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개학 전 새 학기를 앞두고 담임 배정을 받자마자 새 교실을 구석구석 정성껏 청소했다. 그런데 다음 날, 행정실에서 청천벽력 같은 메신저가 날아왔다.
“내일 전 학년 교실과 특별실, 복도 전체 청소를 실시하니, 오늘 문을 잠그지 말고 퇴근하시기 바랍니다.”
순간 기운이 탁 풀리며 허탈함이 밀려왔다. 학교 일이라는 게 늘 이렇다. 혼자 의욕만 앞서서 미리 움직였다가 이중으로 고생하거나 괜한 수고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몇 번을 당하면서도 나는 성질이 급해 아직도 미리 일을 하다가 많은 헛수고를 만들곤 한다.
어느 부장회의 시간, 교장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려는 공모 사업에 대해 의견을 물으셨다. 무심코 아이디어를 꺼냈더니 바로 직격탄이 날아왔다.
“OOO 선생님이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한번 맡아보시는 건 어때요? 담당자가 아니더라도 협조를 해주셔도 되니까요.”
교사들 사이에는 뼈 있는 농담처럼 통하는 '생존 법칙'이 있다. 업무는 미리 끝내더라도 절대 티 내지 말고 마감 직전에 완료할 것. 관리자가 새로운 사업을 제안할 때 결코 아는 체하거나 나서지 말 것. 모든 일은 상황에 따라 여유있게 눈치를 봐가며 처리할 것.
이 모든 조언의 핵심은 결국 하나다. 너무 서두르지도, 앞서나가지도, 잘난 척하지도 말라는 슬픈 지혜다.
하지만 가끔은 입안이 근질근질해질 때가 있다. "나라면 정말 잘할 수 있는데" 싶은 업무를 마주치게 되면, 머릿속에는 구체적인 활동 계획, 필요한 물품 리스트 등 그림들이 벌써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과도한 열정이 나의 발목을 잡는 순간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철학을 통해 ‘박학다식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지적으로 뛰어난 자는 고독을 선택하며, 이미 내면에 풍요로운 세계를 가졌기에 타인의 인정을 애써 필요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엄격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어른이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과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들이 상상의 나래를 타고 솟구치니 말이다.
물론 겸손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의도는 아마도 알량한 지식을 마음대로 떠벌리는 교만함을 경계했을 것이다. 진짜 부자는 굳이 돈을 자랑하지 않듯, 입을 닫고 지식을 내면에 저장할수록 우리의 정신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여전히 역설적이게도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통찰을 이해할수록, 나는 마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듯 요즘 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실력을 증명하거나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은 아니다. 그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여유', 그것만으로도 나 스스로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거대한 명예나 부를 쫓는 인생을 꿈꾸고 싶지는 않다. 나를 괴롭히는 사건들과 사람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인 마음을 갖는 것.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외롭지만 조용하게 나의 내면을 가득 채우는 법을 터득하는 것. 비록 입은 닫고 있지만 내면은 뜨거운 꿈을 꾸는 삶. 그것이 쇼펜하우어의 고독을 통해 도달하고 싶은 진짜 나의 모습이다.