상 그 자리에 있어왔고,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까지는 그곳에 떠 있을 별자리. 시작은, 내가 그곳에 별자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곳을 향해 첫 발을 내딛을 때였다. 길을 안내하는 안내원은 유한하다. 사람이 세워둔 이정표도 쓰러지고 헤진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이 길이 얼마나 더 가야 할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무한히 알려 준다. 그렇기에 모순되게도 새로운 시작에 모험을 걸었다. 도착지가 없으면 끝도 없는 법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별자리를 바라보고 걷는 한 이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시작을 하는 여행을 하는 중이다.


이번 새해의 향기는 좀 더 향긋하리라. 꽁꽁 얼어 발개진 코끝보다 더 붉은 새해의 향기를 어느 때보다 두 폐 가득 채워 넣을 것이다. 그리고서는, 너를 향해 끝없는 걸음을 시작해야지. 나도 변치 않는 별자리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별자리에게는, 자신을 향해 끝없는 걸음을 행하는 나그네가 곧 별자리이겠지.

나는, 이번 1월 1일은 해를 기다리며 10년 넘게 늘 먹던 어묵 국물이 아니라 따뜻한 컵라면으로 바꿔보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음, 왠지 용기가 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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